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50화
숙제 (4)
살다 보면,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심스러워지는 순간이 있다.
마치 매끈하게 얼어버린 빙판길을 가로지르는 것처럼.
지금 내 상황이 딱 그랬다.
“…오빠. 저 돼지가, 자꾸 나 괴롭혀.”
“뭐, 돼지? 돼지이? 이 씨발…! 야. 너 당장 나와!”
돼지라는 소리에 발끈한 설주희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러자 홍유라와 임아린이 찰떡같은 어시스트를 밀어 넣으며 설주희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주희야. 아직 애잖아. 너무 화내지 마.”
“그래, 맞아…! 어린애가 뭘 알겠어…?”
“저기요! 저희 서원이 어린애 아니거든요?!”
물론 가만있을 팀 서울시청 멤버들도 아니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20살! 어린 게 아니라, 젊은 거라구요!”
“마, 맞아요! 서원이는…. 어, 엄청 강해요!”
드물게 눈을 치켜뜨곤 따박따박 대드는 방한나와 맏이로서 가만있을 수 없다는 듯 필사적으로 거드는 김나래.
시작부터 이어진 퀸즈와 팀 서울시청의 치열한 기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생각보다 너무 사이가 나쁜데….’
무기만 안 들었지, 그녀들은 당장에라도 부딪칠 것처럼 으르렁거렸다.
서로 무리가 있어서 그런가, 어째 개개인이 모였을 때보다 훨씬 더 사이가 나쁜 느낌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말이라도 잘못 꺼냈다간, 곧장 대형 사고로 이어질 게 뻔한 일.
그렇다고 언제까지 마냥 내버려둘 수도 없었기에, 적당히 싸움을 중재할만한 최선의 시나리오를 짜내야 한다.
“…오빠?”
“너네 잘난 막내님이 부르잖아. 다물고만 있지 말고, 뭐라도 좀 해보시지?”
진서원과 설주희의 부름에 맞춰 모든 시선이 내게로 모여든다.
숨이 콱 멎을 것 같은 답답함에 조용히 침을 꼴깍 삼킨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어 중재를 시도하였다.
“밥 먹는 자리잖아. 너네 자꾸 이렇게 다투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어느 쪽도 편들어주지 않고, 중립을 지키겠단 뜻이었다.
그러나….
“…뭐?”
설주희는 당연히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는지, 기분이 팍 상했다는 티를 내며 쏘아보기 시작했다.
“너, 이게 진짜 맞아? 아무리 팀이라 해도 그렇지! 어떻게 여친 앞에서 딴 여자 편을 들어?!”
“편드는 거 아냐. 내 기준으론 너네 둘 다 똑같아. 그러니까 서로 좀 이해를….”
“내가 뭘 더 이해해야 하는데!? 양다리에 세 다리까지 봐줬는데, 여기서 또 이해를 하라고? 진짜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 가둬놔야 정신을…!”
“…세 다리요?”
그때, 구석에서 조용히 빵을 뜯어 먹던 한규리가 본의 아니게 설주희의 말을 가로막았다.
스윽─
그러자 자연스레 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려버렸고, 한규리는 갑작스레 쏟아지는 관심에 아차 하며 다급히 시선을 내리깔았는데….
“어머. 몰랐어요?”
설주희가 잘 걸렸다는 듯 시커먼 미소를 짓더니, 한규리와 김준형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도지혁, 얘. 저랑 사귀면서 유라랑 아린이도 만나고 있어요. 그것도 동시에.”
“지, 진짜요…? 세상에….”
“우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며 서울시청 멤버들의 눈치를 살피는 한규리와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시선을 보내오는 김준형.
“…사정이 있었어. 나중에 이야기해줄게.”
나는 적당히 얼버무릴 요량으로 슬쩍 눈치를 주었는데….
‘…어, 잠깐. 세다리…?’
일순간 묘하게 맞물리지 않는 설주희의 설명에 뭔가 이상함을 깨닫고 말았다.
방한나와 진서원을 포함하면 ‘다섯 다리’라고 표현해야 맞는데, 설주희는 분명 ‘세 다리’라고 말했다.
설마 두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단 의미에서 제외했을 리는 없고….
‘아니, 진짜 잊어버린 거야…?’
아무래도 정신없는 틈에 밀어붙인 여파로, 진서원과 방한나에 대한 내용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좆됐다.’
뒤늦게 위기를 감지한 나는 애써 차분한 모습으로 황급히 분위기를 수습하려고 했다.
괜히 불똥이 잘못 튀었다간, 잠자코 있던 방한나와 진서원도 터져버릴지 모르기에.
“아무튼 곧 음식 나올 테니까, 얌전히 먹자. 혜리가 기껏 초대….”
바로 그때.
“…세 다리, 아닌데?”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진서원의 목소리.
순간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가로지르며 설주희가 되물었다.
“뭐?”
“…세 다리. 아니라고.”
결국,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건 무리였다.
“너. 그게 무슨 소리야? 세 다리가 아니라니?”
“…나도 오빠랑 사귀니까.”
“…무슨 개소리를…! 야, 도지혁! 너 저딴 개소리를 지금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야!?”
“…서원이 말이 맞아. 나, 서원이랑도 사귀고 있어.”
“……뭐?”
누군가 깜짝 놀란 듯, 숨을 짧게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마음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고갤 들어 설주희를 바라보았다.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서원이랑 한나도 사귀고 있다고.”
“뭐, 뭐? 언제 그딴 개소리를…. ……어?”
