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리아 탄생
19세기 화가가 21세기에 성공하는 방법
방안은 온통 우울한 잿빛이었다. 공기는 탁했고 죽어가는 기운으로 가득했다. 한 줌 안되는 달빛이라도 들어오면 좋으련만, 방에 하나 있는 두 뼘을 넘을까 말까 한 창문으로는 아무런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기라고는 전혀 없는,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한, 이 방에서는 한 남자가 삶의 마지막 불꽃을 태우고 있었다.
앙리 보나 (Henry Bona)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붓은 차분하게 때로는 거칠게 캔버스에 색의 층을 쌓아 올리고 있었다.
폭풍 한가운데 한 여인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광폭한 바람에 옷자락은 거칠게 휘날리고 있었지만 긴 머리카락은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인자한 얼굴로 구원을 내리는 듯이 두 팔을 내밀었다.
자신의 손을 잡으라고 달싹이는 입술은 구원의 메세지를 전달 할 것 같았다.
*
"콜록, 컥"
폐 끝에서 끓어오르는 기침에 그는 급히 손에 있던 손수건으로 입을 가렸다. 이미 손수건은 각혈 자국과 피 가래로 얼룩져 있었고 그의 옷 앞섬도 손수건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피 가래가 그림에 튈 수 있어 조심해야 했다. 힘들게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은 보람은 있어, 그의 앞 벽에는 놓인 캔버스에 더러운 피 가래가 튀지 않았다.
어제도 기침을 하다 엉뚱한 곳에 붓이 튀는 되는 바람에 한참 동안 덧칠을 했었다.
게다가 그림을 그리는데 방해하는 것은 단지 기침과 피 가래뿐만이 아니었다.
"쾅쾅쾅"
"앙리! 밀린 방세는 언제 낼 거야! 이 엄동설한에 쫓겨나면 얼어 죽을 수 있어!"
집 관리인 다미앙이 문이 부서져라 두드리며 소리쳤다. 몇 달 전 앙리의 한쪽 눈이 백내장으로 허옇게 뜬 걸 본 뒤로 한동안 찾지 않았지만, 얼마 전부터는 다시 앙리의 집을 찾아오고 있다.
앙리의 집은, 비록 빈민가지만 파리에 위치했기에, 월세가 파리 기준으로 오 일 치 일당은 되었고, 앙리는 이미 석 달 전부터 이마저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앙리는 걱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이 방 값을 대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딸깍"
다미앙은 가지고 있는 열쇠를 이용해 방안으로 들어왔다.
지난달에도 방을 점검한다며 다짜고짜 들어왔었다.
다미앙은 방안으로 들어와 앙리를 흘깃 곁눈질해 보더니 앙리가 그리고 있는 그림을 봤다. 그의 눈은 곧 탐욕으로 물들었다.
이주 전에도 그림을 바라보는 다미앙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옆에서 똑똑히 봤다. 그 뒤로 지금처럼 수시로 찾아와 그림의 상태를 확인하고 더불어 자신의 건강도 확인하고 갔다.
월세를 받는 건 진작에 포기한 것 같았고, 그리던 그림이나 완성하고 죽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아프리카의 하이에나가 상처 입은 가젤이 죽을 때까지 쫓아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하이에나를 쫓는 방법은 간단했다. 같이 병에 걸려 죽자고 하면 된다.
“콜록콜록. 헉헉. 내가 몸이 이래서 말이야. 날이 좀 풀려야 일을 하러 나갈 텐데. 콜록콜록.”
앙리는 더 크게 기침을 하며 다미앙에게 다가갔다.
다미앙은 기겁을 하며 앙리에게서 떨어졌다.
“에잉! 담에도 못 내면 정말 쫓겨날 줄 알아!”
이 더러운 방에는 단 일초라도 더 있기 싫다는 표정으로 다미앙은 서둘러 방을 떠났다.
다미앙이 문을 열어 놓는 통에 방에 겨우 남아있던 온기마저 날아가 버렸다.
앙리는 문을 얼른 닫고 다시 이젤 앞으로 왔다.
앙리는 두 달째 캔버스에 힘겹게 붓질을 하고 있다. 빛의 마리아라고 이름 지은 이 그림은 캔버스는 나무 벽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그는 이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초인적인 의지로, 병들고 제 기능을 못하는 그의 병든 몸을 움직이게 하고 있다.
