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49화 (149/165)

제 149화

숙제 (3)

성공적으로 임아린을 포섭한 이후.

“아린아. 그냥 다시 누워있어.”

“…싫어어….”

뒤에 도착한 간호인에게 부탁하여 수액을 떼어낸 임아린은, 여태 부족했던 걸 채우겠다는 듯이 내 품에 안겨왔다.

마치 부모에게 달라붙은 새끼 코알라 느낌.

솔직히 오랜만에 느껴보는 그녀의 온기가 썩 나쁘지는 않았지만, 너무 응석을 받아 주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스윽─ 스윽─

그렇게 들러붙은 임아린을 버릇처럼 쓰다듬으며 서로 은근한 감정을 주고받길 얼마나 지났을까.

“저어…. 지혁아….”

“응?”

찰싹 달라붙어 있던 그녀가 넌지시 말을 꺼내왔다.

“나. 요즘, 자꾸 이상한 꿈을 꿔….”

“이상한 꿈?”

나는 그녀의 말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다.

최근 몸이 안 좋았으니, 그저 악몽 같은 걸 꿨으리라 생각했기에.

그런데….

“네가…. 마왕이랑 싸우는 꿈이었어….”

“……마왕?”

그녀는 전혀 생각지 못한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마왕이 너무 강해가지고…. 유라랑 난 아무것도 못 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는데…. 그게 너무 슬퍼서….”

‘내가 마왕이랑 싸우는 꿈이라고…?’

너무 뜬금없는 이야기라 살짝 당황스럽긴 했으나, 마왕의 존재가 비밀스러운 것도 아니고, 상상의 영역으로 충분히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기에, 솔직히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

“그 여자가…. 너를 막 남편으로 삼겠다고….”

임아린의 입에서 뜻밖에 정보가 튀어나오기 전까진 말이다.

“여자?”

“응…. 마왕이 여자였는데…. 아. 사천왕이라는 마족들도 다 여자였어.”

“……뭐?”

원작 소설 ‘최강 고수’에 묘사된 마왕은 마족 여성.

더불어 마왕을 추종하는 사천왕들도 모두 여성이다.

‘마왕이 꿈에 나왔다고…?’

여러 진술에 의해, 지금껏 나타난 사천왕들이 여성이라는 건 이미 공표된 정보다.

하지만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사천왕들과 마왕이 여성이라는 건 알리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임아린이 알았단 말인가?

“걔네가 막….”

“저, 아린아. 갑자기 말 끊어서 미안한데, 조금 더 자세히 좀 이야기해줄래? 그러니까…, 마왕이 나랑 싸우고 있었다고?”

“응….”

뭔가 범상치 않다는 걸 감지한 나는 임아린을 붙잡고 꿈에 관한 내용을 자세히 물어보았다.

그리고….

정말 놀라운 정보들을 캐낼 수 있었다.

“사람들이 너를 막 황제?라는 별명으로 부르고…. 파워 랭킹 1등에….”

“설주희는 임신했다는 이유로 전투에 없었어…! …나쁜 계집애.”

“나랑 유라는 지금보다 약했나…? 우리 둘 다 파워 랭킹 10위 밖이었고, 주희만 10위 안에….”

파워 랭킹 1등으로 황제라 불리던 나.

그리고 임신해버린 탓에 결전에서 빠져버린 설주희.

거기에 지금보다 훨씬 약했던 홍유라와 임아린까지.

‘이건…!’

분명 이따금 나타나던 ‘예지몽’과 같은 내용이었다.

“아린아. 조금 더 기억나는 건 없어? 뭐, 언제 싸움이 일어났다던가….”

“…그게에…. 기억이 잘 안 나서….”

“차분히 잘 생각해봐. 약간 걸리는 게 있어서 그래.”

“으음….”

그녀는 골똘히 생각에 빠진 듯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

그리곤 이내 무언갈 떠올렸는지, 눈을 번뜩이며 새로운 정보를 꺼내왔다.

“마왕이 나타났던 데가…. 동해 쪽이었던 거 같아…!”

‘동해!’

원작의 마왕은 침공당해 밀려버린 인천을 기반으로 점점 영향력을 넓혀갔다.

하지만 이번엔 원작과 달리 서해 침공에 실패하였고, 그 덕분에 마왕의 다음 계획을 확신하기가 어려웠는데, 최후 공격지가 동해라는 걸 알아냈으니 앞으로 대비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동해라…. 다른 건 기억 안 나고?”

“응…. 당장 기억나는 게 이거뿐이라…. 미안….”

“아냐, 이미 충분해. 알려줘서 고마워.”

