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원을 다니다2 (10/181)

///// 학원을 다니다2

그림이란 본질적으로는 안료를 특정 표면 (회벽, 판자, 종이, 캔버스 등등)에 바른 후 굳힌 것이다.

안료는 미디엄 (매제, Medium)을 통해 굳히는데 물이 미디엄이 되어 캔버스 등에 그리면 수채화, 기름이면 유화, 물을 미디엄으로 이용해 젖은 회벽(석고)에 그리면 프레스코 벽화, 달걀노른자와 아교를 안료로 사용하면 템페라화이다.

미술사도 따지고 보면 '어떤 안료와 미디엄을 이용해 그림을 그렸는가'라는 기술적 요소에 크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유화는 그리스 로마시대 때부터 초기 모습을 갖추었으나 실제로 미술의 중요 형식으로 자리 잡은 건 르네상스로 접어들면서부터이다.

유화에 들어가는 안료는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납, 비소, 카드뮴 등 이름만 들어도 암에 걸릴 것 같은 위험한 중금속이 포함된 재료들이 사용되었다.

현대에는 발달된 기술 덕분에 독성이 없는 합성 안료를 사용하지만 말이다.

지금은 이런 합성 안료를 대량 생산하기에 값싸게 유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희소한 안료들은 비싸긴 하다.

이름만으로도 유명한 청금석 혹은 울트라마린은 지금도 푸른 황금으로 불리며 고가에 거래되고 있다.

태호가 본격적으로 유화를 그리겠다고 하자 원장은 유화에 대한 기본부터 찬찬히 가르치려고 했다.

태호는 이미 책에서 본 듯 유화에 대한 모든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유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자, 태호는 숙영을 학원으로 불렀다.

"오셔서 반갑습니다."

웃으며 반기는 원장을 숙영도 어색한 기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태호가 자기 첫 그림으로 저를 그려보고 싶다고 졸라서요."

숙영은 꼭 자기를 그려보고 싶다는 태호의 성화에 못 이겨 휴가까지 내고 나왔다.

태호는 집에서 들고 온 화구들을 익숙한 듯 펼쳤다.

이젤 위에 12호 정도 되어 보이는 캔버스를 올려놓은 후, 조금씩 모델의 포즈를 바꿔가며 구상을 마쳤다.

빠르게 스케치를 시작했다.

유화를 그릴 때에는 스케치에는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짧은 시간에 연필을 내려놓더니 바로 팔레트 나이프로 스케치한 캔버스의 바깥 부분을 차콜 블랙으로 칠했다.

그리고 가운데 부분을 능숙하게 유화 물감을 칠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 절대로 유화를 처음 접해보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지금까지 소묘나 아크릴로도 충분히 잘 그렸고 놀랄 만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보여준 퍼포먼스는 더 대단했다.

그 조그만 손으로 마치 밥 로스가 '참 쉽죠? (that easy)'처럼 너무나도 쉽게 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밥 로스의 트레이드 마크인 'Wet on Wet' 기법을 이용한 채색이었는데, 이 기법은 모네나 고흐 같은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쓰는 기법으로 빠른 붓 터치를 필요로 테크닉이다.

유화 경험이 없다고 하기에 당연히 'Wet on Dry'를 예상했던 원장은 자신보다 능숙해 보이는 태호의 붓질을 보며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이 감정은 약간의 경외감으로 바뀌었다.

*

붓질은 움직임을 만든다. 윌리엄 터너의 그림에서도, 반 고흐의 그림에서도, 모네의 그림에서도 붓질은 그림을 움직인다.

윌리엄 터너의 작품 '전함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를 보면 퇴역하는 전함을 예인해 가는 증기선이 있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의 그 역동적인 모습과 지평선 위에 보이는 석양으로 물드는 붉은 구름의 모습도 붓질에 의해 만들어진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볼 수 있는 연속적이고 동적인 밤 하늘도, 모네의 양산을 쓴 여인에서도. 물감이 묻은 붓 끝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움직일 때마다 캔버스에는 공기가 생기고 흐름이 일어난다.

태호의 붓 끝은 주위의 공기를 흐르게 만들었다.

곧 숙영의 코로 입으로 공기를 불어 넣었다.

횡격막이 늘어나면서 폐가 커지고 코 주위 공기가 쑥 기관지를 타고 들어 간다.

