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원을 다니다1 (9/181)

///// 학원을 다니다1

태호의 퇴학은 이촌동에 커다란 충격을 남겼다.

촌지가 난무하던 시절에 선생을 소송으로 겁박할 수 있다는 선례도 남겼다.

국민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이촌동의 모든 학원이 태호를 블랙리스트에 올렸다.

진상 똘끼 넘치는 집으로 찍혔지만 부부는 회사 생활로 바빠 모르고 넘어갔다.

태호가 학교는 가지 않지만 그렇다고 교육을 소홀히 한 건 절대로 아니었다.

국어, 산수, 사회, 과학은 과외를 받았다. 어렵지 않게 과목들을 소화했다.

한동안 집에서 오전에 배운 과목들을 복습하던 태호는 금세 질렸는지 그림을 배우고 싶어 했다.

숙영은 아들이 미술 학원을 다니고 싶어 하자 집 근처의 학원들을 알아봤다.

태호의 수준에 맞는 학원을 찾다 보니 결국에는 미대 입시 전문 학원을 찾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태호는 엄마의 손을 잡고 미술 학원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학원 이름은 이촌 미술 학원. 태호가 사는 아파트 단지의 상가에 위치한 학원이었다.

안쪽에서는 3명 정도의 고등학생들이 석고 소묘를 하고 있었고 2명의 20대 후반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강사들과 40대로 보이는 원장 선생이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원장은 약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자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여기가 이촌동에서 제일 잘 가르치는 학원이라고 해서 왔습니다. 아이가 그림을 매우 잘 그리는데 좀 더 전문적으로 배우고 싶어 해서요."

"저희는 대입이나 예고 입시를 준비하는 학원이에요. 여기 학생처럼 어린 학생을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알고 왔습니다, 원장님. 우리 태호가 여기에서 공부하기에 어리다는 것도 알고요.

하지만 이곳이 아니면 근처에 이 아이를 가르칠만한 데가 없기 때문에 왔습니다.

그냥 테스트 한번 해보시고 아니다 싶으면 저희는 돌아가겠습니다. 그것도 안 될까요?"

자신의 아들딸이 피카소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인줄 착각하고 오는 학부모들이 꽤 있었다.

이런 일에 시간 낭비가 하기 싫은 원장은 자신도 모르게 뾰족한 소리로 대답했다.

"괜한 시간 낭비가 아닐까 싶네요."

숙영은 모든 걸 포용하겠다는 자세로 원장의 기분 나쁜 말투도 너그러이 받아 넘겼다.

그림을 보면 달라 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정 지어서 말씀하시지 마시고요. 태호 그림을 보고 판단해 주세요."

원장은 자식들이 천재라고 착각하는 부모들에게 늘 해줬던 레퍼토리 같은 말을 건냈다.

"실례지만 많은 부모님들이 그렇게들 말씀하세요."

'다들 자기 아들딸이 천재인 줄 착각들을 하시죠'라는 뒷말은 아꼈다.

"잠깐만 시간을 내주시죠? 커피 한잔할 시간이면 될 거 같은데요.

서울에 위치한 예술계 고등학교에 대해 궁금한 것도 있고요."

"아이의 진학을 얘기하기엔 좀 이른 거 같긴 하지만... 뭐 그러시죠."

원장은 마지못해 허락했고, 강사들은 인형 같은 태호가 이쁜지 가까이 가 볼을 쓰다듬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이젤과 스케치북 좀 가져다주시겠어요? 연필하고 지우개는 가져왔는데 스케치북은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힘들거든요."

원장의 눈짓에 강사 하나가 이젤과 스케치북을 챙겨 태호에게 가져다줬다.

태호는 이젤 앞 의자에 앉아 가져온 4B 연필로 빠르게 엄마와 원장이 앉아 있는 모습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슥슥 움직이기 시작한 태호의 손동작은 점점 리듬을 탔다. 바이올린의 활대를 잡은 것처럼 경쾌하게, 때로는 첼로를 켜는 것처럼 진중하게 움직였다.

