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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을 만나다 (11/181)

///// 스승을 만나다

태호가 미술 학원에서 그림만을 그린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 막히는 부분을 다 메모 또는 복사해 두었다가 학원 원장에게 달려가 궁금한 부분을 물어봤다.

"큐비즘이 예술이 자연을 모방해야 된다는 개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만들어진 사상이라고 해요.

원급 법이나 모형화 같은 전통적인 기법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이기도 하고요.

20세기 초에 이런 미술 사조가 나타나게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그 질문을 받은 원장이나 강사들은 대학교나 대학원을 다니며 배웠던 지식을 더듬어 가며 답을 해야 했다.

"그건 큐비즘이 나오던 시대는 워낙에 사회가 빨리 변했잖아.

사진기도 나왔고, 자동차도 나왔고, 영화도 발명되고.

막 이러다 보니까 화가들 사이에서, '왜 자신들이 지난 수백 년간 했던 옛날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야 하느냐'라는 생각이 나온 거지.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던 화가들이 이런 큐비즘이라는 추상화 스타일을 만들어 낸 거야."

원장은 그러면서 '나 잘 대답했지?' 라는 표정으로 주위를 봤고 강사들은 '우리 원장님 최고'라는 표정으로 화답했다.

그 이후로도 이런 질문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오브제의 남용에 대한 미술계에 대한 의견은 뭔가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면 그게 작품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행위 예술이 보존이 될 수 있나요?

남는 것은 비디오나 사진인데, 그럼 비디오나 사진을 사고파는 행위는 예술품을 사고파는 행위라고 볼 수 있나요?

행위 예술은 기억으로만 남는 게 맞지 않을까요?"

"예술이 시대를 선도해 나가는 건가요?

아니면 시대가 반영된 예술이 나오는 건가요?

전 예술이 절대로 시대를 선도해 나간다 고는 생각하지 않거든요.

신경 쓰지 않고 있던 것을 발견해 나가는 부분은 있는 것 같아요.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를 보면 이미 대량 생산 문화가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었는데 그걸 예술로 옮긴다는 생각을 앤디 워홀이 처음 한 것뿐이죠.

그가 처음이긴 한가요?"

"제가 직접 만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가 한국에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행위 예술가가 있긴 한가요?"

"왜 동양화는 먹에 한지만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거죠?"

"자연만 그리는데 왜 사람보다 산을 더 좋아하죠?"

"동양화가 본질을 그리는 그림이래요.

서양화에서도 초상화를 보면 그 사람의 성격 기품 이런 게 드러나요.

동양화가 말하는 본질이 무엇이며 뭐가 특별한 건가요?"

"서양화는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데 동양화는 상대적으로 매우 정체된 것처럼 보여요. 이유가 뭘까요?

한번 비교적 만족스러운 답변을 듣고 나자 다른 질문들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지만 주로 20세기 관련 질문이 많았다.

점점 더 원장은 태호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머릿속에 이런 지식들을 다 넣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대학 다니며 공부했던 것들이 오래되기도 했고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도 했다.

태호의 질문에 틈틈이 책을 읽고 자기 생각을 정리하여 대답해 주기도 했다.

그러길 일 년 원장은 태호가 자기가 감당하기에 벅차다는 걸 인정하게 되었다.

태호를 보면 그림에서 미숙한 부분이 보이는 건 순전히 신체 크기가 화구를 지지하기 힘들기에 발생하는 문제들일 뿐이다.

중학생만 되어도 사라질 문제들이라 언급할 필요도 없었다.

처음에는 좀 익숙하지 않은 듯 잔 실수가 있던 그림들도 일 년이 지난 이제는 그런 걸 찾아보기도 힘들다.

유화는 이미 손댈 데가 없었다. 자기만의 독창성이나 스타일이 안 보인다는 문제는 있으나 그건 이제 국민학교 2학년도 안된 꼬마에게 기대할 사항이 아니다.

한마디로 이미 기술적으로는 이미 완성된 화가였다.

처음에 태호의 그림을 보고 각종 미술대회에 참가할 것을 권유할까 했던 원장도 이제는 그런 권유를 할 생각을 버렸다.

초등학교 2학년 그림이라고 내밀어봐야 거짓말이라며 욕먹을게 뻔하고 학교를 안 다니고 있는 태호의 입장을 생각하면 괜히 남의 입에 오르락거릴 일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태호가 어디가 모자란 아이가 아니라는 건 자신이 잘 안다.

태호 엄마 말대로 아이큐가 200이 넘는 아이가 있다면 그건 바로 태호 같은 아이일 테니까 말이다.

