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1화
경고 (5)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신다면….”
다행히 방한나를 설득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가 체념하고 이해한 쪽에 가까웠지만….
어쨌든 나를 둘러싼 어지러운 상황을 어느 정도 이해해주었다.
“여보세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 어느덧 찾아온 다음 날.
[ …응…. ]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선 나는, 진서원에게 전화를 걸며 곧장 주차장으로 향했다.
“아, 서원아. 자고 있었어?”
[ …응, 왜? ]
“다름이 아니라…. 우리 어제 했던 이야기 있잖아. 내가 지금 급한 일이 생겨서 오늘은 안 될 거 같아.”
[ …왜? ]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불만 가득한 목소리.
하지만 이번엔 나도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미국이랑 유럽에서 사람을 보내왔어. 마족 때문에 온 거라, 언제 끝날지 모를 거 같아.”
마족의 등장은 전 세계적으로 크나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SNS와 인터넷이 발달한 이 시대에 지금껏 발견되지 않은 외계 문명이 침공을 시도했는데, 수많은 시민들이 힘을 모아 직접 막아냈으니, 사실상 화제가 안 되는 쪽이 더 이상한 수준.
그 중심에 섰던 나는 자연스레 정부의 호출을 받게 되었다.
“웬만하면 진짜 너랑 만나고 싶은데,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 정말 미안해.”
[ ……. ]
진서원은 별다른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기분이 별로 안 좋겠지.
어쨌든 질러놓은 게 있으니, 그녀를 달래는 게 맞는데….
‘껄끄럽네.’
분명 성인이지만 마냥 동생처럼 진서원에게 그런 짓을 한다는 것이, 영 석연치 않았다.
“혹시 일찍 끝나면 내가 바로 전화할게. 혹시 오늘 일정 있어?”
[ …오빠 만나는 거. ]
원망이 뚝뚝 묻어나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해.”
새삼스레 그녀가 얼마나 간절한지 깨달은 나는, 거듭 사과를 건네며 양해를 구했고,
[ …기다릴게. ]
“이해해줘서 고마워.”
기나긴 설득 끝에 겨우겨우 약속을 미루며 전화를 끊었는데….
“미치겠네….”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조금 뒤로 미룬 기분이라, 기분이 영 이상했다.
*
한편.
“…뭔데? 갑자기.”
설주희는 뜬금없이 집에 찾아온 홍유라를 의심스레 바라보고 있었다.
“그냥 얼굴 보러 온 거야.”
그녀는 아무런 의도도 없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커피를 홀짝였지만, 아무래도 뭔가 숨긴 게 있는 눈치였다.
‘대체 무슨 꿍꿍이지?’
서해 침공 이후, 홍유라는 다른 헌터들과 달리 대외 활동을 피하며 상대적으로 조용하게 지내왔다.
반대로 활발하게 움직이며 여론을 선동하고 자신의 입지를 드높이던 설주희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겨왔는데….
내내 쥐 죽은 듯 조용히 지내던 그녀가 이유 없이 자신에게 찾아온 걸 보곤 뭔가 미묘한 느낌을 받고 있었다.
말 그대로 잘 발달한 여자의 촉이 싸한 느낌을 감지한 것이다.
“요즘 꽤 바빠 보이던데.”
달각─ 잔을 내려둔 홍유라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로 선뜻 말문을 열었다.
“지혁이는 좀 만나봤어?”
“…그걸 네가 왜 물어?”
한껏 날이 선 설주희의 말투.
홍유라는 작게 웃음을 흘리며 우아하게 대답했다.
“우리 사이에, 이 정도는 물어봐도 되는 거 아냐?”
“…뭐?”
“어쨌든 한 남자를 공유하는 사이잖아.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동료고.”
동료.
“하.”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친 설주희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홍유라를 노려보았다.
“웃기고 있네. 지금 네가 도지혁한테 이상한 바람 불어넣어서 이렇게 된 거 아냐! 그런데 뭐? 동료? 씨발년이 친구라고 보자 보자 하니까…!”
유난히 독점욕이 강한 설주희는 현재 벌어진 도지혁의 하렘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찍이 오래전부터 도지혁의 정실이 될 수 있는 건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해온 그녀다.
한때 뜻이 맞아 계획했던 동반 결혼식조차도 자신이 주인공이 되리라 결심하며 소위 말하는 임신 공격을 몰래 꾸미기도 했었는데….
모든 계획이 일그러진 지금, 그녀는 정정당당히 사랑을 쟁취해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동료라니.
‘가당치도 않지…!’
설주희에게 있어서 홍유라는 더 이상 동료가 아니라, 그저 하이에나처럼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는 음흉한 암컷일 뿐이었다.
“얘는, 너도 즐겨놓고 왜 그래? 전에 지혁이랑 호텔 잡고 놀았다며. 이게 다 지혁이가 받아줘서 그런 건데,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니? 지혁이 아니었으면, 너 평생 거미줄치고 살았어.”
“뭐라고? 거미줄?”
반면 홍유라는 도지혁이 자신들을 받아 준 걸 감지덕지해야 한다는 뉘앙스를 내비쳤다.
“사실 그렇잖아. 지혁이가 헤프게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닐 성격도 아니고. 임아린이 선수 쳐버린 마당에, 우리한테 기회가 있었겠어?”
