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7화
경고 (1)
‘구해야 한다.’
맥없이 추락하는 임아린을 본 순간, 머릿속엔 온통 그녀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가슴 한구석에선 그동안 그녀가 저질러온 나쁜 짓들과 나를 기만해왔던 추억들이 스쳐 지나가기도 했으나,
미처 잘잘못을 따지기도 전에 몸이 멋대로 움직여버렸다.
꾸욱─!
건물 외벽을 발판 삼아 무릎에 힘을 주며 굽힌다.
그러자 오래전에 부서졌던 다리가 시큰거린다.
비가 오는 것도 아닌데, 괜히 쿡쿡 쑤시는 느낌이다.
“후우──.”
아마 기분 탓이겠지.
타앗─!
발 끝에 힘을 주어 몸을 던진다.
마력을 실은 만큼 빨랐지만, 떨어지는 임아린에게 닿기엔 부족하다.
파앙─!
언젠가 빼앗아온 초가속을 응용하여 속도를 높인다.
“큿….”
능력의 보조가 없어서 그런지, 몸이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다.
‘멀어…!’
그러나 아직 속도가 부족하다.
파앙─!
한번 더 마력을 태우며 속도를 높인다.
“으읏…!”
슬슬 눈을 뜨기가 어려워지고,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른다.
‘조금만 더…!’
희미해진 시야 너머로 점점 가까워지는 임아린.
덥석─!
조금 더 마력을 태우자 비로소 그녀를 붙잡을 수 있었고,
와락─!
“됐다…!”
오랜만에 그녀를 꼭 껴안은 나는,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온기를 느끼며 곧 들이닥칠 충격에 대비해 마력을 두르며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그 순간.
풍덩──!
질척하게 젖어버린 아스팔트 대신, 시원한 물웅덩이가 나를 부드럽게 받아주었다.
“푸핫…!”
“프, 프로듀서님…!”
“괜찮으세요!?”
“…오빠. 괜찮아?”
금세 사라진 물웅덩이에서 빠져나오자, 곧이어 다급히 달려오는 팀 서울시청 멤버들.
아무래도 김나래가 물의 정령을 이용하여 나를 받아낸 것 같았다.
‘처음부터 이럴 걸 그랬나.’
아주 잠깐,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임아린을 구하면 됐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
품 안에 고이 안긴 그녀를 바라본 나는, 이내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고 말았다.
*
얼마 후.
“크으….”
기분 좋게 샤워를 마친 나는, 평일 대낮부터 거실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뉴스를 보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한가로이 낮술을 마신다는 게 썩 좋은 일은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기도 하고, 이렇게 작은 여유로움을 즐기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았다.
[ 현 시각 인천입니다. 갑작스러운 괴수의 공습으로 도시가 엉망이 된 이후, 전국에서 모여든 수많은 자원봉사자 덕분에 빠른 회복을… ]
적당히 틀어둔 TV에선 인천과 마족에 관한 소식을 끊임없이 쏟아냈다.
침공이 시작되기 전만 해도 눈치를 살피는 듯한 반응을 보이더니, 정부가 공식적으로 마족의 존재를 인정하자 기다렸다는 듯 온갖 소식을 퍼붓기 시작했다.
[ …도시를 구한 임아린 씨는 현재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인천시에선 포상을 고려하고 있다는…. ]
결론적으로 서해 침공은 매우 성공적으로 해결됐다.
임아린이 정체불명의 달팽이 괴수를 퇴치하고, 내가 그녀를 구하는 사이.
서해의 게이트에서 마왕군의 사천왕 중 3녀인 마리가 나타났다.
그녀는 진서원에게 일방적으로 당하여 저항조차 없이 터져버렸던 막내 모리모와는 다르게 S급 괴수들을 부리며, 나름 명성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기도 전에 달려든 설주희와 홍유라에게,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소멸해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내가 임아린을 구했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했다나 뭐라나….
솔직히 두 사람의 실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수월하게 침공을 막아버렸다.
…아마도 많은 시민들이 도운 덕분이리라.
“후….”
차갑게 식은 캔을 내려둔 나는, 머리가 한층 무거워지는 걸 느끼며 푹신한 소파에 깊숙이 기대었다.
‘…취하네….’
그리고 점점 잠겨오는 의식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뉴스를 들으며 천천히 눈꺼풀을 닫던 그 순간.
[ 이번 침공에서 대활약을 펼친 퀸즈의 여왕! 설주희 씨를 모셨습니다. ]
[ 안녕하세요. 설주희입니다. ]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들었다.
‘…어?’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몸을 일으킨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TV를 바라보았다.
[ 이번 침공에서 아주 큰 활약을 펼쳐주셨는…. ]
단정한 옷차림으로 아나운서와 마주 앉은 그녀의 모습.
틀림없는 설주희였다.
“아니, 뉴스까지 나왔어…?”
내가 알고 있던 설주희는 분명 뉴스같이 딱딱하고 보수적인 매체에 나서는 걸 매우 싫어한다.
그런데 갑자기 뉴스 출연이라니!
나는 생각지 못한 그녀의 행보에 놀라워하며 잠자코 인터뷰를 지켜보았는데….