자기보다 나은 스승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원장은 대학원 동창 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명은 동양화 전공의 교수고 다른 한 명은 서양화 전공의 교수로, 둘 다 국전에서 입상은 물론 외국 명문대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미술계에서 인정받는 친구들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9살짜리 국민학교 2학년 그림을 보러 오라는 거지?"

미화는 오랜만에 강재범교수에게 전화를 걸어 태호 얘기를 꺼냈다.

"어 정확해."

"보고 뭘 하라는 거야? 어 잘 그렸다? 칭찬을 해줘? '참 잘했어요' 이렇게?"

"아니, 니가 데리고 가서 좀 가르쳐봐."

"국민학교 2학년을? 내가? 내가 아무리 네 동창이지만 명색이 발해 대 서양화 교수야. 국민학교 이 학년을 어떻게 가르쳐?"

"야! 내가 결혼만 안 했어도 미국 가서 박사 따고 지금 네 자리 내가 차지했을 거야 알아? 그런 내가 얘랑 얘기하다 보면 말려. 무슨 말인지 알지?"

"그 정도야?"

"너 국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언제 입상했냐?"

"어 군대 갔다가 4학년 때니까 한 25인가 26인가? 내가 그해 최연소였지."

"얜 지금 당장 내년이라도 입선 가능한 애야. 인맥 학맥 없이 완전히 공평하다면 못해도 입선은 충분히 할 수 있어."

"농담이지?"

"나한테 재능이란 이런 거라는 걸 보여준 애야. 자괴감이 들 정도로.

이런 천재는 난 본 적이 없어. 아이큐가 200인 이런 애는 아니지만 적어도 미술 쪽으로는 천재야."

"다 좋아. 근데, 가르쳐서 뭘 어쩌라고?"

"뭘 어쩌긴. 천재니까 가르쳐 보는 거지.

교육자가 할 일 아니야? 알았어.

니가 안 내키면 그럼 내 창기한테 전화한다. 동양화 천재로 키우면 되겠네. 야! 끊어!"

"잠깐. 잠깐. 여기서 창기가 왜 나와?"

"니가 안 가르친다면서? 너 뭔가 착각하는데 니가 걔를 가르칠 기회를 잡는 거야.

니가 가르침을 베푸는 게 아니라. 그 정도의 천재야.

야 됐어. 시간 낭비했네. 전화 끊는다."

"알았어. 간다고. 가. 언제 가면 돼?"

오랜만에 대학교 동창에게 전화한 원장은 바로 창기라는 다른 동창에게 전화를 했다.

이상하게 강재범교수와 얘기할 때는 목소리를 높이는 원장이다.

강 교수는 은근히 사람 속을 긁는 재주가 있었고 원장은 그에게 쌓인 게 많았다.

"어 오랜만이야, 미화야. 잘 지냈지?"

"그래. 잘 지내. 이번에 국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 된 거 축하해."

"고마워. 근데 학벌로 단 심사위원인 거 같아 조심스러워."

"아니야. 누가 네 실력을 의심해."

"고마워. 그래, 오랜만에 전화했는데 무슨 일이야?"

"다름이 아니라 내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하나 있어.

그런데 난 이런 애를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천재야.

그림이면 그림. 이론이면 이론. 빠지지 않아.

내가 가르치는 게 힘겨울 정도로 애가 뛰어나."

"천하의 미화가 앓는 소리를 다할 때가 있네. 어떤 앤데? 예고에서 알아주는 인재 뭐 그런 거야?"

"놀래지 마. 국민학교 2학년이야. 9살."

"9살? 너답지 않은 농담인데?"

"나도 직접 안 봤으면 믿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이렇게 존재하네"

"어떤 점이 널 힘들게 하는데? 그림으로 널 힘들게 할 것 같지는 않은데?"

"9살 꼬맹이가 영어로 된 원서를 읽고 와서 나한테 질문을 해.

나에게 한 첫 질문이 큐비즘의 탄생 배경에 대해 물어보더라고.

대학에서는 교수에게서는 쉽게 배울 수 있는 내용이지만 책을 찾아서 보기엔 까다롭지."

"질문이 예리한데?

우리가 처음 미술사 배울 때도 현대 미술 넘어가는 그 시대에서 많이들 의아해하잖아.

갑자기 미술사조가 확 바뀌어서."

"나도 그래서 겨우 기억이 나서 대답했다.

더 재미있었던 건 내 대답을 듣고 나서 마치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하더라고.

9살짜리가. 아니, 그땐 8살이었지. 기가 막히지."

"내가 뭘 도와줄 수 있는데?

얘기 들어보니 시각 예술 쪽 할 거 같은데, 유화에 관심 있어 하지 않아?

수묵화 같은 동양화에 관심이 있을까?"

"큐비즘 예를 들긴 했는데 동양 미술에 대해서도 관심은 있어.

