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까칠한 아이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본 숙영은 화방에서 스케치북과 물감 등 필요한 미술 용품을 잔뜩 사다가 집에 비치해 놓고 아들의 그림 연습을 도왔다. 미대 졸업 후 광고 기획사에 입사했기에 집에는 학생 시절 쓰던 미술용품들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태호가 꾸준히 그림을 그리기는 했지만 집안 전체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 것은 숙영의 초상화를 그리고 난 후였다.
태호는 연필에 완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이 들자 최고급 소묘용 드로잉 용지를 샀다. 이를 이젤 위에 올려놓고 퇴근 후 저녁 먹고 쉬고 싶어 하는 숙영을 기어이 이젤 앞 의자에 앉혔다. 숙영은 첫날 두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있었다. 태호와 대화라도 했으면 좀 더 시간이 수월하게 지나갔으련만, 태호는 말없이 그림에만 집중했다. 두 시간이 지나고 태호가 그린 그림을 확인하러 간 숙영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어느 정도 밑바탕은 되어 있을 줄 알았던 용지에는 틀만 겨우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단순한 틀이 아니었다. 세세한 선으로 두껍게 쌓아올린 면들이 거대한 입체감을 구현하고 있는 틀이었다.
숙영을 감탄하게 만든 것은 가르쳐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호의 그림은 소묘의 기본을 충실히 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필압에 의한 선의 강약 조절, 춤의 동선을 그린 듯 부드러운 곡선, 거침없이 구사된 선들이지만 선들에서 느껴지는 탄력과 리듬감은 소묘의 격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이제 겨우 5살짜리가 그린 소묘에서 격이 느껴지다니... 숙영은 자신이 아는 가장 천재인 모차르트를 생각했다. 그가 5살 때 작곡한 미뉴에트 G장조의 수준과 태호가 지금 그린 그림의 수준을 비교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분야는 다르지만 충분히 비견될 만하다고 생각했다. 첫날에는 말이다.
둘째 날, 태호는 숙영을 자신의 이젤 앞으로 호출했다. 숙영은 남편 영준을 불러 이젤을 TV 근처로 옮기게 했다. 영준은 말없이 아들과 이젤을 TV 근처로 옮기고 의자 각도를 조절해 숙영이 모델이 되는 동안에도 자연스럽게 TV를 볼 수 있도록 했다. 작업 능률은 다소 떨어졌지만 작업 시간의 증가는 능률 감소를 상쇄함이 있었다. 모두가 완전히는 아니지만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태호가 드디에 얼굴에 윤곽을 잡았다. 숙영은 마치 자신에게 새로운 얼굴이 생긴 듯했다. 명암도 좀 더 깊어졌다. 이젠 어디서 빛이 들어오고 그늘을 창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셋째 날엔 영준은 더 이상 소파에서 편히 TV를 볼 수가 없었다. 숙영의 어깨를 주물러 준다거나 의자 옆에 앉아 다리를 주물러 주는 등 마사지사로 변해 있었다. 숙영의 표정이 어제보다는 더 편해져 있었고 더 풍부한 표정을 지었다. 영준은 아내의 눈치와 아들의 무관심 속에 갑을병 중 병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쳐갔다.
그림은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정교한 원근법과 깊은 명암은 그림 2차원의 평면에서 3차원의 입체감을 주는 착시를 일으키게 했다. 빛, 음영, 농도, 양감, 원근감은 그리 크지 않은 소묘용 도화지에 환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태호는 그림을 완성한 것이 아닌 듯, 여전히 선 긋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영준과 숙영은 울상이었다.
넷째 날은 마사지에 눈을 뜬 영준이 발 마사지용 크림까지 마련해 와 숙영의 발을 적극적으로 주물렀다. 어젯밤 부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침에 보니 두 사람 눈에서 꿀이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태호의 작업은 거의 마지막에 이르렀다.
종이에 여전히 터를 잡고 있었던 숙영은 이제 그림의 평면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얼핏 보면 흑백 사진의 한 장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좀 더 눈에 힘을 주고 애정을 가지고 다시 보면 그림은 사진이 보여주는 단순한 사실 그 이상을 집요하게 보여준다. 그림 속에 숙영은 숨을 쉬고 있었다. 애정이 담긴 눈으로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고 얼굴의 근육에는 약간의 나른함이 담겨 있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애정 넘치는 눈빛과 얼굴에 담긴 나른함이 약간은 부조화스럽지만 어쩌겠는가. 상황이 그랬던 것을.