“…근데…. 그게 왜 필요해…?”

임아린은 마치 속내를 들여다보려는 것처럼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다.

모든 걸 밝힐 순 없지만, 앞으로 계속 도움을 받으려면 어느 정도 정보를 풀어놓는 쪽이 나으리라.

“사실…. 나도, 전부터 비슷한 꿈을 꿔왔거든.”

“지, 진짜…?”

“응. 내가 엄청 강한 헌터가 돼서, 마왕이랑 싸우는 꿈이었어.”

그런데 무슨 일인지, 예지몽에 대해 밝히자 그녀가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을 띠기 시작했는데….

‘기분 탓인가…?’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조금 놀랐어 ‘황제’라는 별명도 그렇고, 설주희랑 결혼했다는 것도 그렇고…. 여태 꿈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실제로 다 일어났거든. 그래서 괜히 캐물어 본 거야.”

“…이, 이뤄졌다고…? 꿈이 실제로…?”

“정확히는 ‘이럴 수도 있다’고 알려 주는 느낌이었어. 내가 다리를 안 다쳤으면, 언젠가 황제라고 불리지 않았을까? 하는 느낌으로.”

일순간 내 다리를 흘끔 쳐다본 임아린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그렇게 안 돼서…. 싫었어…?”

“…글쎄…. 그건 그거대로 나쁘진 않았을 거 같은데, 별로 아쉽진 않아. 난 지금이 엄청 만족스럽거든.”

“…저, 정말로…?”

“정말로.”

솔직히 말한다면 아쉬운 게 사실이다.

그토록 바라던 진짜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기회였으니까.

하지만 만약 내가 진짜로 주인공이 됐다면, 아마 지금과는 많이 다른 상황이 펼쳐져 있었을 것이다.

내 프로듀싱을 받지 못한 퀸즈는 지금보다 훨씬 약했을 테고, 언니를 잃은 진서원도 원작 속 천마처럼 사이코패스 살인귀가 됐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임아린이 내 다리를 부순 게 행운이지 않을까?

*

얼마 후.

[ 프로듀서님! 정부에서 연락이 왔어요! ]

한규리로부터 급한 연락이 왔다.

“정부에서요? 갑자기 뭐래요?”

[ 저희 팀에 표창하고 싶다고, 참석해달라는데요? ]

뭔가 했더니, 최근 정부에서 침공을 막은 공로자들에게 상장을 뿌리고 있는데, 대표로 나와서 사진 좀 같이 찍어달란 이야기였다.

‘받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이러나저러나 추후 활동을 위해선 인지도를 높이는 게 무조건 이득.

뉴스에도 내보낼 계획이라고 하니, 아마 참여하여 나쁠 건 없으리라.

“참여해도 괜찮겠네요. 애들도 같이 시상하는 거죠?”

[ 네! 프로듀서님이랑, 멤버들까지요. ]

일정을 받아들이기로 한 나는, 달력을 확인하며 일정에 관해 말을 꺼냈다.

“그럼, 참여하는 걸로 하고. 일정 좀 자세히….”

그런데 그때.

[ 아, 참! ]

한규리가 깜빡했다는 듯 이야기를 꺼내왔다.

[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이번에 그분들도 오신다고 그랬거든요. ]

“…누구요?”

[ 퀸즈요! ]

무려 퀸즈와 함께한다는 이야기를.

“……네?”

그렇게 다시 며칠이 흘러, 훌쩍 다가온 상장 수여식.

“우와…. 프로듀서님…! 저, 청와대에 들어오는 건 처음이에요…!”

“나도 처음 와봐.”

나는 아침 일찍 예약한 샵을 들러 팀원들과 메이크업을 받고 수여식이 진행될 청와대로 향했다.

“이야…. 여기 공무원들은 돈 많이 받을까요?”

“아마 그렇겠죠? 준형 씨는 청와대에서 일하기 VS 서울시청에서 일하기. 어느 쪽이세요?”

“팀이요?”

“아뇨. 그냥 서울시청이요.”

“그럼 무조건 청와대죠.”

스탭으로 참석한 김준형과 한규리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나갔고.

“우와…. 여기 생각했던 것보다 엄청 크다…! 서원이 너는 예전에 와봤다고 했지?”

“…응. 학교에서.”

김나래와 진서원이 그 뒤를 쪼르르 따르는 사이, 방한나와 나는 맨 뒤에서 걷고 있었다.

“사실 어젯밤에 부모님한테 미리 말씀드렸거든요…!”

“진짜? 엄청 좋아하셨겠네.”

