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44화 (144/165)

제 144화

연합 (3)

“…여자친구…들?”

본의 아니게 거사를 치른 후.

나는 정신을 차린 진서원을 붙잡고 이 어지러운 관계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보통 연인 관계는 1:1이잖아?”

“…응.”

“근데 나는 조금 달라. 어…. 여럿이서, 사귀고 있어.”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그녀.

“날 좋아하는 사람은 여럿인데…, 나는 몸이 하나라서…. …그냥 한꺼번에 사귀기로 했어.”

내가 말하고도 얼굴이 다 화끈거린다.

당사자인 나조차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어느 누가 이 말도 안 되는 관계를 이해하겠는가?

“설명이 됐을까…?”

“…응. 근데….”

“응?”

“…그럼, 오빠는 누가 제일 좋아?”

진서원은 정말로 순수하게 궁금하다는 듯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고,

‘첫 번째…?’

나는 예상치 못한 질문과 맞닥뜨리며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일단 거두고 보자는 생각으로 여자친구를 늘리긴 했지만, 필연적으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선 고민해보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피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글쎄. 다 아끼느라, 특별히 누구를 더 좋아하고 이런 건 없네.”

그때.

“…오빠.”

진서원이 내 손가락을 꼬옥 붙잡으며 넌지시 말해왔다.

“…나는, 오빠가 제일 좋아.”

“…어?”

때 아닌 사랑 고백이었다.

“…오빠는?”

그녀는 마치 대답을 독촉하듯 특유의 나른한 눈빛으로 지그시 시선을 마주쳐왔다.

“…나도 네가 좋지. 싫었으면 절대 이러고 안 있어.”

“…그럼, 내가 첫 번째야?”

“그건….”

“…나는, 오빠가 첫 번째인데?”

사랑을 하면 성장한다는 게 사실이었을까.

무심한 그 눈빛에 은근히 묵직한 압박감이 느껴지는 것이, 대체 언제 이렇게까지 성장한 건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서원아.”

그렇다고 여기서 쉽게 넘어갈 순 없다.

여기서 잘못 혀를 놀렸다간 크나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기에.

“나도 네가 너무 좋아. 그런데 누가 제일 좋은지는 다른 문제야.”

“…왜? 오빠는, 나 싫어?”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만약 여기서 네가 제일 좋다고 말해버리면, 다른 애들이 좋아할까?”

“…여기 없는데?”

“어쨌든 다 내 여자친구들이잖아. 내가 너 없는 곳에서 다른 애한테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면 기분이 좋겠어?”

“…싫어.”

“그래. 그래서 나는 누가 제일 좋다고 말할 수 없어.”

뭐, 개인적인 선호도나 애정 표현을 유독 많이 했던 경우는 있었다.

방한나는 그럴 수밖에 없는 여자였으니까.

“…그렇지만…. 네가 하는 거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내가?”

밑밥에 걸려든 진서원은 은근히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여왔다.

중간에 약간 변질하긴 했으나, 내가 이렇게 많은 여자친구를 사귄 근본적인 이유는 전부 안정적인 통제를 위하여.

특히 어디로 튈지 모르는 진서원은 조금 강하게 잡아둘 필요가 있었다.

“네가 잘하면 다른 애들보다 데이트도 많이 할 수 있고, 말도 잘 들으면 그만큼 예뻐해 줄 거야.”

“…진짜?”

“어제 내가 마사지도 해줬잖아. 그거 왜 해줬는데?”

“…말 잘 들어서?”

“그래! 앞으로 네가 잘하는 만큼 그대로 돌아올 거야. 약속할게.”

그렇게 진서원은 잠시 생각에 빠진 듯 시선을 거두었고,

“…알았어.”

이윽고 순순히 제 발로 목줄을 걸어 내게 건네주었다.

무려 네 번째 여자친구의 탄생이었다.

*

다음날.

“이거 주세요.”

보틀샵에 들러 적당한 선물용 술을 구매한 나는, 곧장 이혜리가 예약한 호텔로 향했다.

저번에 받은 도움의 보답과 정부에서 온 연락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겸사겸사 만나기로 했는데, 웬일인지 사무실이 아닌 호텔로 나를 불러들였다.

저번 서해 수비에 주도적으로 나선 덕분에 그녀도 꽤나 많은 주목을 받았으니, 아예 편히 쉴 수 있는 공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게 아닐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께선 안쪽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렇게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비서의 안내를 받아 객실로 들어선 나는, 고급스러운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며 이혜리를 불렀다.

“혜리야. 나 왔다.”

그때.

“왔니….”

안쪽의 침실에서 나른한 목소리와 함께 이혜리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잤어?”

“기다리다 잠깐 졸았어.”

화장기 옅은 얼굴에 가벼이 모아 묶은 보랏빛 머리카락과 하반신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티셔츠까지.

정말 바쁘긴 바쁜지, 묘하게 평소보다 풀어진 모습으로 내게 인사를 건네왔다.

“앉으렴. 마실 건?”

“너랑 같은 걸로.”

“그럼 커피로 줄게.”

그렇게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만들어 응접실로 돌아온 그녀는 내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따뜻한 커피를 홀짝였다.

아직 눈에 졸음이 남아있는 게, 많이 피곤한 모양이었다.

“…요즘 많이 바쁜가 보네. 좀 쉬엄쉬엄 하지.”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1위 길드로 알 박을 기회인데, 좀 피곤한 게 대수니?”

“뭐…. 그것도 맞는 말이지. 아 참, 이건 바빠진 기념 선물.”

“…술이니?”

“나중에 쉴 때 마시자고.”

