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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32화 (132/165)
  • 제 132화

    계획 (1)

    박해린과의 통화가 끝난 후.

    “나, 어디 좀 다녀올게.”

    보호자 대기실로 돌아간 나는, 기다리고 있던 설주희와 홍유라에게 양해를 구했다.

    “어? 갑자기?”

    “급한 일이라, 바로 가봐야 할 것 같아.”

    “이 주말에 어디를 가는데? 나랑도 데이트해야지!”

    “미안. 오늘은 안될 것 같으니까, 다음에 하자.”

    영문을 알 길이 없던 홍유라와 설주희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여왔고,

    ‘아린이는….’

    굳게 닫힌 병실 문을 흘끔 바라보던 나는, 이내 미련과 함께 시선을 거두고 두 사람에게 당부의 말을 전했다.

    “휴대폰 꼭 켜두고, 혹시 어디서 연락 오면, 나한테 바로 알려줘. 알았지?”

    “무슨 일인데…?”

    “…심각한 일이야?”

    그러자 두 사람은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듯, 사뭇 진지한 태도로 물어왔는데….

    이걸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짧게 고민하던 나는, 어차피 조만간 두 사람에게도 설명해야 할 때가 올 거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다음을 기약했다.

    “설명하자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 당황스러울 수 있지만, 조금만 기다려줘.”

    “…일단, 알겠어.”

    “너…, 여자야?”

    귀신 같은 촉으로 여성 문제임을 눈치챈 설주희.

    마왕과 사천왕이 여성이긴 하니, 엄연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거 아니야. 아. 내가 예전에 사줬던 미니 인벤토리 아직 안 버렸지?”

    “미니 인벤토리…? 그 장비 넣고 다니는 아이템?”

    “당연히 안 버렸지. 근데 그건 갑자기 왜 찾는데?”

    “다행이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서 거기다 장비 다 넣어두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녀.”

    “어…. 갑자기?”

    “그걸 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문스러운 눈빛을 보내오는 두 사람.

    나는 설주희가 선물한 손목시계를 흘끔 바라보았다.

    ‘바로 내려가면 3분….’

    박해린이 보낸 차가 곧 도착할 시간이었다.

    “얘들아.”

    시간이 없다는 걸 인지한 나는, 두 사람의 손을 덥석 붙잡으며 진지하게 부탁했다.

    “일단 그렇게 해줘.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아린이 것도. …부탁할게.”

    “너….”

    “…….”

    설주희와 홍유라는 내 진심을 알아챈 듯 별다른 말을 꺼내오지 않았고,

    “…연락할게.”

    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다급히 대기실을 나섰다.

    *

    국정원 본부는 다행히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했다.

    “이쪽입니다.”

    박해린이 보낸 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지하의 숨겨진 곳으로 들어서자, 연구소를 방불케 하는 낯선 장비들이 가득한 장소에 다다랐는데….

    ‘여기가….’

    원작 속에 수차례 묘사됐던 국정원 본부를 떠올린 나는 이곳이 원작에서 등장하던 장소임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고,

    ‘…내가 여길 오게 되다니….’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으며 주변을 천천히 두리번거리던 그때.

    “지혁 씨!”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운 얼굴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진짜 연락 안 닿을까 싶어서 얼마나 고민했는지….”

    “아닙니다. 그보다, 상황은 어때요?”

    “아, 네! 그게….”

    박해린과 만난 나는 그녀로부터 전반적인 상황을 듣게 됐는데….

    “아니,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다고요?”

    “네, 네…. 위쪽에서도 아직 확신을 못 한 거 같아서….”

    일단 마족에 관한 건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그렇게 위험성을 설파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마족의 정체를 공표하는 걸 고민하고 있던 것이다.

    ‘설마 했는데….’

    원작에서도 이런 답답한 흐름으로 흘러갔기에 혹시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위쪽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말았다.

    ‘거지 같은 작가 새끼….’

    대책을 세우라고 증거를 통째로 갖다 바쳤는데, 여태껏 우물쭈물하고 있는 게 말이나 되는가?

