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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행방 2 (3/181)

///// 그림의 행방 2

처음에는 잠시 집무실에서 그림을 치워두고 그런 그림은 없다고 오리발을 내밀려고 했던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림이 사라진 집무실에 들어와 보니 그 상실감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갑자기 벌렁거리고 그 쓸쓸하고 외로운 감정에 수십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까지 생각나 나이 많은 공작을 미치게 만들었다. 결국 절대 '대여 및 양도 불가'라는 결론을 내린 공작은 그림을 집무실에 다시 옮겨 놓았고 성의 없는 답장만을 써서 대주교에게 보냈다.

'오래간만에 연락해 줘서 고맙고 반갑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등 상투적인 표현이 가득한 답장을 썼고 편지 말미에 '그림은 있으나 파리의 대주교가 관심을 가질 만큼 대단한 작품은 아니니 괜히 심기만 어지럽히게 될 것'이라고 써서 보냈다. 한마디로 관심 가지지 말라고 써서 보냈다.

답장을 받은 대주교는 아카데믹한 그림들, 특히 비너스 같은 나체화에나 관심을 보일 뿐, 종교화에 큰 관심이 없었던 공작이 이런 답장을 보내왔다는 것에 더 큰 호기심이 생겼다. 바로 답장을 써서 다시 부탁할까 하다 이 고집 센 늙은 공작이 자신의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해 직접 공작의 집무실이 있는 파리 외곽의 저택으로 향했다.

다음날 오후 갑자기 들이닥친 대주교와 그 일행 때문에 공작의 저택은 난리가 났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조용하다 못해 적막했던 저택인데 갑자기 온 손님 접대에 저택에서 일하던 고용인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공작은 집무실에서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짜증이 머리끝까지 올라간 표정으로 불청객인 대주교를 쳐다보고 있었다. 대주교는 그림 앞에 기도문을 외우며 자신에게 이런 종교적 희열을 준 주께 감사 기도를 한동안 올렸다. 공작 앞에 놓인 커피가 거의 다 식어 갈 때쯤 자리에서 일어선 주교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공작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레이저 광선이 나올 것 같은 눈으로 공작을 마주했다.

공작은 커피잔을 입에 댔다가 쓰게 식어버린 커피잔을 내려놓으며 더 짜증 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 어쩐 일로 여기까지 왔나?"

구겨진 의복을 정돈하고 눈가에 맺힌 눈물까지 닦아내며 자리에 앉은 대주교는 공작의 물음에 답했다.

"주께서 저 같은 미천한 종을 여기로 부르신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런 예술품을 지금까지 잘 보관해 주셔서 프랑스 파리 교구 전체를 대표해 감사를 드립니다."

마치 맡겨 놓은 그림인 양 얘기하는 대주교의 말투에 배알이 더 꼬인 공작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제는 더 보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그림 쪽으로 돌리며 말했다.

"흥! 우리 대주교께서 언제부터 예술적 조예가 깊으셔서 여기까지 무거운 엉덩이를 움직이셨나? 이 그림을 나에게서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마시게. 아내도 없고 자식도 전쟁터에서 다 잃어버린 내게 말년에 찾아온 기쁨이야. 난 이 그림 없이는 하루도 살 수가 없으니, 내가 빨리 죽고 사라지길 바란다면 가져가게." 공작의 자세는 완강했다.

잠시 방법을 고민하던 주교는 공작에게 제안을 했다.

"그럼 이건 어떻겠습니까? 공작님 사후에 이 작품을 파리 교구에 기부하겠다고 유언장을 써 주시지요. 다시는 공작님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공작은 이내 승낙했다. 저 어릴 적부터 뻔뻔하고 막무가내였던 대주교가 이 정도 선에서 타협을 시도하는 게 오히려 의외였던 까닭이다.

공작은 자신의 무덤에 그림을 묻을 생각은 없었기에 주교의 제안에 순순히 동의했다.

"좋네. 내 그리하지. 그럼 오늘부터 집에 경호원 숫자를 늘려야겠구먼. 오래 살고 싶으니."

"허허, 공작님 농담도 원. 지금처럼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죠. 앞으로 제가 종종 찾아뵙지요. 말벗도 되어 드릴 겸 그림도 볼 겸 해서요."

