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36화
계획 (5)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며 내려찍는 괴수의 공격.
“하아아앗…!”
쏜살같이 튀어 나간 방한나가 방패를 치켜들며 단신으로 공격을 막아섰다.
쿠우우우웅────!
그 짧은 새에 성장해버린 건지, 한결 여유롭게 공격을 막아낸 그녀는 내게 신호를 보내왔고,
“프로듀서님!!!”
“간다…!”
나는 그녀가 벌어 준 틈을 이용하여 자세를 잡고 힘껏 검을 휘둘렀다.
촤아아아아악────!
괴수를 베어내자, 날 끝에 느껴지는 특유의 저항감.
퀴에에에에엑─────!!!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치던 괴수는 뒤이어 휘몰아친 진서원의 공격에 당해 육중한 몸을 눕히고 말았다.
“후우….”
몇 번째인지 모를 괴수를 쓰러뜨린 나는, 짧게 숨을 고르곤 근처에 있던 괴수의 시체에 올라 주변의 전황을 살펴보았다.
와아아아아───!!!
콰아앙───!
키에에에에에에엑─────!!!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족들과 괴수들은 두터운 인간들의 방어선에 막혀 맥없이 쓰러지고 있었고, 승기를 감지한 헌터들은 더더욱 사기를 끌어올리며 게이트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사실상 승리는 시간문제.
곧 튀어나올 마왕군 사천왕만 쓰러뜨리면 정말로 끝이다.
‘…진짜 해낸 건가…?’
눈으로 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묘한 고양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원작 소설에서 이번 침공은 동료의 사망과 더불어 여러모로 크나큰 피해를 입히는 전투로 묘사됐다.
그 덕분에 최후의 전투에서 결과가 갈리게 됐으니, 사실상 미래를 가르는 분기점이라 칭해도 부족하지 않으리라.
그렇기에 나는 이번 침공에 많은 공을 들여왔고, 거의 성공에 가까운 성과를 이뤄냈다.
그동안 내 손으로 적잖은 전개를 바꿔왔지만….
이번만큼 짜릿한 적은 없었다.
“…오빠.”
“프로듀서님! 또 와요…!”
진서원과 방한나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짚고 있던 검을 들며 거침없이 적들을 달려들었다.
“하아아앗…!”
그리고 곧 찾아올 끝을 향해 검을 휘두르던 그때.
쿠구구구궁……
도시 쪽에서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려왔다.
“뭐, 뭐야?”
“…무슨 소리지?”
“나만 들은 게 아니었어?”
굉음을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방어선을 구축한 헌터들도 뭔가 의아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프로듀서님…! 지금 뭔가…!”
“…뭐지?”
함께하던 멤버들조차 멈칫하며 굉음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순간.
[ 도지혁!!! ]
착용하고 있던 이어폰에서 이혜리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도심에 마력 파동 감지!!! 바로 이 근처야!!! ]
게이트 발생 징조였다.
‘설마…!’
일순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꿈속의 어느 한 장면.
자연스레 잊고 말았지만, 마왕군의 침공은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젠장…!”
“프로듀서님…?”
“…오빠?”
도대체 왜 그렇게 중요한 걸 기억하지 못한 걸까.
기회를 줬음에도 통제하지 못한 스스로를 책망한 나는, 쉼 없이 몰려오는 괴수들을 확인하며 다급히 이혜리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크기랑 주기는?”
[ 주기는 약 10분! 크기는 아직 확인 안 됐지만, 그렇게 크진 않은 거 같아! ]
그렇게 나는 몇 가지 정보로 도심에 발생한 게이트의 규모가 작다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다급히 귓가의 이어폰을 꾹 누르며 연결된 모두에게 소리쳤다.
“도심에 게이트 발생! 마족 놈들이 뒤통수를 쳤어!!”
[ 뭐!? ]
[ 그게 무슨…. ]
[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
난데없는 소식에 기함하며 되물어오는 사람들.