서해 침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백일과 세진은 유례없을 정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엄청난 리스크를 감수하며 내게 도움을 주었기에, 두 길드의 성공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그래서.”

커피 향기를 즐기다 잔을 슬쩍 내려둔 나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기대며 본론을 꺼내보았다.

“정부에서 연락이 왔다고?”

“사람을 보내왔어. 다른 나라랑 연합해서 마족 대응팀을 설립할 예정인데, 우리 쪽에서 맡아달라고 하네.”

“대답은?”

“어땠을 거 같아?”

머그잔 너머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지그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대충 대답이 예상되긴 했지만, 모르는 척 받아주었다.

“뭐라 그랬는데? 하겠다고 했어?”

“백일한테 양보했어.”

“…진짜?”

얼추 짐작하긴 했지만, 그녀는 정부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밝혀왔다.

나야 딸린 게 팀 서울시청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쳐도, 한창 몸집을 불릴 세진 길드로선 거절하기 쉽지 않은 제안이었을 텐데….

“네가 거절한 거 같길래, 우리도 거절했어.”

알고 보니, 내가 잠잠한 걸 보곤 눈치껏 거절했다고 한다.

“나 때문에 그걸 거절했다고?”

“네가 정부랑 안 하는 거 보면 뻔하잖니? 뭔가 따로 계획이 있거나, 그쪽에 붙는 게 별로 거나. 둘 중의 하나인데, 굳이 받아들일 이유가 없지.”

이혜리는 모든 게 자신의 손바닥 위라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흘리며 커피를 홀짝였고,

‘아니, 이걸 예측해?’

정확하게 계획을 털려버린 나는, 사실 그녀에게 미래 예지 능력이 있는 게 아닐까 의심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순식간에 커피를 반쯤 비우고 한결 상쾌해진 이혜리는 잔을 슬쩍 내려 두곤 넌지시 말해왔다.

“기껏 신경 써서 귀한 선물까지 줬는데…. 나도 보답을 해야겠지?”

“야, 됐어. 도움받은 걸로 치면, 저것도 모자란데….”

“요즘 ‘힘쓰느라’ 피곤할 텐데. 몸 관리해야지.”

“…어?‘

묘하게 힘을 강조하는 의미심장한 말투.

등골을 훑는 서늘함에 눈썹을 찌푸리며 그녀를 흘끔 바라보자, 이혜리가 차가운 미소를 띠며 눈을 마주쳐왔다.

“밤마다 절륜한 여자친구들 감당하는 게 좀 힘드니? 물론…, 나는 ‘안 해봐서’ 모르지만 말이야.”

아뿔싸.

아무래도 이혜리가 내 복잡한 여성 문제를 알아낸 것 같았다.

“…그걸 네가 어떻게….”

“퀸즈에 서울시청에…. 나는 네가 그런 페티쉬가 있는 줄 몰랐어. 그런 줄도 모르고, 한 번만 따먹어 달라고 들이댔다니…. 눈치도 없지. 한심한 여자라 미안하구나.”

서운한 기색을 팍팍 드러내며 폭주하는 그녀.

“혜리야, 그게 아니라….”

“나 정도면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보면서 속으로 얼마나 우스웠을까?”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재빨리 그녀의 옆으로 다가가 해명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혜리야. 그거 다 오해야. 그게 사정이 있어서 그랬다니까? 네가 싫은 게 아니라….”

“이 와중에도 넌 내가 안중에 없구나.”

“야.”

“남자 손은 잡아보고 죽을 수 있을런지….”

고운 손을 나풀거리며 은근히 신호를 보내오는 그녀.

여기까지 온 마당에, 받아주지 않는 것도 예의가 아니리라.

“어멋.”

“내 이야기 좀 들어줘.”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쥐며 마치 바람을 들킨 남자처럼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순애보와 어쩔 수 없이 거두어야 했던 슬픈 사정을.

“나도 진짜 어쩔 수가 없었다니까?”

“흐응…. 그러니까, 적당히 다루기 쉽게 목줄을 채웠다. 이거지?”

“…표현하자면 그렇지.”

가까스로 자초지종을 알게 된 이혜리는 내 손을 은근슬쩍 매만지며 눈을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내가 도지혁 공략법을 잘못 이해했구나.”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과 함께, 뜬금없는 제안을 들이밀어 왔다.

“내가 좋은 제안 하나 해도 될까?”

“갑자기?”

“너…. 길드 하나 만들어볼래?”

“……뭐?”

무려 길드를 만들라는 제안이었다.

*

다음을 기약하며 이혜리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그녀가 제안했던 내용에 대해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길드라….’

이혜리는 자신이 기꺼이 도와주겠다며 내게 길드 설립을 제안해왔는데….

─그런 불안한 방식으론 제어가 안 돼.

─지금은 통제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 사람 무는 개가, 물겠다고 광고하면서 다니지는 않잖아?

─그냥 단순히 묶어두는 게 아니라, 자기들끼리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야 해.

다짜고짜 웬 길드인가 했더니, 퀸즈와 서울시청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투기장을 만들라는 이야기였다.

‘괜찮은 거 같은데….’

솔직히 인간적인 방법은 아니었지만, 철저히 효율을 따졌을 땐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돈도 벌고, 팀도 운영하고, 모두가 납득할 만한 선에서 그녀들을 길들일 수 있다.

그야말로 도지혁의 거대한 수조가 생겨버리는 것이다.

‘좀 알아볼까….’

그렇게 머나먼 그림을 그리며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직후.

“어, 지혁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나는, 현관 앞에서 뜻밖의 손님과 마주치고 말았다.

“네가 왜….”

“안 그래도 전화할까 했었는데…. 운이 좋았네.”

홍유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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