신화에 나오는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 같았다.

원장은 태호의 뒷모습에서 누군지 알 수 없는 대가의 풍모가 느껴졌다.

처음에는 조금 큰 팔레트에 익숙하지 않은 듯 혹은 조금은 무거운 듯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곧 익숙해져 팔레트에 물감을 짜고 미디엄에 녹여 캔버스에 칠했다.

붓질은 매우 안정적이었다. 붓질에 화가의 심리가 드러나는 법인데, 경력 많은 화가들도 저렇게 빠르지만 안정적으로 붓질을 하기란 쉽지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호는 무척이나 많은 그림을 그려봤음에 틀림이 없다.

믿기 힘들었다.

저 아이와 엄마가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저 아이는 정말로 세상에서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천재인 것이다.

자신이 알기로도 어릴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어떤 화가도 이런 어린 나이에 이런 실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유화를 처음 그리는 거 맞니? 전혀 초보처럼 보이지 않아. 어디서 유화 그리는 걸 배운 거니?"

"책으로 배웠어요."

책으로 배우는게 가능했다면 원장의 미술 학원은 진작에 문을 닫았어야 했다.

"책에서 본 내용으로 이 정도로 그린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데?"

태호의 말을 믿지 못하는 원장.

"집에 엄마 전공 서적이 꽤 많아요. 도서관에서도 많이 빌려서 봤고요."

대가처럼 그리는 방법을 책으로만 보고 익혔다는 얘기다.

원장은 곧이곧대로 믿을 수가 없었다.

태호와 진실 게임을 할 수 없었던 원장은 말을 돌렸다.

"어머니는 앞으로 며칠 더 나오실 건가 봐요?"

숙영은 살짝 당황해서 태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태호가 잠깐만 있으면 된다고 했는데."

"오늘은 느낌만 보려고 엄마를 부른 거예요. 내일부터는 안 오셔도 돼요. 이게 있거든요."

태호는 가방에서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꺼냈다.

"엄마 그대로 있어요. 잠시만요"

찰칵, 지이이 하며 폴라로이드 사진이 현상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걸로 충분할까?"

원장은 이렇게 작은 사진만으로 초상화를 그리는 게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물어봤다.

"이 정도면 충분해요. 한번 본 장면은 잘 잊어버리지 않거든요."

태호는 머리를 톡톡 건드리며 대답했다.

"사진까지 있으면 절대 안 잊어버리죠. 순간의 느낌까지도요."

*

다음날.

그림을 잘 말린 태호는 캔버스에 덧칠을 시작했다.

한번 주의 깊게 본 장면은 두고두고 기억을 하는지 거침없이 캔버스에 색을 입혔다.

나날이 그림은 깊어져 갔다. 완성한 그림은 잘 말려지게 바람이 잘 통하는 곳에 옮겨 놨다.

그렇게 완성된 초상화는 순식간에 미술 학원을 미술관으로 바꿔 놓았다.

*

“이게 8살인 꼬마 애가 그린 그림이라고?”

“국민학교 1학년이지? 어떻게 벌써 이런 그림을 그리지? 이 아이는 그림을 태어날 때부터 그린 거야?”

“연필로 외곽선을 그리고 크레파스나 사인펜으로 색칠 정도 하는 게 아이들 그림일 텐데. 어떻게 유화를 그리지?"

태호가 그린 그림은 바로 미술학원 학생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고 곧 이촌동 아파트 단지 내 학부모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

"태호라는 8살 아이가 이촌 미술 학원에 다니는데, 그 아이가 그린 그림들이 예술 작품이라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해요."

"그래요? 얼마나 잘 그렸길래 그런데요?"

"나도 얘기 듣고 가서 봤죠. 한쪽 벽에 걸려 있는데, 외국 미술관에서 볼 만한 고전 명화 같아요.

아이 엄마를 그렸다고 하는데, 재벌 집 며느리 상이라고도 다들 그래요.

수지 엄마도 가서 한번 봐봐요. 거기 그 아이가 그린 다른 그림들도 많이 걸려 있데요."

*

수지 엄마의 이름은 장선영.

셋째가 둘째와 좀 터울이 있고, 올해 국민학교를 입학했다.