그녀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멍한 표정을 지어왔고,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관계자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담담히 쐐기를 박았다.
“그때 네가 괜찮다고 대답했어.”
내가 쓰레기라는 걸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그, 그럼….”
겨우 상황을 파악하고 방한나와 진서원을 바라보던 설주희는 급히 시선을 옮겨 홍유라와 임아린을 바라보았다.
“너네…. 알고…있었어…?”
“어쩌다 보니.”
“응.”
자연스레 설주희만 모르고 있었단 사실이 들통 나고 말았다.
“…하….”
우두커니 서 있던 설주희는 믿기지 않는단 표정으로 조용히 가방을 챙기더니….
“…….”
입을 꾹 다문 채로 나를 죽일 듯이 쏘아보곤 밖으로 휙 나가버렸다.
“설주희!”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나는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실례…앗.”
그리고는 때마침 음식을 내오던 종업원을 지나치며 설주희를 따라나섰는데….
“아. 여기 놔주세요.”
객실을 지키던 홍유라는 어수선한 분위기를 자연스레 수습하며 음식을 받아냈다.
“다들 놀라셨겠지만…. 별로 큰일 아니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지,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엄청 화난 거 같은데….”
“어, 어떡하죠…?”
물론 제3자인 한규리와 김준형, 김나래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연애하다 보면 싸우기도 하잖아요. 뭐, 비슷한 거니까, 편하게 식사들 하세요.”
“이거 지혁이가 좋아하는 건데…. 좀 남겨놓을까…?”
“서원아. 그릇 주면 내가 퍼줄게.”
“…그럼, 난 저거.”
정작 논란의 중심에 선 도지혁의 여자친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게 식사를 시작하였다.
말 그대로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
“주희야.”
성큼성큼 쫓아가 그녀를 가로막아본다.
“이야기 좀 해.”
그러자 그녀가 우뚝 걸음을 멈춘곤 나를 죽일 듯이 쏘아보다 휙 비켜나갔다.
아무래도 대화조차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주희야…!”
그렇게 다급히 손목을 붙잡으며 강제로 걸음을 멈춰버린 찰나.
설주희가 싸늘한 눈빛과 함께 나지막이 경고를 보내왔다.
“이거 놔.”
“이야기 좀 하자니까?”
“안 놔?”
“대화를 해야 풀 거 아냐.”
“더러운 걸레 새끼하고 할 말 없으니까, 저리 꺼져.”
예전엔 그저 억울하기만 했던 폭언이었지만, 이번엔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내가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서. 내가 싫어?”
“…뭐?”
“여자친구 다섯이나 둔 걸레라서 싫어졌냐고.”
“미친 새끼….”
폭언을 내뱉는 와중에도 절대 싫단 말은 입에 담지 않는 그녀.
“주희야…. 전에 말했지만, 나도 진짜 어쩔 수가 없었어.”
“그게 말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마음을 다 받아줘? 네가 무슨 자원봉사자야?”
“그런 거 아니야.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받아 준 거고. 내가 진짜 아무나 받아줬겠어?”
“뭐…?”
“나는 마왕을 막아야 해. 그러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고. 나한텐 걔네 도움이 절실해.”
“…퀸즈로 부족하다 이거야?”
그녀가 몹시 섭섭하단 눈빛을 보내온다.
한 마디 폭언보다, 그녀의 약한 모습이 나를 더 세차게 흔들었다.
“부족한 게 아니라, 널 도울 사람이 필요했던 거야.”
“…그게 무슨….”
“마왕은 분명 강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진 아무도 몰라. 그래서 최선의 최선을 준비해도 분명 모자란 거고. …난 네가 다치는 꼴은 보기 싫어.”
“…….”
아직도 원작 속 설주희가 홀로 남은 세상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이 눈앞에 선명하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결말만큼은 바꾸고 싶었다.
“네가 날 어떻게 생각해도 좋아.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쓰레기 새끼로 보든, 함부로 뒹굴고 다니는 정신 나간 걸레로 보든, 정말 아무래도 좋아. 하지만…. 널 위하는 마음은 진심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
“…내가 또 그딴 말에 속을 거 같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설주희는 이미 반쯤 넘어와 있었다.
독기가 빠진 채로 일렁이는 그녀의 눈빛이 그를 증명했다.
“속아줘. 그만큼 내가 더 잘할게.”
“…어떻게 잘할 건데? 내가 정조대 차고 다니라 하면 차고 다닐 거야?”
“…저, 정조대…?”
“머뭇거리지?”
갑자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정강이를 덮쳐오는 묵직한 통증.
“아, 아윽…!”
구둣발에 채인 나는 정강이를 붙잡으며 고통을 호소했는데….
콱─!
순간 그녀가 내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움켜쥐더니, 강제로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마주치곤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해왔다.
“잊지 마. 넌 내 남자야. 네가 어디서 어떤 년을 꼬시고 다니든, 좆 걸레처럼 함부로 몸을 대주고 다니든,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내 거라고. 무조건 내가 첫 번째고, 죽을 때도 나만 생각해야 해. 알아들어?”
구구절절 하나같이 못마땅한 말밖에 없었지만, 여기서 부정했다간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았다.
“…….”
결국,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한 나는 겨우겨우 풀려날 수 있었고,
“따라와.”
“…어?”
“이혜리, 그 씨발년이 사준 밥 먹기 싫으니까, 따라오라고.”
“아니, 나 안에 짐 두고 왔는….”
“뭐?”
“…아냐. 가자….”
설주희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얌전히 따라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