대주교는 그 뒤로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많으면 매주 찾아와 공작의 집무실에서 몇 시간은 있다가 그림을 보고 공작과 얘기를 나누다가 돌아갔다.

그러길 5년, 공작은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고 유언대로 그림은 대주교에게 넘어갔다. 미셸 대주교는 그림의 존재를 철저히 숨겼고, 그리고 이건 후임 대주교들도 마찬가지였다.

미셸 대주교 이후 부임한 대주교들은 처음에 그림을 보고 루브르나 바티칸으로 보낼 생각이었지만 이 생각을 바꾸게 되는 데는 불과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마치 성녀를 직접 만난 것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림은 파리 교구의 성당 깊숙한 곳, 사람이 발길이 잘 닫지 않는 곳에 보관되었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더 잊혀만 갔다.

*

수십 년이 지나고 전 유럽이 나치 집권 이후 군비 확장으로 인해 전운이 감돌고 유대인 말살정책으로 유대인들이 하나 둘 유럽의 기반을 버리고 미국으로 도피할 시기에 그림은 우연히 페기 빌바오에게 넘어갔다.

페기가 파리 성당에 있는 미스터리한 그림에 대한 소문을 들은 건 우연의 우연이 겹친 결과였다.

“왜 그런 그림이 바티칸이나 미술관이 아닌 성당에 있는 거야?”

뉴욕에 있다가 전쟁 중 그림과 화가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건너 온 페기는 친우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직 파리 성당의 그 그림에 대한 소문을 못 들어본 모양이군. 역대 파리 대주교들은 자신만의 기도실이 있었고 아무도 그 기도실에 사람을 들이지 않았다고 해. 그 기도실엔 지금까지 사람들이 보지 못한 걸작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는 말이야.”

파리의 30대 화상인 마르셀은 물고 있던 시가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빨리 움직이는 게 좋을 거야. 나치가 파리에 들어올지 모른다고. 그림만 구하면 빨리 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가야 돼.”

나치의 파리 침공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페기는 상당한 금액의 기부금과 대주교의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는 조건으로 그림을 뉴욕으로 옮겨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전쟁이란 죽음과 파괴의 냄새가 파리와 유럽에 진동하지 않았다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승낙이었다.

다만 시일이 좀 촉박했던 것일까. 서두른다고 움직였지만 파리에서의 중요한 일을 마치고 미국으로 다시 건너갈 준비를 마친 후 파리의 성당을 방문했을 때는 정말 운이 없게도 성당까지 폭격이 된 후였다. 이송을 위해 준비한 그림도 그 폭격을 피해 가지 못하고 그 그림의 상부가 뜯겨져 나갔다.

페기는 나치의 파리 함락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기에 폭격 맞은 그림이라도 최대한 수습해 미국으로 향하는 배에 탔고 그 뒤에야 그림 상태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림의 프레임조차 예술작품인 이 빛의 마리아는 목 위 부분에서 윗부분 프레임까지 통째로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있었으면 부서진 파편이라도 찾아볼 텐데 그럴 여유가 없었던 탓에 페기는 망연자실하게 파손된 그림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뉴욕에 도착한 후, 프레임은 이탈리아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교구 장인을 통해 수리를 했지만 사라진 얼굴 부분은 수습이 되지가 않았다. 페기 주위의 화가들이 이 그림을 복원해 보려 한동안 시도를 해봤지만 페기가 파리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마성의 작품이라는 불리게 만들었던 매력은 작품에서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남아있는 그림으로만 봐도 굉장한 작품이라는 것을 짐작은 할 수 있었지만 복구가 불가능했다. 페기는 그 그림의 원래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파리의 주교들은 생사가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빛의 마리아의 상단 뒷면, 앙리가 지은 이름을 적어둔 부분은 폭격에 파괴되었고 아무도 그림의 원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없었기에 얼굴 없는 여신상으로 불리게 되었다. 별칭이었던 얼굴 없는 (Faceless)이 실제 이름처럼 불리게 되었다.

