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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46화 (146/165)

제 146화

연합 (5)

마치 뒷감당은 알아서 하라는 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홍유라와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는 듯 간절한 눈빛을 보내오는 방한나.

두 사람 사이에 껴버린 나는 다급히 머리를 굴리며 빠져나갈 구멍을 뒤져보았다.

“나, 나는….”

하지만.

‘어느 쪽을 골라도 지뢰잖아….’

애석하게도 나는 이미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지뢰밭 한가운데 서 있었다.

방한나를 골라도, 홍유라를 골라도, 내 입장이 곤란해지는 건 매한가지였다.

꿀꺽─

그렇게 차라리 창밖으로 몸을 내던져서 상황을 얼버무리는 게 낫지 않을까 하며 그나마 리스크가 적은 선택지를 골라내던 그 순간.

삑─ 삑─

갑자기 현관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소음.

“!?”

누군가 도어락을 열고 있었다.

“…뭐야?”

“비, 비밀번호를 치고 있는데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손님의 등장에 놀란 홍유라와 방한나는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추궁에 가까운 시선을 보내왔고,

“나, 나도 모르는….”

삐리릭─ 철컥─

단 한치의 틀림도 없이 비밀번호를 뚫어버린 정체불명의 손님은 익숙하게 현관으로 들어서더니, 이윽고 중문을 벌컥 열며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오빠.”

네 번째 여자친구, 진서원이었다.

“하.”

“……어?”

대충 상황을 눈치챈 건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는 홍유라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혼란스러워하는 방한나.

‘아니, 얘가 왜…?’

물론 깜짝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네, 네가 왜….”

“…언니가, 늦어서.”

“…나!?”

알고 보니, 진서원은 그저 방한나를 찾으러 온 것 같았는데….

평소 타인에게 무심한 그녀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냥 늦어서 찾으러 왔다는 건 나름의 핑계가 분명했다.

‘이건 기회다…!’

어쨌든 좋은 기회라며 진서원을 핑계로 상황을 모면하자고 결심한 나는, 자연스레 그녀에게 다가가며 말을 꺼냈다.

“이, 이야기할 게 생겨서 조금 늦어졌어…! 금방 내려갈…!”

그런데.

“…오빠.”

그녀가 묘하게 못마땅한 시선으로 홍유라와 방한나를 흘깃 바라보더니, 명백히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왔다.

“…했어?”

“어?”

“…섹…우웁.”

“하, 하하! 얘도 참…! 하, 하긴 뭘 해!”

위험을 감지하여 간신히 진서원의 입을 틀어막은 나는 홍유라와 방한나의 눈치를 살피며 적당히 상황을 얼버무렸다.

‘…아, 안 들켰겠지?’

그러나….

“뭐…, 뭘 해?”

“…오, 오빠…?”

이미 홍유라와 방한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지 오래.

‘좆됐다.’

나는 그제야 진서원도 지뢰였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

진서원의 합류로 난장판이 벌어진 직후.

다음날 점심.

잔뜩 너덜너덜해진 나는 뒤늦게 홀로 대책을 세우고 있었다.

‘생각보다 사이가 너무 안 좋은데….’

가재는 게 편이라고, 진서원은 당연하다는 듯이 방한나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덕분에 방한나가 외려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을 보이기도 했는데….

어쨌든 본의 아니게 혼자 서울시청과 맞서게 된 홍유라는 눈치껏 분위기를 살피며 후일을 도모하려는 듯 얌전히 한발 물러섰고,

그 과정에서 설주희의 참전을 암시하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게 되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주희는 절대 나처럼 곱게 물러나지 않을 거야.

그야말로 곧 닥쳐올 재앙의 예고나 다름없었다.

“중동…. 중동으로 가야 하나…?”

그렇게 예상보다 훨씬 더 치열한 여자친구들의 관계를 개선할만한 방법을 떠올리며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 있을 즈음.

우웅─ 우웅─

굴러다니던 휴대폰에 짧은 알림이 울렸다.

“…?”

나는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내용을 확인해보았고,

[ ㄱ주희 : 나 엘리베이터 탔다 ]

코앞까지 닥쳐온 거대한 재앙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

아무래도 홍유라가 선수를 친 모양이었다.

‘망했다.’

황급히 노트북을 닫고 벌떡 일어선 나는, 갑작스러운 설주희의 습격에 대비하여 다급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주차장부터 여기까지 엘리베이터로 약 1분.