소묘는 지금 자체만으로 완벽했다. 그리고 보는 사람들을 충분히 홀릴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색을 더한다고 하더라도 옷에 달린 악세사리에 불과할 뿐, 메인 드레스의 아름다움에 큰 변화를 주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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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의 재능이 음악 쪽이었다면, 5살에 타고난 재능만으로 작곡을 할 수 있는 재능이라면, 음악가로 성공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의식/무의식적으로 흥얼거리는 몇 마디 가락이 곡의 주제 부를 형성한다. 이를 바탕으로 전체 곡이 만들어지는데, 제일 어려운 첫 멜로디를 끌어내는 재능이 출중하다면, 다른 경쟁자보다 크게 앞선 상태에서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시각 예술, 즉 미술 분야에서는 그림 그리는 재능이 절대적이지는 않다. 아이디어만 좋다면 자신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아이디어가 반영된 작품을 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 손가락의 힘은 필요하다. 완성된 작품에 사인은 해야 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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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그림을 세 식구가 한참을 쳐다봤다.
"태호가 정말 그림을 잘 그리는구나."
영준은 그저 그림이 주는 충격에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확실히 자신의 아들이 대단한 재능을 가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숙영의 전신이 환희로운 감동으로 떨렸다. 갑자기 눈물 한 방울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기쁨의 눈물이었다. 지난 세월 아들이 자폐 증상으로 고생했던 시절을 다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감정이 북받쳐 올라, 결국 태호를 껴 앉고 꺼이꺼이 울고 말았다. 영준도 아들의 엄청난 재능에 속으로 신이 나서 환호를 했지만,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달래주느라 자신의 기쁨은 속으로 삼켰다.
한참 동안 아내를 달랜 영준은 다시 찬찬히 그림을 봤다. 얼마 되지 않아 모나리자를 떠올렸다. 모나리자의 신비한 미소를 이 그림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짝 핀트는 달랐지만 그림 속 아내의 얼굴에도 신비로운 표정이 있었다. 마릴린 먼로가 떠올랐다. 특히나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가 떠올랐다. 모나리자의 미소가 은은한 미소라면,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는 원색의 강렬한 미소다. 영준은 이 검은색으로만 된 소묘에서 컬러풀 한 원색의 강렬함이 떠올랐다.
"약간 마릴린 먼로 닮지 않았어?" 영준이 무의식중에 말했다.
"마를린 먼로?" 숙영은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맹렬히 분석하기 시작했다.
"눈을 지긋이 뜬 그 흑백 사진이 떠올라서. 난 그 사진으로 만든 앤디 워홀 작품이 더 좋지만."
"무슨 의민데?"
영준은 숙영의 귀에만 속삭이듯 말했다.
"섹시하다고."
"애 앞에서 못하는 말이 없어." 숙영은 주먹으로 남편의 가슴을 살짝 치며 부끄럽다는 듯이 말했다.
다행히 모범 답안이었다.
"당신은 어떤 그림이 떠올랐어?"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성 안나와 성모자)"
"레오나르도 다빈치?"
"응. 난 모나리자보다 그 작품의 성모가 더 좋아. 훨씬 자애롭고 사랑이 넘치는 표정을 가지고 있거든. 모나리자보다는 미소가 분명한 거 같아."
영준도 동의했다.
이 그림은 다른 관점으로 관찰하면 신비롭게도 다른 표정을 보여준다.
순간 영준의 두뇌는 백만 볼트 전류가 흐른 듯한 전율에 휩싸였다.
스푸마토 기법으로 그린 그림도 아닌데, 보는 각도에 따라 관찰자에 따라 느낌이 크게 달랐다. 미묘하게 다른게 아니었다. 아들의 그림 제작 과정을 며칠째 옆에서 지켜봐 왔음에도, 완성된 그림에서 느껴지는 게 이렇게나 다르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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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마토 (Sfumato)란 '부드럽게 하다', '연기처럼 증발한다' 라는 뜻의 이탈리어아 어로, 그림에서 미세한 그레데이션을 이용해 선과 선 또는 색과 색 사이의 경계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연결하는 그림 기법을 일컫는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르네상스의 대가들이 즐겨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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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는 그림을 보면 누가 떠올라?"
"엄마."
태호는 목적에 맞게 그림을 그린 것뿐이었다. 단지 관찰자의 해석이 다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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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에 대한 이야기는 일가친척들에게 빠르게 퍼져갔다. 대구의 할아버지는 영준에게 태호의 그림 한 장 한 장 절대 허투루 보관하지 말고 잘 가지고 있으라고 신신 당부를 했고, 충주의 할머니는 돈을 송금하며 태호가 사용할 미술 도구는 아끼지 말고 다 사주라고 하셨다.