그는 뒤에 놓인 침대에 누워 조용히 눈을 감으면 더 이상의 고통이 없다는 걸 잘 안다. 지금도 그를 비명 지르게 만드는, 후두엽을 송곳으로 쑤시고 있는 듯한 고통을 주는 이 몸과도 바로 작별 인사를 나눌 수 있다. 정말 잠깐이면 된다. 이미 이를 도와줄 이도 와 있었다. 바로 그의 왼쪽 머리 위에는 해골의 그림 리퍼(Grim Reaper)가 어깨에 낫을 걸치고 자신의 영혼과 병든 몸을 잇는 영혼의 끈을 끊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한동안 입에 달고 살던 압생트와 밥보다 자주 먹은 듯한 아편으로 그의 전두엽의 뉴런은 이미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변형되었고 망가졌다. 저 시퍼런 낫을 걸친 그림 리퍼의 모습도 그의 전두엽 덕분에 천연색으로 보였다.
한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에 미칠 듯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나니 더 이상 무섭지도 않았다.
그의 앞에 놓은 인생 최대의 난관이자 인생의 끝자락에서 찾아온 예술적 영감은 그를 편히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길 거부하고 있다. 미지의 힘이 그를 계속해서 지탱하고 있었다. 마치 아직 더 많은 할 일이 남아있으니 죽을 때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기운을 낼 때면 그림 리퍼는 어느 순간 사라지고 황금빛으로 빛나는 거대한 천사가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계속해서 속삭이며 자신을 유혹한다.
'나를 그려. 그러면 너의 작품에 영생을 줄게.'
이는 그림 리퍼가 편히 죽으라는 속삭임보다 더 달콤하고도 잔인한 말이었다. 그는 그림을 완성시킬 만한 체력이 없었다.
그는 떨리는 손과 폐부 깊은 곳에서 목을 찢듯 고통스럽게 올라오는 기침을 참으며 천천히 혼신을 담아 붓질을 하고 또 했다. 붓질 도중 나온 기침으로 하루에도 몇 번을 그림 수정에만 많은 시간을 쏟아야 했지만, 그의 마지막 예술혼은 계속해서 악마처럼 속삭인다.
'계속 그려. 넌 비록 이 그림을 그리고 죽겠지만, 이 그림이 너의 실패한 인생을 찬란한 보석으로 바꿔줄 수 있어. 그림을 완성하고 죽어. 넌 그전엔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어.'
석 달 전 이런 속삭임을 처음 들은 그는 죽어가는 자신의 몸을 담보로 화구와 물감 그리고 감옥 독방처럼 작은 자기 방 벽면을 채울 수 있는 꽤 큰 캔버스를 사 가지고 와 마지막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 화려한 빛으로, 신성한 빛으로, 자신을 따뜻하게 감싸주던 어머니 같은 성모를 화폭에 옮겼다. 목탄으로 거칠게 스케치를 마친 후 황금빛 노란색과 상앗빛 흰색으로 황금물결에 휘날리는 성모 머리 근처의 아우라를 그렸다. 그 후 희고 밝은 황금빛 노란색, 클림트의 노란색으로 막 하늘에서 내려온 성모를 광휘를 표현하였다. 한때 아카데미에서 인정한 최고의 화가답게 성모는 완벽한 외모와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얼굴은 몇 년 전 거리를 지다가 우연히 본 당시 파리를 뜨겁게 달구던 살롱의 마담 얼굴이 아닌, 팜프파탈적인 매력으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이혼한 아내도 아닌, 십 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의 젊을 적 모습이 미화되어 그려져 있었다.
그는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어머니의 초상화 하나 제대로 그린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옛 기억을 더듬어 그려놓은 스케치가, 다행히 팔리지 않고 남아 있어서 그걸 참고하여 그릴 수 있었다.
작품이 거의 다 완성되어 간다고 생각되던 날 아침, 앙리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 방에 조그맣게 난 창으로 들어오는 강렬한 빛이 그림속의 마리아 상을 비추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빛이 너무나도 신비롭고 아름다워 앙리는 마치 당연히 존재했어야 하는 것인 양, 그 찬란한 빛을 표현하고자 그림의 정수리 부분부터 가슴까지 흰색 덧칠을 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평생을 지켜온 미학에는 명백히 어긋나는 일이었지만 무엇에 홀린 듯이 색칠을 했다.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거부하고 색채와 질감에 관심을 두는, 인상주의라고 불리는 그 얼치기들의 그림과도 비슷했다. 앙리는 그들의 그림을 역겹다고 생각해왔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그 찬란한 빛에 온 정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이틀을 더 작업한 후 그림이 완성되었다. 성스러운 존재에 글씨를 입히는게 싫어 앞쪽에는 서명도 하지 않았다. 캔버스 뒤쪽 오른쪽 하단에 씨오 (Theo)라는 서명을 하고 캔버스 뒤편에 '삶의 마지막에 우연히 찾아온 진정한 예술혼을 담아'라는 클리셰 한 멘트를 남겼다. 자신의 걸작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것조차 싫었을까, 캔버스 뒤편 위쪽에 빛의 마리아 (Marie de la Lumière)라는 이름까지 적었다.