아침에 비밀번호를 바꿔뒀으니, 쉽게 들어오진 못하리라.

‘도망치자.’

설주희를 정면으로 상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니,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오직 줄행랑뿐.

최대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통화로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빨리 도망쳐야 해…!’

그렇게 상황 파악을 마치곤 곧바로 집을 빠져나가려는 찰나.

삑─ 삑─ 삑─ 삑─

익숙한 듯 빠르게 울려 퍼지는 도어락 소리.

그새 설주희가 도착한 것이다.

‘서원아, 고맙다…!’

나는 비밀번호를 바꾸게 해준 진서원에게 내심 감사를 표하며 재빨리 휴대폰을 챙겨 들었다.

그런데.

삐리릭─ 철컥─

“뭣!?”

맥없이 뚫려버린 현관문.

분명 비밀번호를 바꾼 지 몇 시간도 안 됐는데, 대체 어떻게 그녀가 새 비밀번호를 알고 있단 말인가?

‘이, 이럴 때가…!’

현관에서 스멀스멀 풍겨오는 공포의 향기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우선 되는대로 거실 창을 열어서 도망을 치려고 했다.

하지만….

“…거기서 뭐 해?”

“주, 주희야….”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냥 환기 좀 시키느라…. 하하….”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거실 창을 조용히 닫아낸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침을 꼴깍 삼키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정작 설주희는 그런 내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 바리바리 들고 온 쇼핑백을 적당히 내려두었는데….

‘화 안 났나…?’

자세히 살펴보니, 왠지 모르게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으, 더워…. 나, 마실 것 좀.”

“…어? 어어! 얼마든지….”

내 반응이 뭔가 이상했는지, 의미 모를 미소를 흘리며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

화가 난 상태였다면 분명 이렇게 얌전히 반응할 리가 없었다.

‘…설마….’

아무래도 홍유라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한 것 같았다.

“미치겠네….”

그렇게 설주희가 부엌으로 사라진 사이,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TV를 튼 채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후우….”

그리고 돌아온 설주희는 너무나 자연스레 내 옆자리를 차지하였는데….

‘최대한 기분을 좋게 만들어야 해.’

나는 미리 작업해둘 요량으로 선뜻 그녀의 어깨에 다정히 손을 둘렀다.

“갑자기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그러자 설주희가 조용히 눈을 흘기며 내 눈치를 살펴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곤 순순히 몸을 기대왔다.

“내 남자 보고 싶어서 찾아왔지.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그럼…, 좋아?”

“…응.”

“히힛.”

대답에 썩 만족한 듯 은근슬쩍 몸을 껴안아오는 그녀.

설주희가 이렇게도 애정 표현에 거리낌이 없을 줄 누가 알았을까.

내심 아침에 바꾼 비밀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참으며 안겨온 그녀를 쓰다듬어주었다.

“밥은 먹었어?”

“너랑 같이 먹으려고 안 먹었지.”

“…내가 먹었으면 어쩌려고?”

“또 먹어.”

“그러다 살쪄.”

“힘쓰면 다 빠져. 그리고…, 넌 살 좀 쪄도 돼. 그래야 이상한 년들이 안 들러붙지!”

설주희는 마치 애착 인형을 껴안는 것처럼 온몸으로 찰싹 달라붙어 왔다.

이렇게 독점욕이 강한데, 어떻게 동반 결혼식 같은 엄청난 걸 계획했을까?

‘한번 실신시키고 말해야 하나.’

나는 일단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고자 적당한 화젯거리를 내던져보았다.

“오늘 예쁘게 입고 왔네?”

그러자 설주희가 슬쩍 몸을 떼내더니, 기쁨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눈을 마주쳐왔다.

“어디가 어떻게 예쁜데?”

“…제대로 봐줄게. 한번 서 봐.”

냉큼 몸을 일으키곤 가벼운 포즈를 취해오는 그녀.

그녀는 베이지색 반소매 블라우스에 꽉 죈 허리가 인상적인 하이웨스트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과하지 않고 적당히 몸매가 부각되는 게 평소보다 더 성숙한 느낌이 들었다.

“새로 산 옷도 예쁘고, 화장도 잘 먹었고…. 머리도 자연스럽고 완전 여신이 따로 없네.”

“진짜?”

“응. 오늘따라 너무 예쁜데?”

“오늘따라?”