학교는 이촌 국민학교였는데, 올해 초 학교를 발칵 뒤집어 놓은 태호 퇴학 사건은 아직까지 엄마들 사이에 회자되는 유명한 이야기였다.

선영은 입학식 때 셋째가 태호라는 아이 근처에 있었기에 태호 부모를 곁에서 봤다.

부모가 둘 다 인물이 워낙에 좋았고, 태호라는 아이도 인물이 출중했기에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다.

중3인 첫째가 공부에 영 소질이 없어서 미대로 진로를 바꿀까 고민하던 차에 진로 상담 핑계로 학원을 방문해 보기로 결심했다.

선영이 미술 학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선객들로 학원이 만 원이었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관람객처럼 이들은 조용히 그림을 보고 있었다.

잘 그려진 다른 그림도 많았지만 단연 압권은 태호가 그린 숙영의 초상화였다.

멀찍이 보이는 그림은 마치 궁정 화가가 심혈을 기울여 그린 어느 왕비의 초상화 같았다.

어깨 위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서 마저 우아함과 기품이 흘러넘쳤다.

왜 엄마들이 미술관에 온 느낌이라고 말하는지, 재벌가 며느리 상이라고 하는지 단박에 이해했다.

엄마들의 상상력의 한계다. 재벌 상이라니. 이건 여왕 상이다.

원장은 선영이 학원 문에서 기웃기웃하자 반갑게 문을 열고 선영을 안으로 안내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입시 상담을 하러 왔다고 말하려다 생각을 고쳤다.

이미 사람들이 이리 많은데 자기 하나 더 늘어난다고 무슨 영향이 있겠는가?

"그림 좀 보고 싶어서 왔어요. 미대 입시에 대해 물어보는 게 더 중요하긴 한데요... 상담은 좀 나중에 하고요."

원장은 이해한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 보시면 얘기해 주세요. 오늘 찾아온 분들이 많으시니 집중해서 보시긴 힘드실 거예요."

"감사합니다. 조용히 볼게요. 그리고 원장 선생님을 찾을게요."

눈에 보이는 그림은 10점 정도였다. 소묘와 아크릴 작품이 대부분이고 유화 한 점이 있었다.

소묘 작품 얘기는 유화에 밀려 많이 회자되지는 않았다.

선영이 보기엔 이 소묘만 하더라도 그 태호라는 아이의 천재성을 알아보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림을 보니 태호 엄마의 행동이 이해가 갔다.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아이라면 일반적인 국민학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무척이나 예민한 예술혼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틀림없다.

자기는 모르겠지만 막내딸을 끔찍이 생각하는, 거기다가 다혈질인 남편이라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첫째를 미술을 시키고 싶어졌다.

이 그림의 반만 그려도 어디 가서 그림으로 밥 먹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원장에게 배우면 가능한지 확인하고 싶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여기서 배우고 쭉 미대까지 가면 저 그림같이 그릴 수 있을까요?"

원장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신 어머니들이 비슷한 질문을 하세요. 저런 그림은 저도 못 그립니다."

가능하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선영은 원장의 말에 오히려 신뢰감이 높아졌다.

"저 그림은 어느 정도 수준인 거죠? 만약에 판매를 한다면 받을 수 있는 가격이나 평가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요."

"태호는 지금이라도 초상화 화가로 전업해도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에요. 저 정도 그리는 화가는 극히 드뭅니다. 감히 예상 하건대 대통령 초상화를 그려도 될 수준이에요."

"그 정도에요? 거의 국가의 대표 화가라고 얘기하시는 건데?"

"약간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제가 보기엔 그래요.

그런데, 어머니. 태호를 기준으로 삼아 미대를 선택하면 안 됩니다.

태호는 어차피 순수 시각 예술 쪽으로 갈 학생이고요.

그쪽은 천재들이 경쟁하는 시장이라 왠만해서는 진입하기 어렵습니다."

원장은 본격적으로 입시 컨설턴트의 면모를 발휘했다.

"미술을 하다가 나중에 디자인 계통으로 전공을 살리는 게 대학도 잘 가고 나중에 취직도 잘돼요."

"명문대를 갈 수가 있나요?"

"물론이죠, 어머니. 쉽다고는 못하지만 인문계보다는 문이 훨씬 넓어요."

학원에는 태호가 화수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