“네…! 도장 건물에 현수막까지 달겠다는 걸 겨우 말렸는데, 조금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좋은데, 왜? 얼굴도 이따만하게 박아서, 예쁜 딸 자랑도 하시고.”

“아, 안 돼요…! 진짜 부끄러워서 죽을지 몰라요…!”

그렇게 카메라와 기자들이 우글거리는 영빈관으로 들어서던 그때.

“자기야!”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어디선가 낭랑한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이 목소리는….’

익숙하다 못해, 꿈에서도 나타나는 그녀의 목소리.

설주희였다.

“퀸즈다…! 야야. 빨리 카메라 켜!”

“어어? 저건…. 임아린 아냐?”

“진짜 임아린도 있네?”

이번 수여식엔 오랜만에 완전한 퀸즈가 참여한다.

블랙 로즈와의 승부 이후 사실상 첫 활동.

단신으로 인천을 구해낸 임아린의 첫 번째 활동이기도 하다.

“어! 뭐야. 카메라에 나온다고 화장도 한 거야? 귀엽네.”

쪼르르 달려온 설주희는 주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히 내게 말을 걸어왔다.

“…사람들 있잖아. 적당히 해.”

“왜? 뭐가 어때서. 아. 내가 준 반지 제대로 끼고 왔어? 어디 봐봐.”

나는 옆에 있던 방한나와 주변 시선을 의식하며 그녀를 저지하려고 했는데….

“안 끼고 왔지. 그걸 어떻….”

“뭐야!?”

“야. 제발…, 목소리 좀….”

설주희가 빽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주의만 더 끌려버렸고,

“일찍 왔네? 머리 잘 됐다.”

“지혁아…! 오늘 너무 예쁘다…!”

뒤이어 따라붙은 홍유라와 임아린까지 가세하여, 말 그대로 모든 관심을 한몸에 흡수하고 말았다.

‘안 되겠다.’

이대로 더 이상 퀸즈와 함께 있다간 거대한 스캔들로 이어질지 모른다는 걸 직감한 나는, 적당히 인사만 건네곤 어색하게 서 있던 방한나를 챙겨 황급히 행사장으로 도망쳐버렸다.

“괜찮으세요…?”

“…아니. 스트레스로 죽어버릴 거 같아.”

“죄송해요…. 제가 잘 대처했어야 했는데….”

“아냐. 그냥 가만히 있어줘서 진짜 고마워.”

“아…. 넵….”

그렇게 행사장에 모인 퀸즈와 팀 서울시청.

다행히 그새 이야기가 된 건지, 행사장 내부에선 별다른 문제가 터지지 않았다.

“그럼, 수여식을 진행하겠습니다.”

우리는 시간에 맞춰 나타난 대통령에게 상장을 수여 받았다.

정부에서 세운다는 대응팀도 그렇고, 내심 정치적인 이유가 조금도 섞이지 않았으리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만큼 위상을 드높일 기회였기에, 적당히 만족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당연한 걸 했을 뿐입니다. 실제로 가장 큰 역할을 하신 건, 현장에 나와 싸워주신 헌터 여러분이죠.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이어진 인터뷰도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큼직한 방송사들은 물론이고 해외 유명 언론들까지 참여하였으니, 결과적으로 수여식에 참여한 게 매우 옳은 선택이었다.

그런데….

‘미치겠네….’

이렇게 좋은 기회를 거머쥐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영 웃을 수가 없었다.

“야. 너 뭔데 자꾸 내 남자한테 들러붙어?”

“…나?”

“그럼 누구겠어? 왜 자꾸 내 앞에서 그 껌딱지 같은 가슴 들이대냐고!”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우리는 이혜리의 초대를 받아, 어느 고급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어쨌든 식사 자리기도 하고, 퀸즈 멤버 셋과 서울시청 팀원들도 섞여 있어서 어찌어찌 곱게 넘어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오빠. 나, 껌딱지야?”

“그걸 왜 걔한테 물어? 이 씨발년이 보자 보자 하니까…!”

진서원의 도발 아닌 도발에 설주희가 걸려들고 말았다.

“주희야. 목소리가 커.”

“응…! 욕하는 건 좋은데, 목소리 좀 줄여줘…!”

“잠시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지금 저희 서원이가 욕먹어도 괜찮다 이거예요?”

“마, 맞아요…! 너무하세요…!”

자연스레 설주희를 말리는 척 거드는 홍유라와 임아린.

그리고 막내인 진서원을 지키는 방한나와 김나래까지.

“저, 체할 거 같아요….”

“준형 씨. 저는 이미 얹혔어요….”

그야말로 개판이 벌어지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