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8화
경고 (2)
“…….”
임아린은 맞은편에 앉은 홍유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마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집념마저 느껴지는 눈빛.
그녀는 명백히 홍유라를 의심하고 있었다.
“향이 좋네.”
그런 임아린의 눈빛을 무시하며 찻잔에 담긴 홍차 향을 즐기던 홍유라는 가볍게 입을 축이곤 잔을 내려놓으며 슬쩍 시선을 옮겼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붉은색 머리카락과 가벼운 블라우스에 긴 치마까지.
폭력과 거리가 한참 멀어 보이는 얌전한 차림새로 긴 속눈썹을 나풀거리며 지그시 바라보는 그녀의 붉은 눈동자엔 숨이 멎을 정도로 짙은 살의가 묻어있었다.
“그래서. 몸은 좀 어떠니?”
친근한 말투로 안부를 묻는 홍유라의 모습에 무심코 눈썹을 찡그린 임아린은, 그녀의 저의를 알아낼 셈으로 조심스레 대답해보았다.
“…그냥…, 그래.”
“다행히 생각보다 멀쩡한 거 같네. …난 네가 정말 죽는 줄 알았거든.”
이 세상에 죽지 않아서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듣고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시선을 내리깔며 은근한 도발을 적당히 흘려낸 임아린은 사뭇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근데 여기까진 무슨 일이야…?”
“그냥 병문안 왔어.”
“…병문안…?”
“친구가 아프다는데, 병문안 정도는 와야지. 안 그러니?”
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당당히 ‘친구 관계’를 표방하는 홍유라.
그 절친한 관계를 직접 깨부쉈던 임아린은 묘한 꺼림칙함에 얼굴을 굳히며 다시 한번 되물었다.
“…날 어쩔 셈이야…?”
그러자.
홍유라가 입꼬리를 씩 끌어올리며 진한 미소를 짓더니, 똑바로 눈을 마주치곤 웃음 섞인 말투로 대답해왔다.
“내가 뭘? 나는 주희가 아닌데?”
임아린의 질문을 적당히 받아침과 동시에, 설주희라면 몰라도 자신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여러 가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이었다.
“그냥 이야기나 좀 하러 왔어. 우리…. 그동안 제대로 된 대화를 못했잖아?”
“…대화?”
정말로 대화를 하려는 건지, 다리를 꼬곤 의자에 편안히 기대는 홍유라.
그러나 그녀의 눈빛엔 여전히 진득한 살의가 묻어있었다.
“지혁이한테 연락 왔니?”
“……!”
임아린은 전 남자친구의 이름이 나오자 민감히 반응하고 말았고,
홍유라는 아직 연락이 오지 않았음을 짐작하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너무 걱정하지 마. 아마 조만간 연락 올 거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저번에 지혁이가 잠꼬대로 널 찾더라고.”
“……뭐?”
대체 어떻게 그녀가 도지혁의 잠꼬대를 들은 걸까.
일순간 살벌하게 일그러진 임아린의 표정을 마주한 홍유라는, 정말로 싸우려는 게 아니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해명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지혁이가 널 버렸으면 이미 진작에 버렸겠지. 그런 짓까지 벌였는데, 목숨도 구해주고. 간병인까지 붙여 준 거 보면, 답 나오잖아.”
“…….”
이는 임아린도 이미 어느 정도 알아차린 부분.
도지혁이 정말로 절교를 다짐했다면, 아마 절대로 이렇게까지 신경 쓰진 않았으리라.
“그래서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같이 힘내보자고.”
“……지금 손을 잡자는 거야?”
“뭐…. 비슷해.”
홍유라는 지독한 기회주의자다.
그녀는 임아린이 조만간 도지혁의 하렘에 발을 들이리란 걸 눈치채고, 미리 편을 가르기 위해 직접 나선 것이다.
“들으면 조금 놀랄 수도 있는데, 주희랑 나는 지혁이랑 만나고 있어. 그러니까…. 동시에.”
“…그게 무슨 소리야…? 동시에 만난다니…?”
홍유라는 아무것도 모를 임아린에게 기꺼이 설명해주었다.
