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34화 (134/165)

제 134화

계획 (3)

결론적으로 최효민과 설주희의 다툼은 별일 없이 끝을 맺었다.

“설주희. 이제 그만해.”

“도지혁…! 넌 여자친구가 코앞에서 욕먹고 있는데, 가만히 있어!?”

“너도 같이 욕했잖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

“너…!”

“그리고 효민 씨도 적당히 해요. 이래 봬도 제 여자친구인데, 너무 심하게 말하는 건 좀 그렇네요.”

“……여, 여자친구…?”

최효민이 뒤늦게 설주희와 도지혁이 관계라는 걸 알게되며 물러난 것이다.

물론 두 사람이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그런 연인 관계는 아니었지만….

가타부타 일일이 설명할 순 없기에, 단순한 연인으로 공표하고 말았다.

문제는….

‘…여, 연인…?’

한 발자국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방한나였다.

‘그, 그러니까…. 설주희랑…. 프로듀서님이….’

그녀는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도지혁과 설주희가 사귀는 것도 그렇고, 그 옆에 있는 홍유라가 묘하게 평온한 얼굴로 가만히 있는 것도 그렇고.

안 그래도 혼자 뒤처져있단 생각에 괴로워하던 방한나에겐 사실상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저어…, 한나야….”

그때, 옆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김나래가 방한나에게 손을 뻗으며 조심스레 위로해주었다.

“괜찮아…?”

잠시 충격에 빠져있던 방한나는 그녀의 배려를 눈치채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그, 그럼요! 아무렇지 않아요…!”

그 순간.

“어. 얘들아!”

상황을 정리하고 배치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던 도지혁이 그녀들을 발견하고 말았다.

“!”

크게 움찔거리며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 방한나.

“오느라 고생 많았어!”

사람들을 뒤로하고 한걸음에 달려온 도지혁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자랑스러운 눈빛으로 멤버들에게 인사를 건네보았는데….

“하도 인파가 몰려서 오래 걸리지 않을까 했는데…. 일찍 와서 다행이야. 와줘서 정말 고맙다.”

“…아, 아뇨. 당연히 와야죠…!”

“…….”

진서원이야 항상 말이 없다 쳐도, 왠지 모르게 김나래만 애써 활기찬 반응을 보여왔다.

‘…뭐지…?’

어딘가 슬픈 눈빛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방한나의 시선에 의아함을 느끼던 도지혁은, 우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넌지시 말을 꺼내보았다.

“…아무튼. 오늘 같이할 사람들하고 인사부터….”

그런데.

“읏….”

순간 방한나의 커다란 눈가에 눈물이 맺히더니.

“죄, 죄송해욧…!”

참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며 냅다 도망을 쳐버렸다.

“하, 한나야?!”

“…!”

돌발 행동에 화들짝 놀란 김나래와 드물게 눈썹을 치켜뜨며 놀라워하는 반응을 보이는 진서원.

“한나야! 잠시만!”

뭔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도지혁은 망설임 없이 방한나의 뒤를 따라갔고,

“쯧.”

다른 사람들과 함께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설주희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차며 불평을 토로했는데.

“저년 저거, 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는데…. 기어코 사고를 치네.”

“…그러게.”

옆에서 나란히 지켜보고 있던 홍유라도 드물게 설주희의 의견에 동조하며 못마땅하단 눈빛을 띠었다.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건방진 후배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러나저러나 설주희와 홍유라는 절친한 사이가 틀림없었다.

*

“한나야! 잠깐 멈춰봐!”

방한나는 뒤에서 들려오는 도지혁의 목소리에 더더욱 눈물을 쏟아내며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겼다.

‘멍청이…. 멍청이…!’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못난 행동을 하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고작 사귄다는 이야기를 듣고 혼자 무너져서 다짜고짜 도망친다니.

심지어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던 내용이었음에도 견뎌내지 못했다.

과연 인생에서 이보다 더 끔찍한 순간이 있을까?

‘진짜 죽어버리고 싶다….’

애써 끌어올렸던 자존심과 자존감이 와르르 쓰러지고, 부끄러움과 수치스러움. 그리고 끝없는 자괴감과 자기혐오에 빠져든다.

해일처럼 몰려온 부정적인 감정에 잠겨버린 채로, 손을 부르르 떨어대며 본부 밖을 빠져나가려는 그 순간.

쿵─!

무언가가 방한나를 와락 덮쳐왔다.

“잡았다.”

도지혁이었다.

“아….”

눈물을 훌쩍이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방한나는 코앞에서 자신을 내려다보던 도지혁과 시선을 마주치고 말았고,

“…!”

그 와중에 자신의 얼굴이 엉망이라는 걸 깨닫곤 황급히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여버렸다.

이미 못난 모습을 다 보여주긴 했으나, 추한 꼴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게 여자의 마음.

하지만 그런 여자의 마음을 알아줄 도지혁이 아니었다.

“한나야.”

혹여 또다시 도망칠까 꽉 끌어안은 그는, 남은 손으로 방한나의 손을 치워내며 말했다.

“나 봐.”

“…아, 안 돼요…!”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하자.”

“시, 싫어요…!”

“어서 고개 들어.”

무게를 잡듯 한껏 낮아진 도지혁의 목소리.

‘…멍청이…멍청이….’

그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아챈 방한나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꽉 깨물며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보았다.

“…….”

벽 너머로 들려오는 스탭들의 분주한 소음.

