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5화
연합 (4)
“많이 바쁜가 보네?”
“조금. 아마 당분간은 이럴 거 같아.”
“너무 무리하진 말고.”
“걱정 안 해도, 충분히 쉬엄쉬엄 하고 있어.”
자연스레 집안으로 들어선 홍유라는 내가 짐을 푸는 동안 직접 마실 걸 준비해주었다.
마치 제집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게 살짝 신경 쓰이긴 했으나, 이내 그러려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고 말았다.
“근데 무슨 일이야? 갑자기 찾아오고.”
그렇게 적당히 목을 축인 나는 맞은편에 앉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붉은색 머리카락과 베이지색의 얇은 블라우스.
거기에 골반이 잘 강조된 어두운 바지까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어딘가에 특별한 볼일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어서.”
홍유라는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게 기특한 대답을 돌려주었는데….
‘뭔가 있구만.’
그녀와 오랫동안 지내온 나는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진짜 얼굴만 보고 싶었어?”
“…으, 응?”
예상치 못한 질문에 살짝 당황한 듯 경직된 반응을 보여오는 그녀.
“이리 와.”
옆자리를 툭툭 두드리자, 입을 다물고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그녀는 조심스레 컵을 내려 두곤 조용히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옮겨왔다.
“…됐지?”
살짝 기대에 찬 목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수 냄새가 풍겨온다.
의자를 살짝 밀어 그녀에게 찰싹 달라붙은 나는, 테이블 밑으로 손을 집어넣곤 그녀의 허벅지에 손을 얹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그래서, 갑자기 왜 왔어?”
“…그냥, 보고 싶어서….”
“그거 아니잖아. 솔직히 말해봐.”
얇은 바지 너머로 느껴지는 탄탄한 허벅지.
천천히 허벅지를 매만지던 나는, 곧게 선 등 뒤로 손을 옮겨 블라우스 아래로 꽉 죄인 등허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어서 이야기하라는 무언의 독촉이었다.
“그게…. 사실, 어제 아린이 만나고 왔거든….”
“…임아린?”
“응…. 잘 회복하고 있는 거 같더라고….”
얘가 왜 뜬금없이 임아린을 찾아갔을까.
“…잘했네.”
사실상 홍유라에게 있어서 임아린이란 철천지원수나 다름없기에, 나는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으며 이야기를 피했는데….
“…왜 찾아갔는진 안 물어봐…?”
외려 그녀가 내게 신호를 주며 화제를 이끌어나갔다.
임아린의 이야기를 구태여 내게 꺼냈다는 건 분명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뜻.
잠시 생각에 빠진 채로 그녀의 허리를 쓰다듬던 나는, 조심스레 질문을 건넸다.
“…왜 갔는데?”
“…그냥…. 조금, 걱정되더라고.”
걱정.
나는 홍유라의 그 한마디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어쨌든 아린이 덕분에 우리 작전이 성공한 거잖아…? 밉기도 한데, 한편으론 고마운 마음도 있고…. 그래서 찾아갔어.”
그런 짓을 당하고도 걱정스러운 마음이 드는 걸까?
물론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관대하다 못해 생불에 가까운 그녀의 마음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저기…, 지혁아.”
그때, 홍유라가 은근슬쩍 기대오며 넌지시 말해왔다.
“아린이…. 아직도 용서 못 했어…?”
“…모르겠어.”
한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다.
확실히 용서하지 못한 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녀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도통 모르겠다.
“나는…. 네 마음 가는 대로 따라가려고.”
“그게 무슨 말이야?”
기대있던 그녀를 떼어내어 시선을 마주친다.
사뭇 진지한 표정을 띤 홍유라는 지그시 눈을 바라보며 담담히 의견을 말해왔다.
“네가 좋다면…. …아린이도 우리랑 같이, 사귀어도 괜찮을 거 같아.”
“…진심이야?”
“네가 우리랑 사귀고 있는 이유가, 사실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잖아?”
“그건….”
“그런 의미에서, 아린이도 거둬주면 좋을 거 같다고 생각했어. 솔직히…. 아린이 만큼 너한테 필요한 인재도 없고.”
나는 진심이 담긴 그녀의 고백에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누구처럼 욕심을 부리며 나를 독점해도 모자랄 판에, 다른 여성을 거두라고 권유하다니!