    괜히 답답한 전개를 써 내린 원작의 작가를 씹어대던 나는, 가까스로 차분함을 되찾으며 가장 중요한 내용을 물어보았다.

    “서해는 어떻답니까?”

    바로 세 번째 사건에 관한 이야기였다.

    “꽤 커다란 마력 파동이 감지됐는데….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대피령은요?”

    “인근 해상 작업만 전면 금지시켰고, 다른 건 아직이요. 그쪽 기관에서 단순한 돌발성 게이트로 취급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이쪽도 상황이 좋지 않은 건 매한가지.

    위쪽에서 마족에 관한 걸 받아들이지 못한 덕분인지, 서해에 관한 대책이 거의 전무한 수준이었다.

    ‘진짜 아무것도 모르고 그대로 처 맞았으면….’

    정말 순식간에 모든 게 엎어졌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순간 간담이 서늘해진 나는, 침을 꼴깍 삼키며 보험이나 다름없는 황금 시계의 존재에 조용히 감사를 보냈다.

    “해린 씨. 이번 게이트는 분명 엄청 크게 터질 겁니다. 절대 단순한 게이트가 아니에요.”

    “전에 터졌던 게이트랑 비슷한 수준일까요?”

    “훨씬 더 규모가 클 겁니다.”

    “훠, 훨씬 크다고요…?”

    상황의 심각함을 제대로 알아챈 듯 얼굴을 굳히는 박해린.

    나는 긴장을 풀어주고자 그녀의 팔뚝을 툭─ 쳐주며 간단히 계획을 설명했다.

    “제대로 막으면 문제없어요. 일단 마족의 존재를 사람들한테 알려야 하고…. 방어 인력을 모아야 해요.”

    “어…, 저희가요?”

    “네.”

    “마족을 어떻게….”

    “해린 씨. 동영상 편집 좀 할 줄 아세요?”

    “…네?”

    그렇게 박해린의 부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리며 필요한 업무를 할당한 뒤.

    ‘일단….’

    나는 10년 동안 쌓아온 연락처를 뒤져, 지인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 갑자기 무슨 일이야? 직접 전화를 다 하고. ]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매혹적인 목소리.

    “혹시 지금 바빠?”

    가장 먼저 찾은 건 이혜리였다.

    [ 아니, 괜찮아. 무슨 일인데? ]

    “네 도움이 필요해서.”

    [ …내 도움? ]

    “응. 지금 당장.”

    세진 길드의 단장이자 세진 그룹 회장의 손녀인 이혜리는 사회적으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사실상 그녀가 이번 작전을 좌지우지할 열쇠라 표현해도 절대 과언이 아니다.

    “당황스러울 수 있겠지만, 진지하게 들어줘. …지금 게이트에서 넘어온 마족들이, 한국에 쳐들어오고 있어.”

    [ …혹시 내가 잘못 들은 거니? 마족? ]

    예상했던 대로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혜리.

    “제대로 들은 게 맞아. 내가 얼마 전에 가평 S급 게이트에서 마족들의 침공 흔적을 확인했어. 국정원을 통해서 자료를 넘긴 상황인데, 위쪽에서 안일하게 방관하는 중이야.”

    그녀를 설득하기 위해, 나는 차분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료는 얼마든지 넘겨줄게. 아니, 직접 보여 줄 수도 있어. 늦으면 하루, 빠르면 몇 시간 안에 서해에서 초대형 게이트가 열려. 그 속에서 마족들하고 괴수들이 떼거리로 몰려올 거고, 제때 막아내지 못하면 인천부터 순식간에 사라질 거야.”

    내 이야기에 가정은 없다.

    원작 속에선 모두 실제로 벌어진 일이기에.

    “…혜리야. 내가 이런 걸로 장난하는 사람 아닌 거 알지?”

    [ …그건 아는데…. ]

    “더 늦기 전에 마족의 존재를 세상에 알려야 해.”

    [ ……. ]

    “…제발 도와줘.”

