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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48화 (148/165)

제 148화

숙제 (2)

[ 뭐해? ]

임아린은 휴대폰에 떠오른 한통의 메시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대체 얼마 만에 받아보는 도지혁의 연락인가.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감각에 사로잡힌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곤 재빨리 답장을 고민해보았다.

‘뭐라고 보내지…?’

안부를 묻거나, 인사를 하거나, 그밖에 따로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다짜고짜 장문의 메시지를 보내는 건 안 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 집에서 쉬고 있어…! 무슨 일이야…? ]

애써 벅차오르는 감정을 겨우 추스르며 답장을 적어낸 그녀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붙들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

그런데 도지혁도 답장을 기다리고 있었는지 곧바로 상대가 확인했단 표식이 떠올랐고, 뒤이어 새로운 메시지가 돌아왔다.

[ 내일 낮에 시간 괜찮아? ]

[ 잠깐 얼굴 좀 보려고 하는데. ]

무려 만남을 제안하는 내용이었다.

‘지, 지, 지혁이가…. 나를…!’

그토록 고대하던 재회를 코앞에 둔 임아린은 안절부절못하며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치, 침착하자…. 침착…!’

메말라 있던 가슴에 생기가 돌아오고, 호흡이 점점 가빠온다.

한시라도 빨리 답장을 보내서 대화를 이어나가야 했으나, 막상 도지혁의 만남을 상상하니 몸이 멋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 ㅇ으응! 괜찮ㅎ아! ]

결국, 파르르 떨어대던 손가락은 오타 가득한 메시지를 전송하고 말았고,

[ 알았어. 그럼 내일 도착하기 전에 연락 줄게. ]

[ 푹 쉬어. ]

도지혁은 만남을 기약하며 메시지를 끝내 버렸다.

“…아….”

안타까운 마음에 탄식이 절로 흘러나온다.

그렇게 멍하니 휴대폰을 붙잡고 한참을 앉아있던 임아린은, 도지혁이 보내온 메시지를 몇 번이고 재확인해보았다.

그리고….

“…헤, 헤헷….”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웃음을 흘리며 좋아하기 시작했다.

“히히…히힛….”

이렇게 웃어보는 게 대체 얼마 만일까.

물론 고작 만남이 정해졌을 뿐이었지만….

지금 임아린에겐 그마저도 너무나 과분하게 느껴졌다.

*

늦은 점심.

‘이게 맞나.’

임아린의 집에 차를 댄 나는 휴대폰을 매만지며 짧은 고민에 빠져있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내 선택이 과연 옳은지 의문을 느끼고 있던 것이다.

“하아….”

솔직히 충동적으로 저지른 감이 없잖아 있지만, 임아린을 만나는 것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그녀도 내 계획에 포함된 인물이다.

기껏 10년을 키워왔는데,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려 계획을 망칠 순 없지 않은가?

이러나저러나 임아린을 받아들여야 할 명분이 있단 소리다.

문제는….

정작 내가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는 것.

임아린만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하다.

마치 아픈 손가락을 보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후우…. 해보자.”

끝끝내 마음을 겨우 다잡으며 휴대폰을 켠 나는, 임아린에게 도착했단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곧이어 들어와도 괜찮다는 답장이 돌아왔고, 오는 길에 구매한 문병 선물을 챙겨 집으로 향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다시금 각오를 다지며 현관에 다다른 나는 무심코 도어락을 향해 손을 뻗다가.

“아.”

뒤늦게 아차 하며 초인종을 눌렀다.

삐이이익─

짧은 벨소리와 함께 기다렸다는 듯 금세 불이 들어오는 인터폰.

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큼큼 목을 가다듬곤 애써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문 열어줘.”

그러자 인터폰 너머로 오랜만에 들어보는 임아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 비, 비밀번호 그대로야…. ]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라는 뉘앙스로 대답해왔다.

‘…그래…. 어쨌든 아픈 애니까….’

그렇게 기억 속의 초췌했던 임아린을 떠올리며 직접 들어가겠단 의사를 밝힌 나는, 아직도 익숙한 동작으로 비밀번호를 눌러 집안으로 들어섰다.

“…….”

조용히 나를 맞이하는 익숙한 현관.

퇴근한 뒤에 신발을 벗고 있으면, 임아린이 쪼르르 달려와 짐을 받아주던 그 현관이었다.