페기가 Faceless를 복구하려고 한 이유는 파괴된 그림을 완성시켜보고자 하는 욕심도 있었지만 밤마다 페기를 괴롭힌 꿈이 더 컸다. 그는 그림을 본 날 이후 밤마다 얼굴 없는 여자가 나와 자신에게 얼굴을 그려 달라는 꿈을 여러 번 꿨다. 하지만 자신의 계속된 노력에도 복구는 지난한 일이 되어버렸고 얼굴 없는 여자에 대한 기억만 더 또렷해질 뿐이었다. 이에 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 전전 긍긍하던 그는 그림을 밀봉하기로 하고 나무틀에 넣어 밀랍으로 봉인까지 한 후 수장고 깊은 곳에 넣어버렸다. 밀봉한 후에는 꿈을 꾸지 않게 되자, 그림은 페기의 격한 무관심 속에 미술관 창고에 한참을 잠들게 된다.

이 작품이 다시 대중에 공개되게 된 건 1980년대 초 페기가 세운 빌바오 미술관에 새로 부임한 미술관장 브라이언 때문이었다. 그는 미술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이 그림을 우연히 찾아 개봉한 후 비록 얼굴 부위는 없지만, 그 외 다른 부분에서 느껴지는 그림의 힘에 전율했다. 마치 자신의 얼굴을 찾아달라고 하는 듯한 호소에 브라이언은 그림의 공개를 결정하고 그림을 그려줄 화가를 찾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림이 묵은 먼지를 털어내고 추가 보수 작업을 마친 후에 뉴욕에 다시 공개가 되었을 때 뉴욕 예술계가 놀라움에 빠졌다. 그리고 곧 이 그림이 얼굴만 제대로 있다면 루브르의 '모나리자'나 오스트리아 벨베데레 궁전의 '키스'나 암스테르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에 버금가는, 도시를 대표할 수 있을 만한 명작이 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정말로 많은 작가가 그 그림의 완성을 위해 도전했고 대부분 처참하게 실패했다. 비슷하게 따라 그릴 수는 있을지언정 완성한 그림을 보면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남아있는 원본은 얼굴이 사라졌지만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것에 반해 새로 그려진 부위는 그 힘이 부족했다. 마치 몸은 전쟁터를 수십 년 구른 역전의 용사 같았지만, 얼굴은 갓 입대한 신병 같았다. 아무리 봐도 겉모습은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을지언정 그림에 담긴 정신까지 표현하는 데에는 무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새로 제작된 얼굴이 그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견이 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되자 어느샌가 기존에 복원된 그림은 치워졌고 파손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전시가 되었다.

Faceless를 더 유명하게 한 것은 그림에서 나오는 그 강력한 존재감 뿐만이 아니었다. 그림을 공개한 이후로도 잊히지 않고 이어지는 얼굴 없는 귀신에 대한 소문도 그림에 대한 인기를 식을 줄 모르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페기 때부터 나타났다는 유령은 심약한 사람들이 봤다면 놀라 나자빠질 만했지만, 사람들이 보통 아는 악몽과는 다르게 매우 점잖았다. 또한 유령은 아무에게나 나타나지도 않았고 미술관에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복원을 할 정도의 재주를 가진 사람들에게만 나타난 점도 특이했다. 그 뒤 자신이 복원할 정도의 재주가 있는지 호기심에 그림을 찾는 사람도 생겨날 만큼 알려졌다. 시간이 갈수록 귀신에 대한 이야기에 살이 붙어서 이제는 이집트의 투탕카멘왕의 저주만큼이나 유명해졌다.

그림의 인기가 높을 수록 복원에 대한 의견도 높아졌지만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기에 미술관에서 내린 결정은 능동적 방관이었다. 항상 Faceless를 완성시켜줄 화가를 찾는다고 공고했지만 적극적으로 알리지도 않았다. 덕분에 누가 도전을 하든지 간에 Faceless의 복원이 독이든 성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 되어버렸다.

Faceless가 뉴욕에서 공개된 날 한국에 있는 한 아이도 긴 잠에서 깨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태호. 지난 2년간 눈을 뜨고 있어도 잠을 자고 있는 듯 눈동자에 반응이 없어 부모의 애간장을 녹여버린 아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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