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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47화 (147/165)

제 147화

숙제 (1)

“…….”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나는 엄습해오는 위기에 무심코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보았다.

“유, 유라가 그랬어? 내가…. 하와이 가서 식 올릴 거라고?”

여기서 토씨 하나라도 잘못 흘렸다간 그대로 나락행.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 상황을 넘겨야 한다.

“스읍…. 이상하다? 난 그렇게 말 안 했는데?”

“…뭐?”

‘윽….’

일순간 험악해진 설주희의 표정에 내심 가슴이 철렁였던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능청스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나중에 하와이에서 결혼식 하면 좋겠단 말을 하긴 했지만…. 잘못 전한 거 아냐?”

“…지금, 홍유라가 날 속였다 이거야?”

“아니, 뭐…. 엄연히 따지면 속인 건 아니지.”

“…아니라고?”

은근슬쩍 홍유라에게 책임을 떠넘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눈을 흘기는 설주희의 허리에 손을 둘렀다.

“너나 나나 어차피 결혼할 상대는 정해져 있는데, 아무래도 좋은 거 아냐?”

“…진짜?”

이렇게 순순히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없어서 그럴까.

설주희는 외려 의심이 깔린 시선으로 지그시 눈길을 보내왔고,

나는 죽을 각오에 처했단 마음가짐으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미래의 도지혁 앞으로 공수표를 남발해댔다.

“아까도 말했잖아. 넌 이미 내 거라고. 네가 나중에 싫다고 해도 절대 안 놔줄 거니까, 그렇게 알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싫다고 안 해.”

“정말? 설주희 변덕 심한 건, 세상 사람 다 아는 사실인데….”

“너 지금 나 의심해?”

눈에 한껏 힘을 주곤 날카로운 시선을 쏘아오는 그녀.

하지만 그녀의 눈빛에 공격성은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에이. 내가 널 어떻게 의심해?”

“…지금 말투가 그렇잖아.”

“그런 거 아니야.”

나는 그녀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척, 은근슬쩍 손을 잡아당기며 다리 위로 유도했다.

그러자 설주희가 기다렸다는 듯 순순히 허벅지 위에 자리를 잡더니, 길쭉한 다리로 내 허리를 붙들어왔다.

“홍유라는 몰라도, 날 의심하는 건 참을 수 없어.”

“유라는 그럴 수 있다는 거야?”

“걘 원래 속이 음흉하잖아. 나중에 갑자기 질린다고, 딴 남자로 갈아탈 수도 있어.”

“어우…. 그건 좀 상처받을 거 같은데.”

“난 절대 안 그래. 무조건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거나, 같이 죽을 거야.”

‘아니, 나는 왜….’

담담히 살벌한 공약을 내세우는 그녀의 발언에 살짝 섬뜩함 느꼈던 나는, 은근슬쩍 그녀의 양손에 깍지를 끼며 조심스레 입을 놀렸다.

“내가 그렇게 좋아?”

“응.”

“친구 사이에 양다리나 걸치는 쓰레기인데.”

“…그건…. 어쩔 수 없잖아.”

일부러 민감한 이야기를 건네봤음에도, 설주희는 내게 마음을 증명하려는 듯 애써 담담한 모습을 보여왔다.

밑밥을 깔 절호의 기회였다.

“막 내가 이러다가 여자친구 더 늘려버리면?”

“…뭐?”

“아니,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잖아.”

“…임아린이야?”

정말로 뭔가 아는 게 있는 건지, 귀신같이 임아린을 언급해오는 그녀.

하지만 이번엔 임아린이 아니었기에, 나는 애매하게 주어를 생략하며 그녀의 허락을 유도했다.

“…싫어?”

깍지를 낀 손에 지그시 힘을 준다.

그러자 내 애틋함이 닿은 듯, 날카로웠던 설주희의 눈빛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여기서 여자친구 늘리면, 진짜 죽일 거야.”

“또 그런다.”

“…진심이야.”

“진짜 그러면 내가 미워할걸?”

“그래서 지금. 나중에 여자 늘릴 거니까, 미리 허락받겠단 소리야? 이 욕심쟁이…!”

“그게 아니라…. 자, 잠깐…! 진짜 부러져…!”

그녀가 역으로 힘을 주자, 손가락이 비명을 지른다.

겨우겨우 손가락을 구해낸 나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곤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애교를 부려댔다.

“허락해 줄 거야? 응?”

“안 돼.”

“한 번만.”

“너, 이게 장난인 줄 알아? 절대 안….”

“칫, 유라는 괜찮다고 했는데….”