“…물론 평소에도 예뻤지만, 유독.”

“히….”

칭찬이 썩 마음에 들었는지, 냅다 얼굴을 부여잡고 쪽쪽 입맞춤을 남기던 그녀는, 한쪽에 밀어두었던 쇼핑백으로 쪼르르 다가가 무언가를 챙겨왔다.

“말 예쁘게 잘했으니까…, 선물 줄게.”

“…아니, 또 이런 걸….”

아니나 다를까 이어진 선물 공세에 잠시 머뭇거리던 나는, 이내 비위부터 맞추자는 생각으로 잠자코 선물을 꺼내보았다.

‘액세서리인가…?’

그녀가 건네온 건 귀금속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쇼핑백.

그 속엔 고급스럽게 포장된 작은 상자 하나가 들어있었는데….

“어서 열어봐.”

설주희의 독촉에 못 이겨 곧바로 포장을 뜯어보자,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 한 쌍과 용도 모를 피어싱 한 쌍이 들어있었다.

“…뭐야, 이게?”

“우리 커플 아이템.”

“어?”

그때, 일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반지 구매 메시지.

언젠가 말했던 게, 이걸 뜻했던 것 같았다.

“어때?”

“어…. 예쁘긴 한데….”

공교롭게도 나는 액세서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마 설주희도 잘 알고 있을 사실이겠지만…, 굳이 지금 여기서 짚고 넘어갈 필요는 없으리라.

“…근데, 이건 뭐야?”

나는 적당히 화제를 돌릴 생각으로 반지와 함께 꽂힌 작은 피어싱을 가리키며 물었다.

“귀고리야?”

그런데 그 순간.

“아. 그거?”

의미 모를 음흉한 눈빛을 띠며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는 설주희.

‘…뭐지?’

나는 그녀가 뭘 꾸미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스으으윽─

그녀가 대뜸 치마를 걷어 올리고, 분명 가려져 있어야 할 비부를 훤히 드러내기 전까진 말이다.

“여기?”

“…어?”

“그거 전신 공용이라, 여기도 된데.”

그러면 그렇지.

그 설주희가 평범한 걸 준비했을 리가 없었다.

“미쳤어? 아니, 속옷은 왜 안 입었어!?”

“걱정 마. 아무도 못 봤으니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그리고…! 대체 피어싱을 어디에 달겠다는 거야!?”

“아래가 좀 그러면, 위에도 괜찮은데?”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가슴을 쓰다듬는 그녀.

‘미치겠네.’

순간 정신이 아찔해져 무심코 눈앞을 가려버리자, 설주희가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어때? 식상하지도 않고, 괜찮지?”

“아니, 반지까지는 그렇다 쳐도….”

“원랜 커플 타투하고 싶었는데…, 타투는 질리면 못 바꾸잖아. 괜찮으면, 타투로 하고.”

“뭐…?”

“그냥 둘 다 해버릴까?”

이젠 하다 하다 커플 피어싱에 이어 커플 문신까지.

천진난만하게 엄청난 걸 들이미는 그녀의 모습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피어싱은 안 할 거야.”

“타투는?”

“그것도 안 해. …이 반지만 받을게.”

“왜? 피어싱이나 타투는 싫어?”

“내 여자한테 그런 짓 하기 싫어.”

“…내가…, 네 거야?”

“그럼 누구 건데?”

“아니, 네 거 맞지…. 히힛….”

설주희는 금세 기분이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팔짱을 껴왔다.

작은 소란이 있었지만, 어쨌든 비위를 맞추는 덴 아직까진 순조로운 편.

이제 짜증을 부리기 전에 든든히 배를 채워놓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만든 뒤에 은근슬쩍 고백하기만 하면 제대로 작전 성….

“지혁아.”

“응?”

그때, 설주희가 은근슬쩍 깍지를 끼며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하와이는 좀 천천히 가도 되지 않을까?”

“……어?”

“어제 유라한테 다 들었어. 하와이 갈 생각이라며?”

“하, 하와이…?”

“네 마음은 알겠지만…. 결혼식부터 하는 건 완전 플래그잖아. 차라리 나중에….”

“아니, 아니, 잠깐만…! 겨, 결혼식이라니…?”

몸을 살짝 떼어내곤 장난치지 말라는 듯 진지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뭐야?”

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그녀의 눈빛에 뭔가 잘못됐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홍유라…!’

틀림없이 홍유라가 내린 시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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