그림을 완성한 후 앙리는 당뇨로 이제는 몇 개 남지 않은 이빨 까지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자신의 아명인 씨오 (Theo). 파리로 유학 온 후 사용한 이름인 앙리가 너무나도 더럽고 타락했다고 생각을 했는지 씨오라는 이름이 이 작품에 훨씬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파리로 오기 전까지 씨오였던 자신은 정말 순수하고 열정적이었으니까.
두어 발 떨어져 보니 오른쪽 머리 위에 남아있던 천사는 성모로 변하여 그림에 들어간 후 사라져버려 더 이상 볼 수가 없었고, 왼쪽에 있던 리퍼는 어깨에 걸쳤던 낫 머리를 발아래 내려놓았고 드문드문 부서진 이빨을 드러내며 웃는 듯 보였다. 이제 석 달간의 기다림에 대한 보상을 받겠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
어렸을 적 라파엘로의 재림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아카데미에 입학한 앙리는 아카데미 내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이탈리아로 유학까지 갔다 온 실력파 화가였다. 졸업 후 화려하게 파리 살롱에 등장한 그는 아카데믹 미술의 차세대 주자로서 최절정의 인기를 누렸고 더불어 몰려드는 그림 주문에 불과 30살이 되기도 전에 상당한 부를 쌓았다. 그의 그림은 살롱에서 최고가에 판매되는 그림이었고 그의 그림을 설명할 때는 항상 '마스터피스'라는 수식어가 당연한 듯 사용되었다.
르네상스 이후 그려진 그림에 대한 탁월한 재해석과 디테일이 살아있는 섬세한 붓질로, 어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온 닳아빠진 주제도 그의 손길을 거친 후에는 새로운 대작으로 재탄생했다. 그의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마네킹처럼 딱딱하고 굳어있는 표정을 하고 있지도, 갑자기 하던 동작을 멈추고 서 있지도 않았다. 그림 속 말들은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고 투레질을 했으며, 로마시대 병사는 들고 있는 칼로 적의 목을 꿰뚫고 사방으로 피분수를 뿜게 만들었다. 특히 우윳빛 피부를 한 완벽한 팔등신 미인의 나체화는 비너스라는 이름으로 늙은 고위 귀족의 애첩 침실에 걸렸고 그 맡은 바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덕분에 그의 아틀리에(작업실)는 밀려드는 주문을 소화하기 위해 작업 중인 많은 조수들, 거실에 걸 그림을 주문하며 선수금을 주는 은행가의 집사, 새로 들인 어린 첩의 침실을 장식하고자 몸이 달아 납기를 재촉하는 귀족의 버틀러, 완성한 그림의 값을 깎으려고 하는 화상들로 바글거렸다. 몇 년을 그렇게 그의 아틀리에가 버글거리고 난 후 앙리는 파리에서 정말 잘나가는 화가가 되었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던가? 명성과 돈에 취해 흥청망청 젊은 시절을 낭비했고 모두가 반대한 결혼, 재앙과도 같았던 결혼생활과 그 뒤로 이어진 이혼으로 인해 그때까지 모은 재산마저 다 날려버렸다. 그러면서 손을 댄 압생트와 아편이 금전적으로는 그를 파산으로 내몰았고, 육체적으로는 온몸을 완전히 망가뜨려놨다.
그를 후원했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은 그보다 더 화려하게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해석해 주고 더 관능적인 비너스를 그려줄 수 있는 재능이 넘치는 작가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금전적으로도 극빈의 나락으로 떨어졌고, 신체적으로는 말기 결핵과 온몸에 퍼진 암으로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갑자기 온 당뇨로 이빨은 듬성 등성 빠져있고 머리카락은 건기 사막의 잡초 마냥 힘없이 남아 있었다.
*
그는 가진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죽기 직전에야 그가 평소에 무시하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빠져들게 되었다. 빛의 절묘함, 빛이 만들어낸 찰나의 순간 혹은 허상 이런 게 마치 자신의 인생인 것 같이 느껴져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자신의 젊은 날 그렸던 그림들에게는 예술혼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아 자신의 지금 모습이 자만과 교만에 대한 신의 징벌처럼 느껴졌다. 예술가라기보다는 장인에 가까웠던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