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1화
숙제 (5)
나라를 뒤흔들었던 마족 침공의 열기도 어느덧 조금씩 식어갈 무렵.
[ 세계 합동 방위대 결성…. S랭크가 한국으로 모인다. ]
[ 일부 S급 게이트, 연합군 할당 논란…. 경제권 침해인가? ]
[ 한국을 지킬 S랭크 헌터는 누구? ]
정부에선 국가 합동 방위대를 발표하였다.
[ 연합군의 핵심은 ‘천화’ ]
그것도 무려 천화 길드를 내세운 채로.
“…최근 벌어진 일로 심려를 끼쳐드린 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희 천화는 백의종군하는 마음으로 국가 방위에 최선을 다할….”
천화 길드의 대표로 카메라 앞에 선 구석일은, 정말 곧 죽을 것 같이 초연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천화 그룹과 관련하여 많이 시달린 것 같았는데….
‘살아있는 걸로도 감사해야지.’
일전에 나를 악의적으로 괴롭혔단 이유로 살해당했던 박 이사를 생각해보면, 구석일의 생존은 말 그대로 다행이라 여길만했다.
사실 임아린이 내 눈치를 보느라 그냥 살려둔 게 뻔하지만….
어쨌든 목숨을 구했으니 다행이지 않은가?
[ 모그룹에 관련되어 여러 가지 문제가 있긴 했지만, 명실상부 천화는 세계적인 길드입니다. 현 1위 길드인 세진과 뒤를 잇는 백일이 연합군 합류를 거절했다고 알려진 가운데, 정부와 천화 양측 모두에게 윈윈이 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
여기서 살짝 예상과 달랐던 건, 천화의 합류에 대한 여론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는 점.
하필 비리라는 민감한 주제가 터진 천화이기에 그다지 좋은 소리를 듣진 못하리라 생각했는데, 웬일인지 나름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냈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하니….
[ 이번에 퀸즈가 완전체로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까? 인천 침공 당시 혁혁한 공을 세웠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기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
바로 퀸즈의 소속이 천화였기 때문이다.
천화에 소속된 퀸즈가 연합군에 합류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
비록 지난 시즌엔 블랙 로즈에게 자리를 내주긴 했으나, 마족 침공 사건으로 아직 건재함을 증명했기에, 모두가 퀸즈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 속보) 퀸즈, 멤버 전원 계약 해지 진행 중. ]
그들이 원하는 대로 곱게 움직여 줄 그녀들이 아니었다.
“우리 법무팀,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야. 몇백억짜리 계약을 맡는 건데, 이 정도 조건은 당연한 거 아닌가?”
“웃기지 마. 일은 법무팀이 다 하는데, 왜 네가 중간에서 잇속을 챙겨? 헛짓거리하지 말고, 돈으로 계산해!”
천화의 연합군 합류 직후.
퀸즈는 선뜻 손을 내민 이혜리의 도움을 받아, 천화와의 계약 해지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이혜리는 퀸즈를 돕는 조건으로, 돈이 아닌 다른 걸 요구했는데….
“그렇게 남자친구를 그렇게 못 믿어서 쓰겠니? 지혁이가 유혹한다고 넘어갈 거 같아?”
무려 나를 데리고 일주일간 해외에 다녀오겠다는 조건이었다.
“도지혁을 못 믿는 게 아니라, 널 못 믿는 거야! 어쩐지, 도와준다고 나댈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쯧.”
“나도 이건 동의 못하겠어…. 단둘이 여행은 안 돼…!”
당연히 설주희는 노발대발하며 받아들일 수 없다 주장했고, 임아린도 불편한 내색을 비추며 다른 조건을 요구했는데….
“난 괜찮은 거 같은데?”
그 와중에 유일하게 홍유라만이 이혜리의 조건에 수락하였다.
“홍유라…! 이 박쥐 같은 년이…!”
“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나는 그저 지혁이를 생각했을 뿐이야. 그리고 이참에 지혁이도 푹 쉬고 오면 좋잖아?”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가 귀신같이 이득만 쟁취하는 움직임은 거의 경이로울 수준.
‘진짜 무섭네….’
그녀의 계산된 포용력에 알고도 치여버린 나는, 은근히 밀려오는 감동에 내심 혀를 내두르고 말았는데….
“넌 어떻게 생각하니?”