[ 어떻게 그런 과감한 연설을 하게 되신 건지 여쭙고 싶은데요? ]
초반엔 좀 잔잔하게 진행된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얌전한 내용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 제 남자친구…, 지혁이가 저한테 좀 도와달라고 했었거든요. ]
그녀는 내가 연설을 부탁했던 걸 언급하며 자연스레 내 이야기를 꺼내왔다.
[ 이번 일만 잘 풀리면,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겠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했었어요. ]
[ 아. 그러니까 도지혁 씨가, 주희 씨에게, 뭐든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했다는 거죠? ]
[ 네.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청혼이 받고 싶더라고요. ]
[ 아…. 거기서 청혼을 생각하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네요. ]
“…미친….”
역시 그녀가 그냥 뉴스에 나올 리가 없었다.
[ 혹시 그러면…. 도지혁 씨에게 청혼을 받으셨나요? ]
[ 아뇨. 아직 못 받았어요. 아무래도 그 친구가 일 때문에 너무 바쁜 거 같아서…. ]
[ 하하! 아마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몸이 아닐까 싶긴 합니다. ]
[ 사실 무슨 대국민 청혼?처럼 돼서 조금 부끄럽긴 한데…. 기다려야죠. ]
설주희는 자신의 이미지를 완벽히 다짐과 동시에 나와의 관계를 제대로 못 박아 버렸다.
침공이 끝나자마자 청혼이 어쩌고 하는 걸 무시했더니, 이렇게 나올 줄이야.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사이가 돼버리고 말았다.
“하아….”
그렇게 약 20분간 진행된 설주희의 화려한 언론 플레이에 두드려 맞으며 정신이 혼미해지길 얼마나 지났을까.
띵동─ 띵동─
갑자기 집안에 울려 퍼지는 초인종 소리.
‘…누구지?’
조금 뜬금없는 타이밍이긴 하나, 찾아올 만한 곳이 너무나도 많아서 가늠할 수가 없었다.
“누구세요?”
나는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추스르고 인터폰을 확인해보았는데….
[ 저, 저 왔어요…! ]
살짝 예상 밖의 인물이 인터폰 너머로 조심스레 신분을 밝혀왔다.
“…아….”
방한나였다.
“혹시 술 드시고 계셨어요…?”
“어…. 그냥, 조금.”
집안으로 들어선 방한나는 대낮부터 거실에 깔린 술판을 보며 살짝 못마땅하단 반응을 보여왔다.
“점심부터 술을…. 그보다 안주는요…?”
“안주? 그냥…, 과자에….”
“세, 세상에…! 그러다 속 버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속? 속이야, 뭐. 괜찮….”
“하나도 안 괜찮아요…! 안 되겠다. 이건 다 치워버릴게요?”
“어어? 그거 한 모금 남았는데….”
“쓰읍!”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곤 곧바로 술판을 치우며 묘하게 평소와 다른 태도로 잔소리하기도 했는데….
“이제 이런 식으로 혼자 술 드시면 안 돼요…! 무조건 저랑 같이 마셔요!”
은근슬쩍 여자친구 행세를 하려고 하는 게 느껴져서, 꽤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갑자기 우리 집엔 무슨 일이야?”
“…네…?”
그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멈칫하며 조심스레 눈을 마주쳐오는 방한나.
나는 정말로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몰랐기에, 순수한 의도로 질문을 건네보았다.
“아니…. 뭐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냐?”
그러자.
“어…. 그, 그게….”
방한나가 문득 얼굴을 화악 붉히더니, 어딘가 부끄러워하는 듯한 눈치로 말을 더듬으며 띄엄띄엄 대답해왔다.
“…그, 그냥…. 보, 보고…싶어서….”
“…어?”
“아, 안 되나요…?”
아니, 여자친구 행세는 안 부끄럽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건 부끄러운 걸까.
“…아냐.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
“아…. 넵…. 그…, 이것 좀 마저 치울게요…!”
“…그래.”
*
그렇게 설주희가 전공인 언론 플레이로 국민 여론을 휘어잡고, 도지혁이 한창 집안에서 방한나와의 시간을 즐기고 있을 무렵.
임아린의 집안에서는.
“…….”
온갖 영약제와 수액을 주렁주렁 매단 임아린은 얌전히 침대에 몸을 뉘고 망가진 몸을 회복하고 있었다.
‘…언제 올까….’
몸을 쥐어짜 내 마법을 사용하고 도지혁을 도왔던 그날.
희미하게 정신을 차린 그녀는 오랜만에 도지혁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할 말은 많은데, 말할 상태가 아닌 거 같으니까 얌전히 회복하면서 기다리고 있어.
사실 대화다운 대화라고 부르기엔 조금 어폐가 있는 일방적인 내용이었지만….
어쨌든 그녀가 이렇게 얌전히 몸을 회복시키고 있는 건 전부 도지혁과 대화하기 위해서였다.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임아린이 도지혁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다른 때와 달리 허튼짓 않고 착실히 몸을 회복시키던 그때.
삑─ 삑─ 삑─ 삑─
누군가 그녀의 집안에 들어섰다.
“…….”
임아린은 당연히 도지혁이 붙여 준 간호원이나 가정부일 거라고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고 말았다.
그런데….
“임아린.”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파고들었고,
“…!”
한껏 쇠약해진 탓에 기척을 느끼지 못한 임아린은 뒤늦게 몸을 일으키며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해보았다.
“유, 유라야….”
홍유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