연필이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지휘봉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선을 그리고 면을 창조했다. 거기에 손으로 문질러 음영을 주고 불필요한 부분은 지우개로 지웠다.

그렇게 그림 하나를 뚝딱하고 그리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10분. 손놀림에 주저함도 없었고 연필 끝이 스케치북에서 떨어져 있던 순간도 얼마 안 되는 그야말로 전광석화 같은 속도였다.

옆에서 태호가 그림을 그리는 것을 지켜본 강사들은 처음에는 꼬마 아이가 연필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시원시원하게 그린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순수하게 그림을 그리는 실력만 놓고 봐도 자신들 아래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데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마치 무협 소설에 나오는 일류나 이류 무사가 있는 도장에, 도장 깨기를 하러 온 절대 고수의 분위기를 풍겼다. 이건 분명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이제 막 8살이 된 꼬마에게서 수십 년 그림을 그린 장인의 기교가 묻어 나왔으니 말이다.

"다 그렸어요." 태호가 말하자 원장과 숙영은 태호의 그림을 확인하기 위해 태호 쪽으로 다가왔다.

"이 정도면 괜찮죠?" 숙영이 자기 아들의 그림 실력을 평가해 달라고 원장에게 얘기했지만 원장은 말이 없었다.

그림을 이루는 선은 간결했다.

테두리는 굵은 선으로 세부적인 형태는 가는 선으로 표현했다.

날카롭지만 자유로운 선들은 자신만만한 표정의 엄마와 살짝 당황한 표정의 원장을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도록 묘사하고 있었다.

옷의 큰 주름들은 강한 선으로 표현했지만 그 외 디테일은 간단한 면과 선으로만 표현해서 관찰자의 관심이 두 사람의 얼굴에 집중되게 했다.

원장은 이런 많지 않은 선들을 이용하여 사람의 감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화가를 매우 잘 알고 있다.

바로 20세기 초 30살이 되지 않은 나이에 독감으로 요절한 천재 화가 에곤 실레다.

원장은 태호의 소묘에서 그의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리고 떨리는 마음을 감추며 태호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혹시 태호가 몇 살이죠?"

"이제 국민학교 1학년이죠. 그러니까 8살이요."

"따로 미술 공부를 시킨 적이 있으세요?"

"아니요. 태호는 혼자 공부했어요. 도서관에서 미술 잡지나 영어로 된 원서를 보고 공부한다거나 미술관에 간다거나 그 정도죠."

원장은 숙영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잡지니 영어 원서니, 무슨 뜬 구름 잡는 얘기로 들렸다. 하지만 결론은 이거였다.

"어찌 되었던 다른 사람에게 미술을 배운 적이 없고 독학만 했다는 거네요."

"그렇죠."

"스케치 말고 다른 매체는 이용해서 그림을 그려봤나요? 유화 같은 거요."

"냄새가 독해서 유화를 그리게 하지는 않았어요. 스케치 아님 파스텔이나, 물감, 크레파스 정도를 이용해서 그려봤어요. 그런데 좀 답답해하더라고요. 유화를 그리고 싶어 하는데 아무래도 잘 아시는 분들이 옆에서 봐주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다른 그림들도 봐야 되겠지만 이 그림만 봐도 뭘 해도 잘 그릴 거 같군요. 지금처럼만 하면 예고나 미대 들어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을 거 같은데 굳이 학원을 오신 이유가 뭘까요? 물론 배우고 가는 게 입시에 더 유리하긴 합니다만, 태호가 다니기엔 너무 이른데요."

"유화를 그릴 공간이 좀 필요하고요. 유화가 아무래도 냄새가 좀 나는데 집에 그럴 공간이 없어요.

원서를 볼 때 태호가 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고 해요.

저나 애 아빠나 예술은 좋아해도 아들이 물어보는 거에 대답할 역량은 안 돼요.

그래서 혹시 여기 원장 선생님이나 다른 선생님들이 그런 부분을 도와주셨으면 해요."