이혜리가 은근슬쩍 타겟을 바꿔 의중을 물어왔다.
“글쎄….”
네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모여든다.
여러 의미가 담긴 그녀들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나는, 긴 고민 끝에 적당한 타협안을 꺼내 들었다.
“솔직히 해외여행은 좀 힘들어. 혜리도, 나도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이번 건은 다른 방식으로 사례했으면 좋겠어.”
요컨대, 퀸즈 멤버들과 엮이지 않은 상태로 다시 이야기하자는 뜻이었다.
“흐음…. 뭐, 좋아. 상황이 상황이니, 받아들일게.”
다행히 눈치 빠른 이혜리는 시원스레 내 의견을 받아들였고, 법무팀은 내가 프로듀서로 일할 당시 심어둔 몇 가지 조항을 파고들며 계약 해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는 모두 끝났다.’
이제 진짜로 본격적인 준비에 나설 시간이었다.
*
얼마 후.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
여자친구들을 한꺼번에 집으로 불러 모은 나는, 미리 준비한 칠판을 꺼내놓고 회담을 시작하였다.
“…….”
불편한 기색을 팍팍 드러내며 거실에 옹기종기 모인 그녀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옷까지 예쁘게 차려입어서 그런가, 마치 미녀들만 모아둔 화보를 보는 것 같았다.
그와 별개로 표정은 썩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여기 모인 모두가 내 여자친구야. 앞으로 자주 볼 사이니까, 다들 싸우지 말고 친하게 지내줬으면 좋겠어.”
그때, 다리를 꼰 채로 지켜보던 설주희가 나지막이 물어왔다.
“…진심이야?”
“진심이야. 그래서 나는 웬만하면 너희끼리 친해졌으면 좋겠어.”
물론 내가 말하고도 살짝 어이없는 발언이었으나, 그녀들이 싸우지 않길 바라는 건 틀림없는 진심이다.
“아무튼. 내가 너희를 이렇게 한자리에 모은 건, 내가 작은 제안을 하나 하고 싶어서 그래.”
“…제안…?”
“무슨 제안이요…?”
순순히 물어오는 임아린과 방한나의 물음에 대답 대신 마커를 집어 든 나는, 새하얀 칠판 위쪽에 글자를 적어나갔다.
[ 자율 동거 로테이션 체제 ]
“동거…로테이션 체제…?”
“또 무슨 이상한 걸….”
나는 홍유라와 설주희의 볼멘소리를 뒤로하곤 그녀들의 면면을 훑어보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너희가 지금 상황에 품고 있던 불만들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고 싶단 뜻이잖아? 그래서 모두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고 해.”
내가 계획한 자율 동거 로테이션 체제는 이렇다.
그녀들은 현재 서로 불공평한 기회에 불만을 품고 있다.
누구는 더, 누구는 덜, 물리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는 개개인의 삶이 있기에 어쩔 수 없는 부분.
그래서 나는 주기적으로 로테이션을 돌려서 물리적인 시간을 부여하고자 한다.
“일주일 동안 두 명씩 이틀. 한 사람은 이틀 내내. 하루는 내 개인적인 시간이야.”
예를 들자면 방한나와 홍유라가 월요일 화요일을 맡고, 임아린과 진서원이 목요일 금요일. 혼자 남은 설주희가 주말 이틀을 차지하는 방식이다.
“어때?”
“진짜 미쳤어?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나도 이건 좀….”
곧바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설주희와 임아린.
“흐응…. 생각보다 괜찮은데?”
“도, 동거요?! 괘, 괜찮을지도….”
묘하게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홍유라와 방한나.
“…….”
그리고 아무래도 좋다는 듯 반응이 없는 진서원까지.
나는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두 사람을 설득하고자, 로테이션의 장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일단 고정적으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게 장점이야. 지금은 일이 있어야 너희랑 만나는데, 아예 같이 살아버리면 그럴 필요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건 그런데….”
“아린아. 넌 동거가 얼마나 큰 장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지?”
이중에서 동거 경험이 있는 건 유일하게 임아린 뿐.
한때 그 혜택을 톡톡히 누려왔던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 듯 금세 입을 다물어버렸다.
‘하나 설득했고.’
이제 남은 건 설주희뿐.
“난 이딴 거 필요 없어.”