“…뭐?”

“아무것도 아냐.”

“…다시 말해봐. 홍유라는 허락했다고?”

설주희는 내 얼굴을 콱 붙잡곤 강제로 눈을 마주치며 물어왔다.

‘…홍유라…!’

아무래도 이게 그녀를 움직일 키워드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해야 하나….”

“…그 개 같은 년이, 진짜…!”

애매한 대답에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설주희는 어이없단 반응을 내비치더니, 이내 질 수 없단 표정으로 당당히 말해왔다.

“마음대로 해.”

“…진짜?”

“대신, 여자친구 늘릴 거면 나한테 검사받고 늘려.”

“검사…?”

“네 안목을 내가 어떻게 믿어? 임아린 그 씨발년도 좋다던 놈인데.”

“아니, 그건….”

아무리 나라도 임아린에 관한 건 할 말이 없다.

특히 설주희에겐 더더욱.

“절대 마음 주지 말고. 딱 봐도 꽃뱀 같은 년들한테 흘리고 다니다 걸리면 진짜 뒤질 줄 알아.”

“…조심할게.”

“그리고 호적에 올리는 건 나 하나야. 네 청혼 받을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나뿐이라고. 알았어?”

“…생각해볼게.”

“생각? 생가악…? 이게, 진짜…. 똑바로 대답 안 해?”

“…으, 으응….”

“하아….”

애매한 내 반응에 무거운 한숨을 내쉬던 설주희는 내심 불안함을 떨치지 못한 듯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딴년하고 놀아나는 거 진짜 싫은데….”

그렇게 싫은데도 부분적으로 허락해 준 걸 보면 그녀는 상당한 대인배가 확실했다.

“어디 확 가둬버릴까…?”

…아닌 거 같기도 하다.

“주희야. 내가 당장 늘리겠단 말이 아니야. 혹시 그럴 수도 있다고. 그럴 수도.”

“…난 지금, 솔직히 홍유라랑 나누는 것도 진짜 개좆같다고.”

“어쨌든 나는 네 거잖아.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히…. 그치. 영원히 넌 내 거지.”

순간 탐욕에 물드는 설주희의 눈빛.

나는 묘한 압박감에 시선을 내리깔곤 분위기를 얼버무리고자 조용히 손을 움직였다.

“…우리 밥 먹기 전에, 운동부터 할까?”

“갑자기 운동은 무슨…. …아.”

설주희는 몸을 더듬어대는 손길에 겨우 신호를 알아챈 듯 뒤늦게 물끄러미 눈을 마주쳐왔고,

‘작전 성공.’

성공을 확신한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

한편.

“왜 말 안 했어?”

진실을 깨달은 방한나는 진서원을 붙잡아 앉히곤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뭐긴 뭐야! 당연히 프로듀서님 이야기지! 대체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한 거야? 어떻게 사귀게 된 거냐고!”

짤랑짤랑 흔들리던 진서원은 그제야 왜 방한나가 흥분한지 이해한 듯 무심한 시선을 보내며 대답했다.

“…얼마 안 됐어.”

“그러니까…! 그 얼마 안 된 게, 얼마나 됐냐고!!!”

“…이번 주?”

“이, 이번 주면….”

마침내 답변을 받아낸 방한나는 재빨리 눈을 굴리며 날짜를 계산해보았는데….

‘어. 그럼…. 나보다 늦게 사귀기 시작한 건가…?’

비록 며칠이지만, 자신이 조금 더 오래됐다는 사실에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며 사귀게 된 이유를 캐물어 보았다.

“그, 그럼…! 프로듀서님이랑 어떻게 사귀게 된 건데?”

“…오빠한테, 혼나서.”

“프로듀서님한테, 네가 혼났다고…?”

“…응.”

‘왜 혼난 걸로 사귀는 거지…?’

상대적으로 순수했던 방한나로선 혼나는 것과 사귀는 것에 상관관계를 떠올릴 수 없었고,

“어, 어떻게 혼났는데…?”

결국,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진서원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말았다.

그리고….

“아니, 내기를 했다고…? 왜!? 대체 왜 그런 내기를 하신 건데!?”

“…몰라.”

“자, 잠깐만…. 오, 오일 마사지…? 프, 프로듀서님께서, 네 몸을 막, 이렇게, 이렇게, 주물렀단 소리야!?”

“…응.”

“…그래서 졌다고? 저, 정말로 25분 만에 세 번이나…?”

“…응.