원장은 좀 고민하더니 태호를 가르쳐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 같았고, 학원 홍보에도 나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태호 엄마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 그럼 시간은 어떻게 할까요?"

"태호가 학교를 다니지 않아요. 그래서 오후 시간은 다 괜찮아요."

"네? 학교를 안 다닌다니요?"

원장은 처음에는 잘못 들은 얘기인줄 알았다.

아니 의무 교육인 학교를 어떻게 보내지 않는 다는 것인지.

"원장님도 보셔서 아시겠지만 국민학교가 태호 수준에는 좀 안 맞잖아요.

그래서 홈스쿨링을 해요."

"우리나라에 홈스쿨링이 되나요?"

"호호. 저랑 애 아빠가 발품 좀 팔아서 알아둔 게 있어서요. 오전에는 집에서 태호 교육을 하고 있어요. 그리고 오후에는 태호가 좋아하는 그림 공부를 시켜보려고요."

"흠... 그러면 이렇게 하죠. 현재 학원에는 태호를 위한 프로그램은 없어요.

따라서 태호가 올수 있는 학원 시간이나 학원비 같은 건 정해진 것도 없고요.

2주 정도 지켜보고 저랑 다른 선생님들이랑 의논해서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알려드릴게요.

일단은 내일부터 오는 걸로 하고 준비물은 여기 적힌 대로 준비하시면 돼요."

원장은 예고 입시 준비반의 준비물 리스트를 태호 엄마에게 전달했다.

"그럼 내일부터 태호를 보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원장 선생님."

태호는 다음날부터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원장과 강사들은 태호의 실력에 푹 빠져들기 시작했다.

*

원장의 이름은 오미화.

대한대 미대 출신으로 졸업 후 일찌감치 미술 학원을 운영해왔다.

이제는 이촌동은 물론 서울 안에서도 손꼽히는 미대 진학률로 이름이 높았다.

그런 원장에게도 며칠 동안 지켜본 태호의 그림 실력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선 만으로 그려진 그림에서는 에곤 실레가 느껴지지만, 색채를 쓰는 것을 보면 루벤스의 느낌도 났다.

물감을 진하게 이용해 그림을 그릴 때는 모네 같은 인상파 화가의 느낌도 풍겼고, 깔끔하게 선과 붓 자국을 가리며 그린 그림을 보면 앵그르 같기도 했다.

어디서 배운 건지 알 수는 없지만 붓질과 물감 사용이 정말 능수능란했다.

태호의 현재 나이를 생각해 보면 지금 실력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술사는 미술가들의 역사라고 생각해 온 원장에게 천재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아른거렸다.

원장은 유화를 다루기 전에 빨리 마르는 아크릴로 유화에 대한 감을 잡게 했다.

곧 아크릴도 다뤄본 지 오래된 사람처럼 금방 익숙해졌다.

칠하는 속도, 물감과 물의 양, 덧칠로 수채화 느낌과 유화 느낌 사이를 오고 갔다.

태호는 마치 지금까지 집에서 그림을 못 그린 한을 풀 듯 '작품'을 제조해 냈다.

원장에게는 태호가 학원에 오는 하루하루가 마치 영화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은 아크릴 물감으로 그린 그림들이지만 유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면 엄청난 그림들을 그릴게 분명했다.

다만 여기엔 반작용도 있었다.

*

학생 A

"엄마, 나 붓을 꺾어야 할 것 같아. 이번에는 좀 심각해."

"무슨 일 있어?"

"국민학생처럼 보이는 애가 학원에 왔잖아."

"전에 왔다는 애?"

"응. 그 꼬맹이가 그림을 그리는데 강사 선생님보다 잘 그리는 건 당연하고 원장 선생님도 걔만큼 그릴 거 같지 않아.

그냥 타고난 천재 같아. 난 죽어도 걔처럼 그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어떡하지?

원래 예술은 그런 천재들만 하는 건가?"