나는 대답 대신 수정된 전략부터 모두에게 전파했다.
“일단 팀 서울시청은 도심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퀸즈가 중앙에서 움직이고, 나머지는 원래 계획대로 움직여!”
일단 우리끼리 게이트를 막아볼 셈이었다.
[ 너 미쳤어!? 그걸 막겠다고!? ]
[ 너무 위험해! 차라리, 우리도 합류해서…! ]
그 와중에 설주희와 홍유라가 자신들의 합류를 주장해왔지만….
“안 돼! 단순한 게릴라에 흔들릴 순 없어! 그러니까, 너희는 여길 지켜!”
나는 일말의 변수를 차단하고자 그녀들의 주장을 거부해버렸고,
“얘들아, 가자!”
“…넵…!”
“…응.”
“알겠습니다…!”
팀 서울시청 멤버들과 함께 다급히 도심으로 향했다.
*
[ 현재 인천 소식입니다. 팀 서울시청 프로듀서 도지혁을 필두로 구축된 방어선은 순조롭게 게이트를 방어하고 있으며…. ]
고요한 병실에 뉴스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어느 순간 겨우 정신을 차린 임아린은 반쯤 세워진 침대에 멍하니 기대어 TV를 지켜보고 있었다.
“…….”
그녀가 모든 일의 자초지종을 파악하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병실을 찾은 간호사로부터 자신이 입원하게 된 이야기와 그동안 무슨 일을 벌어졌는지 들을 수 있었기에.
그 덕분에 강제로 망상 속에서 끄집어내진 그녀는, 피하고 싶었던 쓰라린 현실에 고통스러운 신음을 삼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건가…?’
그녀는 계속해서 중계되는 도지혁의 소식을 들으며 작은 불안감을 품었다.
임아린은 도지혁이 전투에서 멀어지길 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불에 뛰어드는 나방처럼 죽어버릴 게 뻔하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의 다리를 부쉈고, 도지혁은 실제로 전투와 거리가 먼 프로듀서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기어코 다리를 고치나 싶더니, 결국, 무기를 들고 전장에 나섰다.
마치 그게 운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상황이 훨씬 좋은데도 불구하고 임아린은 그런 도지혁의 모습에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꼈다.
이제는 사라진, ‘황제’라고 불리던 도지혁은 겨우 몇몇 동료들과 함께 서해 침공을 막아섰다.
물론 그 시절의 도지혁에 비하면 훨씬 약하긴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비교하는 게 실례일 정도로 훨씬 많은 사람이 그와 함께하고 있다.
사실상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라 봐도 부족함이 없는 상황이었다.
‘지혁아….’
그렇게 임아린이 TV 속 도지혁을 바라보며 사무치는 그리움과 묘한 불안감에 가슴을 졸이던 그때.
[ 긴급 속보입니다! 마족의 침공이 진행 중인 인천의 도심에서, 정체불명의 게이트가 발생했다고 합니다! ]
TV에서 긴급 속보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현재 프로듀서 도지혁 씨를 포함한 팀 서울시청이 도심의 게이트를 방어하고 있으나…! ]
뉴스에선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달팽이 괴수와 그에 맞선 팀 서울시청의 모습을 비춰주었고,
[ 상대는 S급 괴수로 추정되며,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
클로즈업된 도지혁의 얼굴이 화면에 잡힌 그 순간.
똑똑─
병실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간호사의 목소리.
“식사 왔습…. …어라?”
아침 식사가 담긴 트레이를 끌던 간호사를 맞이한 건 텅 빈 병실이었다.
*
게이트에 반쯤 걸친 보라색 생물체가 끈적한 파도처럼 밀려오며 도시를 집어삼킨다.
“프, 프로듀서님…! 버, 버틸 수가 없어요옷…!”
“한나야! 방패를 버려!”
“그, 그치마안…!”
“얘들아!!!”
“…응.”
“하, 한나야! 지금 구해 줄게!”