심지어 자신을 나락으로 등 떠밀었던 임아린을 추천한 것이다.
‘이런 애가 나를 좋아하다니….’
증오를 딛고 오직 나를 위해 이성적인 판단을 내린 그녀의 갸륵함은 그야말로 경이로울 수준.
몰래 뒤에서 여자친구나 늘리고 다니던 나로서는 그녀의 대범함과 헌신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유라야…!”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나는 그녀를 당겨 와락 끌어안았다.
“진짜 내 생각해주는 건 역시 너밖에 없구나…. 고마워.”
“아, 아니야…. 주희도 항상 너만 생각하는 걸….”
설주희?
제 손으로 임아린을 죽였으면 죽였지, 절대 여자친구로 거두라 말할 성격은 아니다.
아마 지금도 나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고민하고 있을 게 뻔하다.
“걔는…. …진짜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야. 사랑해.”
“나, 나도 사랑해. 헤헷….”
그렇게 홍유라에게 쪽쪽 입을 맞추며 애정을 표현하던 나는, 임아린의 합류에 대해 제대로 뜻을 밝혔다.
“어쨌든 네 마음은 잘 알겠어. 아린이는 당분간 고민 좀 해볼게. 조금 마음의 준비가 좀 필요할 거 같아.”
“이해해. 사실 나도 엄청 고민했었거든….”
그동안 그녀가 얼마나 이 문제로 고민했을지 상상할 수가 없다.
남자로 따지면, 여자친구에게 양다리를 종용하는 행위지 않은가?
아무리 연인을 위한다 해도, 절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발상이 아니다.
“유라야….”
나는 새삼스레 홍유라의 진한 사랑을 느끼며 조심스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그리고 지그시 눈을 마주치며, 천천히 얼굴을 갖다 대던 그 순간.
띵동─ 띵동─
갑자기 집안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손님 왔는데?”
본의 아니게 분위기를 망친 홍유라는 그럴 수 있다는 듯 관대한 표정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고,
“…빨리 해치우고 올게.”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부엌에 달린 인터폰을 확인해보았다.
“누구세요?”
그리고.
[ 아, 오빠! 집에 계셨구나! ]
카메라에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해맑게 인사해오는 방한나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다.
[ 전에 두고 간 속옷 가지러 왔어요…! ]
“…어?”
“……속옷?”
나지막이 꽂혀오는 홍유라의 싸늘한 목소리.
‘윽….’
순간 등골을 훑어내리는 진득한 살기에 오싹함을 느낀 나는, 적당히 얼버무리며 재빨리 인터폰을 끊어버렸다.
“아, 아아! 그, 그거…! 알았어! 내가 갖다 줄게! 조금만 기다려!”
하지만….
“…방한나야?”
“으, 응! 저번에 왔다가 뭘 좀 두고 갔다고…. 그, 금방 갖다 주…!”
“…속옷을?”
뒤에서 지켜보던 그녀를 속이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걔 속옷이 왜 여기 있어?”
“그, 그게….”
어느새 자애로움과 관대함이 온데간데없어진 홍유라의 모습.
“데려와.”
“유, 유라야! 내가 다 설명할….”
“아니다. 내가 갈게.”
그녀는 깜짝 놀랄 정도로 싸늘한 눈빛을 띠며 몸을 일으켰고,
“그, 금방 데려올게!”
위기를 직감한 나는 황급히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
숨이 멎을 정도로 무거운 적막이 집안에 감돈다.
“…….”
팔짱을 꼰 채로 차갑게 노려보는 홍유라와 눈에 힘을 주며 필사적으로 맞받아치는 방한나.
그런 둘 사이에서 진땀을 뻘뻘 흘리던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보았다.
“저어….”
그 순간.
“지혁아.”
홍유라가 내 말을 휙 가로채더니, 방한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체로 넌지시 말해왔다.
“설명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 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어, 어어! 해야지, 설명…. …그러니까….”
나는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서해 침공 당시 방한나를 세 번째 여자친구로 들였으며, 조만간 사실을 밝힐 예정이었다고.
“너도 잘 알겠지만,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 이,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문자로 띡 남길 순 없잖아?! 그, 그래서 주희랑 같이 만나서…!”
그러자.
“도지혁.”