“너어…! 갑자기 사라졌다 싶더니…! …그런데…. 지, 진짜야…? 프로듀서님이 화내면서 모, 목구멍에 막…?”

“…응.”

“아, 아니, 너무 디테일하잖아…! 그렇게까진 말 안 해줘도 괜찮은데…. …지, 진짜 그렇게 난폭한 모습을 보이셨다고…? 막 혼내기도 하면서…?”

“…응.”

“…조, 좋았어…?”

“…응.”

방한나는 본의 아니게 진서원의 첫 경험을 생생히 공유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펴, 평소에 다정하던 오빠도…. 역시 침대에선 다르구나….’

그렇게 그녀가 적이자 동료인 진서원의 정보에 괜히 얼굴을 감싸며 부끄러워하고 있던 그때.

“…언니는?”

“어…. 나?”

이번엔 진서원이 방한나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오빠랑, 어땠어?”

“그, 그런 걸 어떻게 말해…!”

“…난 했는데?”

“아.”

“…언니도 돼지니까, 오빠가….”

“야! 진서원! 내가 무슨 돼지야! 무, 물론 체지방이 좀 있긴 하지만…. 이건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빽 소리를 지르는 방한나를 무시하며, 그녀의 유독 커다란 흉부를 지그시 바라보는 진서원.

문득 묘하게 빈약한 제 가슴팍을 더듬던 진서원은, 한층 더 차가워진 시선으로 방한나를 바라보았다.

“…돼지, 맞잖아.”

진서원에게 있어서, 자신보다 가슴이 큰 여성들은 모두가 돼지였다.

“돼지 아니라고!”

“…어떻게 먹혔는지나 설명해.”

“머, 먹혔…!? 대체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온 거야!?”

“…오빠는, 좋아했는데?”

“아니…! …진짜야? 프, 프로듀서님은 그런 걸 좋아하셔…?”

“…응. 언니는, 그런 것도 몰라?”

“야! 나도 오빠가 좋아하는 말 정도는 알고 있거든!?”

“…뭔데?”

“그, 그건…! …마, 망가질 거 같다고 하거나…. 사, 사랑한다고 할 때마다….”

“…그리고?”

“그리고…, 또….”

그렇게 각자가 보유한 도지혁의 정보를 공유하며 자연스레 동맹을 맺은 방한나와 진서원.

“프로듀서님은 역시 괴롭히는 쪽을 좋아하시는구나….”

“…가슴….”

천하의 도지혁조차 당해내지 못할, 못 말리는 천재들의 탄생이었다.

*

“주희야. 주희야? 살아있지?”

이름을 부르자, 대답 대신 탐스러운 엉덩이를 움찔거리는 설주희.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면, 아직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뭐…. 괜찮겠지.’

예상대로 그녀에게 방한나와 진서원의 존재를 납득시키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한나랑 사귀어도 돼?

─또, 또 멈첬…!

─허락하면 계속해줄게.

─마, 마은대로 햿…!

─그럼, 진서원은? 걔도 괜찮아?

─괘, 괜차느니까…. 제바알….

─허락한 거다?

─아랏…. 끄흐웃…!

동시에 두 명이나 들먹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번에 허락을 내리던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자애로움 그 자체.

물론 자신이 허락했다는 기억조차 없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쨌든 구두 약속도 약속에 해당한다.

‘이해심이 넓어서 다행이야.’

나는 실신해버린 설주희를 뒤로하곤 먼저 욕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상쾌하게 샤워를 한 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설주희를 얌전히 내버려두고 안방을 빠져나왔다.

모처럼 기특한 일도 해줬으니, 설주희가 좋아하는 메뉴로 밥을 차려 줄 생각이었다.

‘뭐가 좋을까….’

그렇게 거실에 앉아 숨을 돌리며 설주희가 좋아하는 음식을 떠올릴 즈음.

“…….”

왠지 모르게 오래된 기억이 문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임아린이 차린 밥상을 좋아하던 설주희의 모습이.

‘…이런 건 임아린이 잘했었는데….’

갑자기 마가 낀 걸까.

무언가에 홀려버린 걸까.

아니면 설주희와 뒹굴며 흔히 말하는 ‘현타’가 와버린 걸까.

“…….”

초연한 마음으로 휴대폰을 집어 든 나는 익숙한 동작으로 연락처를 뒤졌다.

[ ㄱ아린이♥ ]

그리고 여전히 남아있는 그녀의 연락처를 잠시 바라보다가, 긴 고민 끝에 문자 한 통을 보냈다.

[ 뭐해? ]

슬슬 미뤄뒀던 숙제와 마주할 때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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