그리고 그쪽으로는 상대적으로 질문 수준이 낮아.

서양화는 날 깜짝 놀라게 할 수준의 질문이 나오는데 비해 동양 미술은 뭐랄까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거나 잘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그래서 좀 더 균형을 맞춰야 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이 아이는 뭘 해도 잘할 아이니까."

"그래. 보고 판단하자. 이 분야도 나이 어린 스타가 필요해.

여긴 너무 나이 든 사람들만 있다 보니 답답하고 고루해.

발전도 없고... 언제 가보면 돼?"

이틀 후, 두 사람은 미술 학원에 걸린 태호의 유화 작품들을 보고 그냥 할 말을 잃었다.

"이게 9살 국민학생이 그린 그림이라고? 말도 안 돼."

강재범 교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고, 김창기 교수는 표정은 없지만 눈은 놀란 기색이 역력하다.

"아이는?" 김창기 교수가 물어본다.

"거의 올 때가 다 되었어. 10분 안에 올 거야.

꼬맹이가 시간은 정말 칼같이 지켜. 이건 또 이 동네 사람들이랑 다르네."

정말 10분이 채 안 되어서 태호는 학원에 도착했고 원장과 강사들에게 인사를 했다.

"태호야 이리 와봐. 오늘 소개해 줄 분들이 있어."

원장은 태호를 자신의 오른쪽에 두고 두 교수에게 소개를 했다.

"이 두 분은 한국에서 정말 유명한 대학의 교수님들이야. 선생님 대학 동창이기도 하고."

"안녕하세요."

태호는 재빠르게 상황 파악을 한 후, 엄마가 가르쳐준 데로 배꼽 인사를 했다.

태호 아빠가 잘 보일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는 배꼽 인사가 효과가 좋다고 가르쳐줬다.

강재범 교수는 악수를 청했으며 김창기 교수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둘 다 잘 생긴 꼬맹이 얼굴에 다시 놀란 표정이었다.

정말 아역 탤런트를 하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이름이 태호라고? 9살이고? 어떤 작품을 좋아하니? 선호하는 화가는? ."

강재범 교수가 먼저 물었다.

"후기 인상파로는 르누아르요. 그림이 행복해서 좋아요.

그전 시대 화가로는 렘브란트. 이 사람처럼 깊이 있는 초상화도 그려보고 싶고요.

그 이전은 라파엘로. 미켈란젤로도 끌리긴 하는데 전 라파엘로의 선이 더 좋더라고요.

원근감도 더 좋고. 그림도 깔끔하고."

"혹시 현대 미술 쪽으로는?" 강 교수가 추가로 물어봤다.

"초기 피카소 작품들 좋아해요. 후기 그림들은 정말 별로지만.

후기 작품들 보고 그 아저씨한테 정말 실망했어요.

리히텐슈타인 작품도 좋아해요. 만화 같아서.

근데 그림을 좋아하는 거지 그 안에 들어간 텍스트를 좋아하지는 않아요.

텍스트가 길게 들어가 버리면 정말 만화가 되어버리잖아요."

"혹시 동양화 쪽에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 있니?" 김창기 교수가 물었다.

"윤두서 자화상 좋아하고요. 호쿠사이 작품들도 좋아해요.

중국 작가들은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산수화를 즐기지 않아서요."

원장이 차려온 차를 마시며 그렇게 한 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다 보니 두 교수는 태호의 상황과 관심사 등을 이해하게 되었다.

다만 이 아이를 두고 뭘 가르쳐야 될지는 판단이 안 섰다.

"태호는 커서 어떤 화가가 되고 싶은 게 꿈이니?" 김창기 교수가 물었다.

"어떤 화가가 되어야 되는지 그걸 잘 모르겠어요.

그림을 그리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무슨 그림이 이 시대에 맞는 건지는 영 감이 안 와요."

태호의 고민은 사실 대부분의 화가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같다.

그림을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실력차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화가들이 하는 고민이다.

생각 혹은 아이디어를 얼마나 효과적 표현했느냐가 제일 중요하다.

그게 회화가 되었던 조각이 되었던 영상이 되었던 그건 그다음이다.

사실 현대 예술에서는 생각 또는 아이디어를 자신이 잘 다루는 분야 혹은 자신 있는 매체를 통해 드러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반대로 물어보자. 태호가 마음에 안 드는 현대 예술은 뭐가 있을까?" 강재범 교수가 물어봤다.

"레디메이드요."

"왜지?"

"레디메이드는 정말 잘 사용해야 되는 어려운 주제인데 다들 너무 쉽게 접근하는 거 같아서요."

이 대답을 들은 둘은 태호를 가르쳐보기로 한다. 적어도 자기가 가르치는 대학교 1학년들보다는 나아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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