"너도 지금까지 수재 소리 들으면서 미술 했잖니."

"나 같은 건 비교가 안 돼. 그냥 이건 어나더 레벨이야. 처음에 봤을 때는 너무 잘 그려서 질투도 나고 그랬는데. 지금은 그냥 멍하니 보기만 해."

"왜 보는데?"

"아름다워서. 그림 그리려고 팔을 움직이는 것 자체마저도 아름다워.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 그게... 아니... 그렇게 잘하는 걸 보면...

쫓아갈 수 있다는 그런 희망이 생기고... 나도 분발하고... 그런 맘이 들어야 되는데...

그런 마음이 전혀 들 자기가 않아... 인정을 해버리고... 내가 따라갈 수 없다는걸...

그러니까 내가 너무 슬퍼져서... 흑흑흑... 나 앞으로 어떻게 해? ... 흑흑흑..."

"어휴, 우리 딸. 괜찮아 괜찮아. 너도 잘 할 수 있어."

*

학생 B

"엄마, 엄마, 엄마. 내가 왜 미술 학원에 꼬맹이 하나가 들어왔다고 했잖아.

글쎄 글쎄 글쎄, 걔가 그림을 정말 미친 듯이 잘 그려.

우와, 이건 무슨 피카소야. 원장 선생님도 걔만 오면 걔 옆에만 있어.

'왜 학생들 안 봐주고 걔 옆에만 있냐' 해서 애들이 불만이 많았는데, 지금은 애들도 하나 둘 걔 옆에서 구경만 해.

그런데 엄마, 걔 그림 보는 게 실력 느는데 더 도움이 돼.

보고 있으면 정말 빨리 그리거든?

그런데 오래 그린다고 잘 그리는 게 아니란 걸 걔가 보여주더라.

그리고 더 좋은 게 뭔지 알아?

이 꼬맹이가 잘 생겼어. 보고 있으면 무슨 동화책 주인공 같아.

흐흐흐. 걔가 빨리 크면 좋겠다.

내가 졸업하고 딱 기다렸다가 걔 대학 입학하면 바로 사귀자고 대쉬 하면 되는데. 흐흐흐."

"걔가 몇 살인데?"

"8살?"

"너 고3이야. 정신 차려 이년 아!"

*

학생 C

"나 진로 바꿔야 될 거 같아."

"또 왜?"

"아무래도 만화 그리는 걸로 전공을 바꿔야 될 것 같아."

"만화가 굶어 죽기 딱 좋다고 얼마나 얘기했니?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또 하는데?"

"얼마 전에 국민학생 하나 들어왔잖아.

그 1학년이라는 애. 걔가 그림을 그리는데.

아주 그냥. 이건 뭐 기계야.

그래도 내가 그림 그리길 잘 했다고 생각은 한 게, 이거 하면 적어도 결혼은 하겠더라."

"무슨 말이야?"

"그 꼬맹이가 그림 그리는데도, 워낙에 잘 그리니까 여자애들이 눈에 하트가 뽕뽕 그려지더라고.

꼬맹이가 잘 생긴 것도 있긴 하지만.

나도 그렇게 잘 그리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내가 지금 실력으로 한 10년 전으로 돌아갔으면 그래도 해 볼만했을 텐데."

"먼저 살부터 좀 빼고 말을 하자. 엄마는 20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랬으면 너 같은 아들 안 낳았을 텐데."

"엄마!"

*

일주일 뒤.

"원장 선생님! 원장 선생님. 글쎄 태호네 엄마가 요즘 이촌동에서 젤 유명한 사람이래요.

글쎄 별명이 이촌동 미친x이라고..."

어디서 듣고 왔는지 손 강사는 숙영에 대한 얘기를 학원에서 했다.

이 미술학원에도 드디어 숙영의 정체가 드러났다. 입시 전문 학원이라 좀 늦은 편이었다.

이미 이촌동에는 천재 진상 아들과 미친 엄마의 얘기가 도시괴담처럼 돌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