방한나가 통째로 삼켜지려는 찰나, 우리는 가까스로 힘을 합쳐 방한나를 구해냈고,
으득─ 으드득─
미처 꺼내지 못한 방한나의 방패는 보라색 몸뚱이에 먹혀, 둔탁한 소음과 함께 일그러지고 말았다.
“바, 방패가….”
“일단 모두 뒤로 빠져!”
그렇게 팀원들을 데리고 인근 건물 옥상에 피신한 뒤.
‘젠장….’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은 나는, 꿈틀거리며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거대 달팽이를 바라보았다.
도심에 열린 게이트에서 빠져나온 건 이름 모를 달팽이 괴수.
거대한 몸집 덕분인지, 게이트조차 비좁게 빠져나오는 녀석이었는데….
둔한 외형과 다르게 물리적인 공격을 모두 흡수해버리는, 아주 괴랄한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든 그걸 찾았어야 했는데….’
기분 나쁜 보라색 몸체가 익숙한 게, 아무래도 꿈에서 본 동굴이 녀석의 둥지인 것 같은 느낌.
사전에 녀석을 찾지 못한 게 크나큰 실수였던 건지, 마땅한 토벌 방법이 떠오르질 않았다.
“어, 어떡하죠…?”
“프, 프로듀서님….”
물리 공격이 통하질 않으니, 우리로선 상대할 방법이 없다.
아니, 타격을 기반에 둔 대부분의 헌터들은 녀석을 상대할 수가 없다.
녀석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오직 순수한 마력뿐.
그나마도 김나래의 정령에 움츠러드는 수준으로 반응하는 걸 보면, 아마 상당히 강한 마법사가 필요할 것 같았다.
‘이럴 때 임아린만 있었어도….’
마법의 정점에 선 임아린이 있었다면 아마 쉽게 토벌할 수 있었을 터.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도움을 바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무슨 수든 찾아야 했다.
‘어떡하면 좋지….’
그렇게 거침없이 도심을 집어삼키는 거대 달팽이를 바라보며, 오랜만에 무력함을 느끼던 그 순간.
“어, 어어!”
갑자기 김나래가 허공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저, 저기…!
팀원들과 나는 자연스레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고,
‘…사람…?’
새하얀 옷을 입은 채, 허공에 떠있는 누군가를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
습관처럼 능력을 사용하여 상대의 이름을 확인한 나는, 뜻밖에 이름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이름 : 임아린 ]
그토록 찾던 임아린이 나타난 것이다.
화아아아아아아악────!
그녀의 정체를 확인한 찰나, 도심에 펼쳐지는 거대한 마법진.
아무래도 임아린이 직접 놈을 처치하려는 것 같았다.
“자, 잠깐…!”
비약 중독으로 잔뜩 망가져 있던 그녀의 몸 상태를 떠올린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그녀에게 향했고,
“프, 프로듀서님!!!”
“…어?”
“위, 위험해요!”
팀원들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건물 옥상을 뛰어넘으며 조금씩 접근하던 그때.
우우우우우우우웅──────
거대한 빛줄기가 내려치며 도시를 뒤덮은 괴수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꿰뚫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는 달팽이 괴수.
─────────!!!!!
촤아아아아악────!!!!!
뒤이어 마법진에서 떨어진 거대한 칼날이 빠져나오던 놈의 몸을 내려찍자, 놈은 마치 젤리를 가른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녹아내리고 말았다.
‘저건 도대체….’
듣도보도 못한 처음 보는 임아린의 마법에 넋을 놓으며 건물을 뛰어넘길 잠시.
콰드득─ 콰드드드드득──
도시를 집어삼키려던 게이트는 점차 몸집을 줄여갔고,
철퍼덕── 철퍼덕──
녹아내린 달팽이 괴수가 도심을 질퍽하게 적시며 생기를 잃어가던 그 순간.
“!”
마법을 마친 임아린이 허공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