스윽─ 스윽─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으며 신발을 벗어낸 나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놓인 내 전용 슬리퍼를 신고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섰다.

“…….”

간병인에 의하면 임아린은 안방에 있다고 한다.

눈에 익은 부엌에 적당히 문병 선물을 내려 두곤,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집안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향한다.

그리고 굳게 닫힌 안방의 문고리로 손을 뻗던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조용히 손을 옮겨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그러자 안쪽에서 힘없는 목소리가 조그맣게 들려왔고,

“드, 들어와아….”

나는 짧은 심호흡을 내쉬며 안방으로 들어섰다.

“…와, 왔어…?”

낯선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조심스레 인사를 건네오는 임아린.

그녀의 가녀린 팔에 주렁주렁 달린 수액들과 환자용 침대가, 이 집안에서 유일하게 낯선 물건이었다.

‘…아직 많이 안 좋은가?’

묘하게 윤기가 흐르는 은빛 머리카락과 반대로 살짝 초췌함이 느껴지는 사랑스러운 얼굴.

거기에 내가 선물한 잠옷과 인형을 껴안은 그녀의 모습은,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로 안타까워 보였다.

“…오랜만이야.”

“으, 으응…! 오, 오랜만이야….”

임아린은 후들후들 떨리는 팔로 침대를 짚으며 상체를 일으켜왔는데, 그 모습이 너무 불안해 보여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안 일어나도 괜찮으니까, 누워있어.”

“…아, 아니야…! 괘, 괜찮…아윽….”

순간 한쪽 팔에 힘이 풀린 듯, 비틀거리는 그녀.

“괜찮아?”

“으응…. 괘, 괜찮아….”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주며 똑바로 앉는 걸 도와주었는데….

‘…많이 좋아진 거 같은데….’

멀쩡할 때와 비슷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다는 것까지 확인한 나는, 아직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으리라 믿으며 말을 꺼내보았다.

“…몸은 좀 어때? 어제 진료받는 날이었잖아.”

“아, 알고 있었어…?”

“…내가 붙였는데, 당연히 알지. …연락은 따로 안 해서 자세한 내용은 몰라. 의사가 뭐래?

“거, 거의 다 나았다고 그러시던데….”

은근슬쩍 눈길을 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임아린.

거짓말을 할 때마다 튀어나오는 일종의 버릇이었다.

“너…. 진짜 다 나은 거 맞아? 내가 전화해서 물어봐?”

“지, 진짜야…! 무, 물론 조금 더 쉬어야 한다고 말씀하시긴 했는데에….”

어쩜 이렇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는 건 그대로일까.

그렇게 악독한 짓을 저지르고도, 이런 면을 보인다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아린아.”

“…으, 응…?”

임아린이 눈치를 살피듯 조심스레 눈을 마주쳐온다.

하루 종일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던 그녀의 눈동자엔 명백한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마음을 콕콕 쑤셔대는, 마치 버려진 강아지 같은 불쌍한 눈빛이었다.

“왜 그랬어?”

나는 진심을 담아 물었다.

왜 절친했던 친구를 배신했는지.

왜 나를 속이고, 헛된 사랑을 속삭여왔는지.

그리고 대체 왜 아픈 몸을 이끌며, 도시를 구했는지.

많은 의미가 담긴 질문을 건넸다.

그러나….

임아린은 대답은커녕 입을 꾹 다물었다.

그 흔한 변명조차 없이.

그저,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

물론 나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다.

“…대답해줄 때까지 기다릴 거야.”

단호히 뜻을 밝힌 나는 불안하게 꼼지락거리던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읏….”

손을 붙잡힌 그녀는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며 애처로운 눈빛을 보내왔고,

나는 입을 굳게 닫곤 잠자코 기다렸다.

“…….”

그렇게 침묵 속에서 서로 시선을 교환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니까….”

마침내 임아린이 울먹임에 가까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어왔다.

“…사랑하니까…. 네가…. 도지혁이 너무 좋아서…!”

터져 나온 눈물이 왼쪽 뺨에 주룩 흘러내린다.

“나도…, 나도 내 마음이 주체가 안 되는 걸 어떡해…! 도지혁은 내 거란 말이야…!”

그녀는 서럽게 눈물을 닦아내며 뜨거운 사랑을 고백해왔다.