간이로 만들어진 사각에 숨어든 도지혁과 방한나는 마치 세상과 동떨어진 것처럼, 서로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한나야.”

“…….”

“방한나.”

“…네….”

잔뜩 잠긴 목소리로 애써 대답하는 방한나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건강미 넘치는 뽀얀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있었으며, 앙다문 입술엔 억울함과 부끄러움이 잔뜩 담겨있었다.

‘얘는 울어도 예쁘네.’

하지만 도지혁은 그런 방한나의 모습마저도 귀엽게 느꼈고,

조심스레 몸을 놓아주곤 얼굴에 들러붙은 머리카락을 슥 넘겨주며 차분하게 물었다.

“네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무슨 일인지 설명해줄래?”

“…그, 그게….”

그러자 방한나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더니, 자신의 실수를 얼버무리려 했는데….

“…아, 아무것도…. 읏….”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이겨내지 못하고 결국, 진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프로듀서님이…. 아까…. 싸울 때…. 여자친구라고….”

“…어?”

그제야 자초지종을 알아챈 도지혁.

‘세상에….’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이유에 내심 탄식하며 조심스레 할 말을 골라보았다.

“…그게 그렇게 충격이었어? 나랑 설주희랑 사귀는 게?”

“…네….”

이해가 전혀 안 되는 내용은 아니었다.

호감을 품고 있던 사람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연인이 바뀐 거니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크나큰 영향을 끼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도지혁으로선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방한나를 위로할 줄 순 없는 일이었다.

동정심으로 위로받는 것만큼 비참한 게 없기에.

여기서 방한나를 위로한다면 외려 그녀에게 독이 될 게 뻔했다.

“한나야.”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한동안 고민하던 도지혁은, 짐짓 단호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밝히게 돼서 미안해. 나…, 설주희랑만 사귀는 거 아니야.”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흔들리는 방한나의 눈동자.

도지혁은 막상 말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굴리더니, 이내 애써 당당한 말투로 자신의 쓰레기 짓을 밝혀냈다.

“유라랑도 같이 사귀고 있어.”

“…네?”

“두 사람도 동의한 내용이고, 설명하긴 복잡하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런 관계로 이어져 있어.”

설마 했던 하렘 선언에 말문이 막혀버린 방한나.

동그랗게 뜨인 그녀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던 도지혁은, 스멀스멀 기어오르려는 죄책감을 억지로 짓밟으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날 얼마나 좋게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원래 이런 사람이야.”

물론 그녀는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널 가지고 놀았다고 해도 할 말이 없어. 틀린 말은 아니니까.”

설령 그게 진짜라 해도, 단단히 씐 콩깍지를 벗겨 낼 순 없었다.

“이번 일로 나한테 실망했으면 미안한데, 나는 여전히 네가 필요해. 아무리 내가 싫어졌다고 해도 절대 널 놔줄 수가 없어.”

“…제, 제가…. 필요하다고요…?”

분명 심한 언사였으나, 그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게 기쁜 듯 조심스레 되물어오는 그녀.

도지혁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이판사판으로 아예 거부할 수 없는 미끼를 던져버렸다.

“나는 네가 없으면 안 돼. 그러니까…. 네가 괜찮다면, 너랑도 사귀어 줄게.”

이보다 더 구제 불능 쓰레기 같은 대사가 있을까.

그러나 이미 도지혁에겐 뒤가 없었다.

당장 방한나는 진서원과 함께 짝을 이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하기에.

어차피 황금 시계도 있겠다, 그는 세상을 구할 수만 있다면 더한 쓰레기가 될 수도 있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데이트도 하자.”

“…읏….”

갑작스러운 연애 빙자 사기에 당해 혼란스러워진 방한나.

“한나야.”

전투 준비로 한시가 급했던 도지혁은 방한나의 손을 붙잡으며 은근히 대답을 독촉했고,

‘아….’

손을 감싸오는 따뜻한 촉감에 마음이 흔들린 방한나는, 죽었다는 생각으로 냅다 한가지 조건을 들이밀었다.

“…그, 그러면…. 키, 키스해주세요…!”

“…키스?”

“사, 사귀는 사이라면…! 사랑한다면 할 수 있잖아요…!”

무릇 연인이라면 흔히 하는 행위였지만, 가슴 한편에 로망을 지닌 방한나에게 있어서 키스는 그 무엇보다 매우 중요한 의식이었다.

‘여, 역시 키스는 좀 그런가…?’

그 순간.

“웁…!”

두 사람의 입술이 맞닿았다.

“!”

자연스레 머리와 허리를 감싸며 몸을 밀착시키는 도지혁.

“츕…츄룹…쯉….”

방한나는 능숙하게 입안을 헤집는 그의 행위에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혀, 혀가…! 혀가아…!’

그렇게 한참을 희롱하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을 떼어낸 도지혁은, 흐물흐물 녹아버린 방한나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오늘은 바쁘니까, 여기까지. 괜찮지?”

“…네, 네에….”

대체 바쁘지 않으면 얼마나 더 대단한 걸 해주는 걸까.

이윽고 조심스레 그녀를 놓아준 도지혁은 슬쩍 미소를 지으며 사랑스럽다는 듯 방한나의 얼굴을 슬쩍 쓰다듬었고,

‘…도, 도망치길 잘했다…!’

그녀가 내심 울면서 도망치길 잘했다며 스스로의 행동을 칭찬하던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궁………

건물 바깥에서 커다란 굉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게이트 발생의 징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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