설주희와 자신에게 목줄이 채워져 있고, 그 목줄을 도지혁이 쥐고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목줄을 잡아당겨 주인을 덮쳤다는 사실까지도.
“그런데 주희가 요즘 너무 막 나가고 있어. 이번에 큰 역할을 한 건 알겠는데…. 솔직히 대놓고 청혼이니 결혼이니 하는 건 조금 보기 불편하네.”
그제야 임아린은 그녀가 왜 자신에게 찾아왔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요컨대, 설주희가 혼자 너무 설치고 다니니, 함께 힘을 합치자는 것이다.
‘…박쥐 같은 년….’
임아린은 예나 지금이나 그녀의 본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고,
“대충 생각해둔 게 있는데. 좀 들어볼래?”
철저한 득실 관계를 계산한 끝에….
“…일단 들어볼게.”
마침내 홍유라와 손을 맞잡았다.
*
한편.
“…뭘 해달라고…?”
등 떠밀려 부랴부랴 집안을 정리하던 나는, 무릎을 꿇은 방한나의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녀는 아예 여자친구 행세를 하기로 다짐한 듯,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달라며 당당히 요구해왔는데….
“아, 안아주세요…!”
그래놓고 밑도 끝도 없이 안아달라 하는 바람에 난데없는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니까…. 널 안아주라고…?”
“넵…!”
안아달라는 말의 의미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그저 비장한 얼굴로 답을 기다리는 그녀.
눈빛에 은근한 천진난만함이 묻어나는 게, 아무래도 내가 생각한 의미는 아닌 거 같았다.
“으음….”
“아, 안 될까요…?”
마치 애는 어떻게 생기냐는 아이의 물음에 당한 것처럼 괜히 머리를 긁적이던 나는, 이내 아이 치곤 매우 발달이 잘 된 그녀의 몸을 흘끔 바라보며 솔직하게 입을 열어보았다.
“한나야. 그…. 내가 오해하고 있는 거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 어떤 의미로 말하는 거야?”
“네…?”
방한나는 아직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나는 혹시 모를 오해의 소지를 방지하기 위해 다시 한번 명확히 물었다.
“지금 안아달라는 게…. 자자는 의미야?”
그러자.
“…아.”
그녀가 뒤늦게 상황을 이해한 듯 딱딱하게 굳어버리더니, 순식간에 귀까지 붉게 물들이곤 시선을 내리깔며 떠듬떠듬 속삭여왔다.
“…그, 그, 그것도…. 조, 좋긴…한데….”
“…어?”
“그, 그게 아니라! 포, 포옹…! 허그! 그런 의미였어요…!”
아니니 다를까, 역시 가벼운 스킨십을 기대했던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괜히 김이 새는 기분이다.
‘아니, 겨우 그걸 부탁하면서 이렇게까지 비장하게 부탁하는 쪽이 더 이상한 거 아냐?’
돌이켜보면, 내가 오해한 건 전적으로 방한나의 탓.
키스까지 한 주제에, 무릎 꿇고 안아달라 부탁하면 당연히 오해할 수밖에 없다.
“…한나야. 그런 건 이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
“네…?”
이해할 수 없는 방한나의 사고방식에 괜히 고개를 내저은 나는, 소파에 앉아 무릎을 두드리며 넌지시 말했다.
“이리 와.”
“어, 어어…. 거, 거기에 앉으라구요…?”
막상 상황이 닥치니 부끄럽기라도 한 걸까.
“어서 와.”
“저, 무거울 텐데….”
“무거워도 내가 무거워. 자, 얼른.”
나는 괜한 고민을 하게 만든 그녀에게 복수할 심산으로 억지로 무릎 위에 그녀를 앉혀버렸는데….
“괘, 괜찮으세요…?”
그 와중에도 자신의 몸무게가 걱정됐는지, 그녀는 다리에 힘을 주며 은근슬쩍 엉덩이를 들고 있었다.
이걸 귀여워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안 불편해?”
“하, 하나도 안 불편한데요…?”
무릎을 파르르 떨며 버티는 그녀의 모습에 무심코 피식 웃음을 흘린 나는, 그녀의 배를 와락 끌어안으며 뒤로 몸을 확 기대버렸다.