    이혜리는 생각에 잠긴 듯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다짜고짜 전화해서 마공이니 침공이니 지껄이고 있으면 당연히 혼란스럽겠지.

    아무리 게이트와 초능력이 존재하는 세상이라 해도, 믿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 …하아…. ]

    스피커 너머로 무거운 한숨 소리가 들려온다.

    [ …나도 미친년이지…. ]

    들릴 듯 말 듯 희미하게 책망 섞인 혼잣말을 내뱉던 그녀는….

    [ 그래서…, 내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니? ]

    마침내 내게 손을 내밀어 주었다.

    ‘됐다…!’

    비로소 10년을 쌓아온 계획이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

    몇 시간 뒤, 팀 서울시청 숙소.

    [ 아! 장난치지 말고, 빨리 짜장면 주세요!! ]

    출연진이 진심으로 화를 내자, 시청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렇게 TV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지만, 소파에 앉아있던 방한나의 입꼬리는 일말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아….”

    즐겁기는커녕 점점 더 심란해지는 마음에 무거운 한숨만 푹푹 내쉬던 그때.

    “…언니.”

    소파 끝에 누워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던 진서원이 한쪽 이어폰을 빼내며 말을 걸었다.

    “왜….”

    “…무슨 일 있어?‘

    방한나는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이 심란한 이유에 진서원도 상당한 지분을 차지했기에.

    상대가 김나래였으면 모를까, 차마 그녀에겐 미주알고주알 넋두리를 풀어낼 수가 없었다.

    “아니….”

    “…진짜?”

    “아무 일도 없다니까…?”

    “…왜 화내?”

    “화 안 냈어.”

    “…내고 있는데?”

    “이건 화낸 게 아니라…!”

    잔뜩 예민해있던 방한나는 순간 끓어오른 짜증에 큰소리를 치고 말았는데….

    ‘…이게 뭐하는 짓이지….’

    괜히 화풀이한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하아…. 화낸 거 맞아. …미안해….”

    “…괜찮아.”

    ‘서원이한테 괜히 짜증이나 부리고…. 이게 뭐하는 짓이지…. …진짜 죽고 싶다….’

    그렇게 방한나가 점점 치닫는 자기혐오와 자괴감에 시달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언니.”

    한참 동영상을 시청하던 진서원이 벌떡 몸을 일으키곤, 이어폰을 빼내며 방한나에게 말을 건넸는데….

    “왜….”

    “…이거, 오빠 아냐?”

    “…어?”

    방한나는 진서원이 건네온 휴대폰을 보곤 살짝 놀라고 말았다.

    눈에 띄는 초록색 배경에 앉아있는 한 남자.

    채널 이름은 유명 크리에이터의 것이었지만, 동영상 속에 앉아있는 건 틀림없는 도지혁이었다.

    “프로듀서님 맞는데…? 이게 뭐야?”

    “…몰라. 갑자기 떴어.”

    “뭐…?”

    바로 그때.

    띵동─

    굴러다니던 방한나의 휴대폰에 SNS 알림이 울렸다.

    “응?”

    방한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집어 알림 내용을 확인해보았고,

    [ @Team_SeoulCity 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

    뜬금없이 팀 서울시청 공식 SNS에 올라온 동영상을 발견하였는데….

    “프로듀서님…?”

    [ 국가정보원, @Sejin, @100il, @official_seoul 그리고 수많은 헌터들이 함께합니다. 모두 힘을 모아, 세계를 지켜 주세요. ]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장과 함께, 진서원의 휴대폰에서 본 것과 똑같은 도지혁의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이게 대체 뭐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방한나는 별생각 없이 손가락을 옮겨 동영상을 재생해보았고,

    [ 안녕하십니까. 지난 10년간 퀸즈의 프로듀서를 담당했고, 현재 팀 서울시청의 프로듀서를 맡고 있는 도지혁이라고 합니다. ]

    마치 경력을 읊는 듯한 인사에 이어 곧장 튀어나온 내용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 본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이 위험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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