홍유라가 휙 고갤 돌리더니, 살벌한 눈빛으로 쏘아보며 나지막이 경고해왔다.
“난 변명이 아니라, 설명을 하라고 했어.”
“으, 응…. 그치…. 설명….”
평소 화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화를 내면 유독 무서운 법.
‘화 많이 났구나….’
나는 홍유라의 눈빛에 깨갱 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댔는데….
“저기요.”
그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방한나가 내 편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왜 우리 오빠한테 뭐라 그래요?”
“…뭐?”
“하, 한나야…!”
“오빠가 그쪽이랑만 사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사람을 몰아세우냐구요!"
“…내가 몰아세워?”
“그렇잖아요! 계속 눈치 주고, 겁박하고. 어차피 설주희랑도 사귀고 있다면서요? 근데 왜 자꾸 뭐라 그래요?”
어디까지 하나 지켜보려는 듯 입을 다문 홍유라와 기죽지 않고 눈을 치켜뜨며 달려드는 방한나.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히 끼어들었다.
“내,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그만해!”
하지만.
“오빠는 잘못한 거 없어요!”
“넌 입 닫고 있으렴.”
두 사람은 기 싸움을 멈출 기색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 뭐,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지혁이가 가슴을 유독 좋아하는 건 사실이니까…. 네가 어떤 식으로 지혁이를 꼬셨을지 눈에 훤히 보이네.”
“야, 야! 무슨 그런 말을…!”
“…제가 지금 몸으로 오빠를 꼬셨다고 말하는 거예요?”
“누가 봐도 그렇지?”
마치 몸 아니었으면 절대 꾀지 못했을 거라는 뉘앙스.
그 사실을 눈치챈 방한나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히며 발끈했다.
“…저기요. 그쪽이 그렇게 말할 처지는 아닌데요?”
“맞아. 지혁이가 나랑 하는 걸 좀 좋아해야지…. 아마 네가 안 왔으면 지금쯤 안방에서 한참 하고 있었을걸?”
“뭐, 뭐요…?!”
“그, 그런 거 아니야! 이제 둘 다 그만…!”
“맞잖아? 원나잇 상대라도 알 건 알아야지.”
“워, 원나잇!? 저기요! 저도 지혁 오빠 여자친구거든요!?”
“하아…. 불쌍해서 한번 따먹어 준 걸 오해하면 곤란한데….”
“지금 말 다했어요!?”
“야! 홍유라! 진짜 그만…!”
“설주희도 부르기 전에 가만있어.”
만약 이 개판인 상황에 설주희까지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마 나는 집을 잃고 길거리를 방황할지 모른다.
아니…. 그렇게 될 게 확실했다.
“아무튼…. 이번엔 조용히 넘어갈 테니까, 적당히 관계 정리하렴. 지혁이는 치기 어린 마음으로 넘볼만한 남자가 아니야.”
어쩔 수 없다는 말투로 방한나에게 이별을 권유하는 홍유라.
사실상 나에게 보내는 경고이기도 했다.
설주희에게 알려서 일을 키우기 전에, 눈치껏 정리하라는 최후의 경고.
“싫은데요?”
그러나 쉽게 그만둘 방한나가 아니었다.
“제가 왜 그쪽 말을 들어야 하는데요? 그쪽이랑 저랑 똑같은 위치인 건 아시죠?”
“…흐응….”
“하, 한나야…!”
“오빠. 지금 이렇게 오빠를 쥐고 흔드는데, 가만히만 있을 거예요…?!”
“그, 그건….”
확실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방한나는 내가 공식적으로 인정한 세 번째 여자친구.
이 관계에 끼어드는 건 홍유라의 엄연한 월권이었다.
…그렇긴 하지만….
“그렇다는데? 어쩔 거니?”
차마 나는 홍유라의 태도에 딱히 불만을 토로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녀가 무작정 나를 죄었으면 모를까, 당장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위해 임아린 합류를 주장했던 그녀이기에.
아무리 내가 구제 불능 인간쓰레기라고 해도, 여기서 방한나의 편을 들 수는 없었다.
“오빠…!”
물론 홍유라의 편을 드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제 와서 방한나에게 이별을 통보하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
애초부터 가벼운 마음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었기에, 단순히 하룻밤의 추억으로 치부하고 싶진 않았다.
‘어떡하지….’
선택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