“꺄앗…!”
그러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그녀가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어졌고,
포옥-
나는 포근한 압박감과 코끝에 스치는 그녀의 달콤한 체취를 즐기며 붉게 물든 귓가에 속삭여주었다.
“이게 네가 생각했던 거 맞아?”
“그, 그게에…. 마, 맞는 거 같기도 하고…. 헤헷….”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실실 웃음을 흘리는 그녀.
퀸즈의 멤버들과 다른 의미로, 참 요망한 면이 있다.
“…….”
그렇게 방한나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주무르다 새삼스레 느낀 건데, 방한나의 육체는 홍유라와 비슷하면서도 분명히 다른 촉감을 지니고 있었다.
체형이 비슷한 홍유라가 탄탄하게 잘 죄인 느낌이었다면….
방한나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느낌이 강했다.
뭐라고 할까, 조금 더 살집이 있다고 해야 하나?
“…저어…. 프, 프로듀서니임….”
“응?”
“그으…. 배…. 배는 그만 만지셨으면….”
“이거?”
의도적으로 손에 힘을 주어 배를 꾹꾹 어루만진다.
그러자 그녀가 그만하라는 듯, 애처롭게 손목을 붙잡아왔다.
“아니이, 그, 조금 부끄러워서….”
“귀여워서 좋은데?”
“귀, 귀엽다고요…?”
그래, 방한나는 딱 그런 느낌이었다.
커다란 곰 인형을 껴안는 느낌.
많은 여성을 경험해본 건 아니었지만, 껴안는 촉감만큼은 방한나가 압도적이다.
“내 거니까, 마음대로 만질래.”
“…프, 프로듀서님 거요…?”
“싫어?”
“아니, 싫은 건 아닌데에…. 헤헷….”
또 다시 헤프게 웃음을 흘린다.
그런 방한나를 보고 있으면, 괴롭히고 싶은 마음이 마구마구 솟아난다.
사실 이러려고 사귀자고 한 게 아니었는데.
여러모로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가, 괜히 이런 쪽으로 발산하는 것 같았다.
뭐…. 한나도 싫어하는 거 같지는 않으니,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다른 거 볼까?”
“아, 넵…!”
그렇게 애착 인형처럼 방한나를 멋대로 주무르며 내심 마음의 안정감을 되찾아가던 도중.
[ 암컷이 받아들일 준비가 될 때까지. 암컷에게 간지럼을 태우며 전희를 합니다. ]
방한나에 의해 돌아가던 TV 채널이, 어느 다큐 채널에서 멈춰버렸다.
[ 아나콘다가 죄악의 동물로 뽑힌 건 시간 때문입니다. 마라톤과 같은 그들의 사랑은, 무려 4주간 이어지기 때문…. ]
그중에서도 하필 뱀의 짝짓기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었는데….
“…우, 우와아…. 아나콘다는 교미를 4주나 한데요…!”
왠지 모르게 방한나가 비상한 관심을 보여왔다.
“쟤, 쟤넨 지치지도 않을까요…?”
“…글쎄….”
“이, 인간은 저렇게 하면 죽겠죠…?”
“응. 무조건 죽어.”
“…그렇구나아….”
순진한 듯 아닌 듯 미묘한 그녀의 반응.
“한나야. 이제….”
그런 그녀의 반응에 슬슬 놀려먹는 것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하며, 방한나를 무릎에서 내리려던 찰나.
“앗….”
TV 채널을 돌리던 방한나가 이상한 반응을 보이더니.
[ 하아…! 하아…! ]
서양 남녀의 뜨거운 신음이 거실에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성인용 채널을 틀어버린 것이다.
‘아니, 그 번호를…?’
수많은 번호 중에 19금 채널을 콕 집어 틀어버린 방한나의 선택에 놀라워하길 잠시.
“프, 프로듀서님. 그…. 아까 말씀하신 게…. 저거 맞죠…?”
그녀가 애틋하게 손가락을 얽혀오며 조심스레 물어왔다.
“기, 기분…, 좋겠죠…?”
이번엔 오해할 여지도 없는 분명한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