“그렇게라도 안 하면…! 네가 날 떠나버릴 거 같아서…! 흑….”

그 모습이 한편으론, 떼를 부리는 어린애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랑이라….’

애석하게도 나는 임아린의 뜨거운 감정에 공감하지 못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에게 피해를 준다는 걸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기에.

내 기준으론 그동안 그녀가 저질러온 죄들을 용서하기엔 명백히 부족했다.

하지만….

명분은 충분했다.

“아린아.”

“흣….”

“임아린.”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훔친 나는, 양 볼을 우악스럽게 붙잡곤 강제로 시선을 마주치며 나지막이 물었다.

“내가 원했던 대답이, 진짜 그건 거 같아?”

“…아, 아니이….”

“근데 왜 그렇게 말해.”

“…그, 그게에….”

“다시 대답해봐.”

임아린은 코를 훌쩍이며 한껏 시선을 내리깔았다.

“…죄송합니다….”

그리고는 드디어 내가 원하던 대답을 돌려주었다.

“…자, 잘못했어요오….”

진심 어린 사과를.

“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오….”

비로소 그녀에게도 목줄을 채울 수 있게 된 것이다.

“…근데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어, 어어…?”

“또 그럴 거잖아. 나 속이고, 유라랑 주희 뒤통수나 치고.”

“…아, 아니야…!”

“솔직히…. 나는 아직 너 용서 못 했어.”

“…어?”

일순간 당황스러움에 물드는 그녀의 얼굴.

나는 동요하는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동안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파했던 내 마음은 어떡할 건데? 이게 사과로 끝날 일은 아니잖아.”

“…그, 그거언….”

“어떡할 거야? 내 상처는 어떻게 책임질래? 나도 진짜 영영 떠나서 제대로 복수해줘?”

“…우읏…. 싫어어….”

떠난다는 말에 민감히 반응한 그녀는 불안해하며 애처롭게 매달리기 시작했고,

‘…이쯤이면 됐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버린 나는, 붙잡고 있던 얼굴을 놓아주며 회유를 시도했다.

“그게 싫으면…. 앞으로 내 옆에서 얌전히 죗값 치르며 살아.”

“…여, 옆에…. 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 듯 멍하니 커다란 눈을 깜빡이는 그녀.

나는 첫 번째인 설주희부터 네 번째인 진서원까지, 복잡하게 얽힌 연인 관계를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전 여자친구’인 그녀에게, 새로운 자리를 제안해주었다.

“죗값 다 치르기 전까진, 넌 그냥 내 ‘동료’야.”

“도, 동…료…?”

연인은커녕 친구조차도 아닌 관계.

지금의 임아린에게 이것보다 더 어울리는 자리는 없었다.

“이게 싫으면, 얼마든지 떠나도 돼. 다른 남자 찾….”

“…그, 그건 아니야…! 그, 그냥…. 나를 다시 받아 준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임아린은 ‘동료’라는 한직이 영 못마땅한 듯한 내색을 내비쳐왔지만, 나도 별수 없었다.

여기서 그녀를 다섯 번째 여자친구로 덜컥 들이는 건 좋지 않은 선택지였으니까.

“나한테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빨리 회복부터 해. …앞으로 많이 바빠질 테니까.”

“…으, 응…. 알았어…. 노력해볼게….”

동료라고 선을 그은 게 많이 실망스러웠던 걸까?

“…동료….”

다른 의미로 풀이 확 죽어버린 그녀는 시선을 내리깔며 아쉬운 기색을 보여왔는데….

‘…조금 정도는 달래줘도 괜찮겠지?’

그 모습이 살짝 안쓰러워 보였던 나는, 조용히 손을 옮겨 그녀의 흉부를 주물렀다.

“…!”

“너무 실망하지 마.”

예상대로 속옷을 걸치지 않은 듯, 얇은 잠옷 너머로 생생히 느껴지는 확실한 촉감.

“나, 이래 봬도 여자친구 넷이나 있는 바람둥이인 거 알지?”

“아…! 으, 응…!”

의미심장한 신호를 알아챈 임아린은 기대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다음은 제대로 회복하고 나서.”

나는 단호히 손을 떼어내며 다음을 기약했다.

“…아….”

그러자 그 순간 임아린이 묘하게 후회하는 듯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기분 탓이겠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리고 말았다.

마침내 다섯 번째 여자친구 ‘후보’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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