그녀는 자신의 차례가 왔음을 인지한 듯, 곧장 단단히 팔짱을 꼬며 단호함을 내비쳤는데….
“같이 살면 밤마다 뭘 할지 뻔한데, 내가 그 꼴을 가만히 두고 보라고? 나는 얘네랑 기둥동서로 지낼 생각 없으니까, 당장 집어치워.”
“그럼 주희만 빠지는 거지?”
“…뭐?”
나는 보란 듯이 칠판에 적어뒀던 설주희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이러면 주말 이틀이 비네.”
“야. 도지혁!”
“어! 그러면…! 그냥 저희끼리 추가로 지내면 안 될까요…?”
“난 찬성. 오래 지낼 수 있으면 좋지.”
“네 명이니까, 한 달에 한번, 일주일에 나흘…. 괜찮은 거 같은데…?”
“…나도 좋아.”
그러자 방한나를 비롯한 홍유라, 임아린, 진서원은 주기가 짧아졌단 사실에 쌍수를 들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여왔고,
“이 망할 년들이…! 저딴 개수작에 넘어가겠다 이거야!?”
설주희는 길길이 화를 내며 다른 네 사람을 설득하려 했는데….
“그치만…. 안 하면 손해인 걸…?”
“원래 몸이 가까워야, 마음도 가까워지는 법이잖아. 다른 애랑 같이 지내는 게 좀 불편하긴 하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가 있나?”
“맞아요…! 저는 프로듀서님이랑 지낼 수 있으면 얼마든지 찬성이에요!”
“…바보.”
이미 마음을 굳힌 네 사람은 외려 설주희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어쨌든 주희는 빠지는 거지?”
“그런 거 같아…!”
“어…. 그럼 저희 조는 어떻게 짤까요?”
“…뽑기.”
“이, 이 씨발년들이…! 알았어!! 나도 하면 되잖아! 하면!”
“저기, 그냥 빠지셔도 괜찮을 거 같은데….”
“하기 싫으면, 억지로 안 해도 돼.”
“맞아…! 주희는 억지로 하는 거 싫어하잖아…!”
“…바보 돼지.”
“야아!!!”
부딪칠 땐 서로 잡아먹을 것처럼 날을 세우더니, 목표가 명확해지자 똘똘 뭉치며 무섭게 배척하는 네 사람.
나는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서 순간 미래의 편린을 엿보고 말았다.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역으로 나를 잡아먹는 모습을.
‘이게 맞나…?’
그렇게 우리는 설주희가 진심으로 화를 내며 판을 뒤엎기 직전에 극적인 합의를 이룰 수 있었고, 설주희를 포함하여 첫 번째 로테이션을 짜기 시작했다.
“솔직히 일요일은 쉬고 싶은데….”
“주말은 안 돼…! 하루 종일 붙어있을 수 있는 날이잖아…!”
“그러네. 주말은 절대 양보 못하는데?”
개인적으로 나는 일요일에 쉬기를 원했으나, 임아린과 홍유라의 강렬한 반대로 기각.
“…그럼 월요일에 쉴게.”
결국, 월요일을 휴일로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날을 나누기로 하였다.
“그래서. 뽑기는 어떻게 만들 건데? 설마 직접 만들 생각은 아니지?”
“…인터넷.”
“인터넷에 뽑기가 있어…?”
“아. 저희 팀에서 몇 번 썼었어요!”
“그거 쓰면 되겠네. 지혁아. 혹시 태블릿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어? 어어….”
그렇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뽑기를 만들고, 여자친구가 된 순서대로 뽑기를 진행한 결과….
“그, 그래도 첫 번째네….”
“…….”
화요일과 수요일을 담당할 첫 번째 조는 임아린과 진서원.
“아….”
“…흐응….”
목요일과 금요일을 차지한 두 번째 조는 방한나와 홍유라.
“흥. 멍청이들.”
그리고 대망의 첫 번째 주말을 차지한 사람은 설주희였다.
“어쨌든 다들 협조해줘서 고마워. 일단 이번 주는 얼마 안 남았으니까, 다음 주부터 시작하도록 할게.”
우여곡절 끝에 로테이션 제도를 성립해낸 나는 적당히 회담을 마무리하였고,
‘일단 첫 번째는 해결됐나?’
마왕과의 결전을 위한 두 번째 계획에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