“그건….”
말문이 막힌 설주희는 차마 반박할 수가 없었다.
도지혁이 묘하게 고지식한 건 그녀도 익히 잘 알고 있는 부분.
애초에 그녀가 꼬리를 내리며 하렘에 들어간 이유도 일단 명분부터 만들기 위함이었기에, 더더욱 할 말이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와이프끼리 서로 힘내보자고. 응?”
“…미리 말하지만, 내 계획에 끼어들면 죽여버릴 거야.”
“청혼 말하는 거야? 걱정 마. 나도 거기에 껴들 생각은 없으니까.”
“…정말?”
“솔직히 나는 결혼식에 별로 관심이 없거든. 뭣하면 혼인신고도 양보할 수 있어.”
“뭐, 뭐?”
조금도 예상치 못했다는 듯 깜짝 놀란 기색을 보이는 설주희.
홍유라는 생글생글 웃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녀는 설주희의 청혼 작전을 우습게 여기고 있었다.
아무리 대외적으로 정실 취급을 받고, 결혼식이나 혼인신고를 하더라도, 그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건 결국 도지혁의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기에.
‘이기는 건 나야.’
아직 홍유라가 알고 있는 도지혁의 하렘 멤버는 퀸즈의 멤버들 뿐이다.
내조에 치우친 임아린과 외조에 치우친 설주희보단 양쪽 모두 밸런스 있는 자신이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물론 이게 근거 없는 자신감은 아니다.
도지혁은 순종적인 여성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충실함을 증명하고자, 임아린의 하렘 참가를 종용할 계획이다.
거기에 임아린처럼 완전한 연인 관계를 맺은 건 아니지만, 유사 연애를 해본 경험도 있으며,
무려 이혼 사유에도 포함되는 잠자리 궁합이 월등히 좋았기 때문에 자신 있었다.
‘지혁이가 분명 나랑 하는 게 제일 좋다고 그랬어.’
사실 이건 불세출의 천재 방한나를 겪어버린 도지혁의 의견이 포함되지 않은 오래된 정보였으나….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던 홍유라는 아직도 자신이 압도적 1위일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너…, 그 말 진짜야? 나중에 딴말하면….”
“안 그래. 내가 이런 걸로 거짓말해서 뭐해?”
숨긴 꿍꿍이를 알아내지 못한 설주희는 눈을 가늘게 뜨며 홍유라를 지그시 노려보았고,
홍유라는 음흉한 속내를 숨긴 채로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
그날 새벽.
“으으….”
아침부터 이어진 마라톤 회의에 시달리던 나는, 캄캄한 새벽이 되어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잘 되려나….’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회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각국에서 보내온 전문가들과 함께 침공 대비책에 대해 논의했으나, 여러 가지 제한 사항에 막혀 아직도 결론이 나질 않았다.
다행히 어느 정도 대화가 진행되어, 마족의 존재와 침공 자체는 인정받을 수 있었지만….
주요 침략지이자 세계 멸망의 기조가 될 한국에 대비 인력을 배치하는 것까진 협상해내지 못했다.
‘어쨌든 흐름은 변하고 있어.’
이러나저러나 맥없이 뚫려버리고 말았던 원작보다 상황이 좋아진 건 확실하다.
국내 헌터들의 단합은 이뤄졌으며, 전 세계가 마족의 침공에 대해 경각심을 갖기도 했으니까.
적어도 세계가 허무하게 멸망하진 않을 것 같았다.
“하아….”
그렇게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선 나는, 묘한 안정감에 한숨을 내쉬며 현관에 신발을 벗어두었다.
그런데….
“…응?”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한 짝의 운동화가 눈에 들어왔다.
‘뭐지?’
낯선 디자인도 그렇고 사이즈도 조금 작은 게, 내 건 아니었다.
누군가 집에 들어와 있다는 뜻이다.
“…….”
숨을 죽이며 현관 중문 너머의 컴컴한 집안을 바라본 나는, 신발을 마저 벗곤 조심스레 집안으로 들어섰다.
현관의 조명에 슬쩍 드러나는 컴컴한 집안.
‘도둑인가?’
느껴지지 않는 기척에 침을 꼴깍─ 삼키며 조용히 전등 스위치를 향해 손을 뻗던 찰나.
끌쩍…끌쩍…
어디선가 묘한 소음이 귓가에 스쳐 지나갔다.
‘뭐지…?’
마치 끈적끈적한 무언가를 주무르는 듯한 소음.
끌쩍…끌쩍…
다시 한번 들려오는 정체불명의 소음에 살짝 긴장한 나는, 어느새 피로를 잊은 채로 마력을 끌어올리며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화아아아악───
순식간에 어둠이 거둬지며 밝아진 집안 내부.
“…….”
하지만 소음을 일으킨 무언가는 보이지 않았다.
‘…안방인가…?’
나는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음을 따라 유력한 장소인 안방으로 발길을 옮겼고,
끌쩍…끌쩍…
귀를 대자 방문 너머로 들려오는 명백한 소음에 다시 한번 침을 꼴깍 삼키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고 빠르게 전등을 밝혀 소음의 정체를 확인했는데….
“…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마주한 나는 멍청한 소리를 흘리며 일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소음의 정체는 바로….
“서, 서원아…?”
한창 위로 중인 진서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