태호의 대구 할머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가 자폐 증상에서 벗어난 것만으로도 부처님께 감사하며 이틀이 멀다 하고 절에 가서 공양을 올려왔다. 거기에 그림에 대한 재능까지 주셨다니 부처님께 그 은덕을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난망할 따름이다. 다음에 손자가 대구에 오면 꼭 데리고 절에 데려가야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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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가 그림에 회화에 엄청난 재능이 있다는 것을 확인한 숙영은 며칠간 하늘로 날아갈 듯한 기분을 느끼며 살아있음에 감사했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고, 주변의 모든 것이 멋지게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즐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고, 회사에 나가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머리에 꽃을 꽂는 시늉을 뒤에서 하고 손가락을 귀 근처에 돌려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 황홀하던 기분도 딱 3일 정도만 이어졌다. 그때까지 미쳐 몰랐다. 5살 짜리가 꼬마가 이렇게 고집이 쎌 수 있는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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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살 정도가 되자 태호는 더 이상 동화책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느 신동처럼 신문을 읽는 것도 아니었다. 신문은 처음에만 좀 보더니 흥미를 잃은 듯 완전히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태호는 숙영이 영어 공부 때문에 자주 듣던 AFKN 방송을 청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샌가 대학 때 숙영이 보던 영어책들과 참고서들은 태호가 들고 보고 있었다. 집에 있는 영어책을 다 볼 무렵 태호는 불어 책들을 보고 싶어 했다.
"엄마,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
"영어에는 흥미가 없니?"
"영어는 필수고 프랑스어는 내가 배우고 싶어서."
"우리 태호는 왜 프랑스어가 배우고 싶을까?"
"오노레 드 발자크의 소설을 읽고 싶어."
숙영은 아들이 프랑스 소설가처럼 들리는 사람의 이름을 얘기하자 놀랐다.
"앵그르란 화가에 대한 이야기도 궁금해. 앵그르도 프랑스 사람이었다며?"
"앵그르?" 숙영은 아는 이름이 나오자 반색했다.
"태호가 앵그르는 어떻게 알아?"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9세기 프랑스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 " 태호는 앵그르에 대해 1분 넘게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이야 미국이 예술을 주도하고 있지만 19세기에는 프랑스가 그 역할을 담당했으니까. 언젠간 필요할 거 같아서."
태호는 차분히 프랑스어를 배우고자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숙영은 태호의 말에 감탄하며 서점을 돌고 돌아 아들이 볼만한 프랑스어 교재와 발자크, 앵그르 관련 책들을 사서 집에 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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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동화책이 퇴출된 지 얼마 후였다.
"엄마, 저런 책들은 더 이상 안 사줘도 돼요."
태호는 책장에 있는 위인전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인전은 재미가 없니?"
"위인전이 재미가 없는 게 아니라, 저 위인전이 재미가 없어."
"왜 재미가 없는데?"
숙영은 살짝 피곤해 하며 태호에게 물었다. 전에도 한번 겨우 읽었을까 싶은 동화책을 아들의 성화에 눈물의 반값 세일을 했었다.
"얘기들이 다 똑같아. 장군은 어렸을 때부터 전쟁놀이를 많이 했고 통솔력이 뛰어났데. 정치인은 어렸을 때부터 남들 앞에서 웅변하기를 좋아했고. 발명가는 어릴 때부터 아이디어가 남달랐다고 해. 그럼 어렸을 적 몸이 아파 집에만 있던 장군은 없을 거고. 남들 앞에서 말하기 쑥스러웠던 정치인도 없었고. 어렸을 때 평범했던 발명가는 없었던 거겠네?"
"정말 신기한 게 어쩜 그리 그 사람들의 어릴 적 모습을 잘 알지?"
"위인들의 어린 시절은 어느 정도 다 알려져 있어."
"그건 저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 건 아닐까? 아니면 일부만 얘기했을 수도 있고. 엄마가 정치인이야. 내일모레 선거에 나갈 거야. 누가 엄마에게 어릴 적 이불에 오줌 싼 적 있습니까? 똥은요?라고 물어보면 '네'라고 대답할 거야?."
하필이면 저런 예를 드는 아들에게 살짝 짜증이 났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관점에서 얘기하는 아들이 더 신기해 보였다.
"그래도 어느 정도 솔직히 대답하지 않을까? 위인이잖아."
"누가 위인이라고 정의하는데?"
"출판사 사장이?"
"저 책은 누가 보는데?"
"우리 아들만 한 아이들이?"
"그럼 위인들이 똥오줌 이불에 쌌다고 못 적잖아. 위인들도 쌌는데 나도 싸도 돼. 이럴 거 같은데."
"알았어!" 짜증이 목 끝까지 찬 숙영은 위인전을 팔 생각에 머리가 아파왔다.
얼마 후, 위인전도 집에서 퇴출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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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호의 까칠함은 미운 5살이니 6살이니 하는 수준을 예전에 넘어섰다.
"엄마, 내 신발이 어제랑 좀 다르게 정리되어 있는데? 담부터 줄 좀 맞춰주면 안 돼요?"
"책장에 책 순서가 맞지 않아. 여기 4번책이 먼저 왔어."
"엄마, 여기서 이 고도리 버리면 안 돼. 아빠가 나머지 다 들고 있어."
"나 풀 하우스. 엄마는 스트레이트? 아빠는 플러시지? 내가 이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