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31화 (131/165)

제 131화

반란 (5)

꿈을 꿨다.

이게 꿈이라는 걸 인지하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꿈속에 있었다.

“하….”

세 번째 사건인 서해 침공을 앞둔 꿈속의 나는, 어느 게이트 속 거대한 동굴에 서 있었다.

동굴 내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생물체로 가득 메워져 있었는데….

‘사람…인가.’

곳곳에 번식용으로 추정되는 인간들도 보이는 게,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원작 속에서도 등장하지 않았던 마왕군의 숨겨진 전진 기지였다.

“이딴 곳을 숨겨뒀구만?”

단편적인 정보만 흘러들었기에 어떻게 꿈속의 내가 이런 정보를 알아냈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확실히 마왕군의 전진 기지.

말 그대로 원작과 달라진 전개에서 파생된 새로운 변수였다.

‘…이게 미래라면….’

나는 앞선 꿈들의 사례를 떠올리며, 이 상황이 실제로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이 전진 기지가 세워진 게이트를 어디서 찾느냐는 것.

더군다나 이런 거대한 공간이 숨겨진 게이트를 찾는 건 사실상 사막에서 바늘 찾기에 가깝다.

‘위험한데….’

그렇게 최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주변을 눈여겨보던 그때.

“겁도 없이 혼자 쳐들어오다니. 용기가 가상하구나.”

동굴 안쪽에서 들려오는 관능적인 목소리.

“용기가 가상한 건 내가 아니라 너겠지.”

꿈속의 나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처럼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폭언을 쏟아 부었는데….

“직접 안 오고, 따까리들만 보내는 걸 보니…. 마왕년이 아직 정신을 덜 차렸구만.”

“마, 마왕년…?! 가소로운 벌레 주제에…! 감히 마왕님을 모욕해!?”

도발에 걸린 마족은 발끈하며 곧장 모습을 드러냈다.

“이 건방진 놈…!”

마치 서큐버스를 연상케 하는 특유의 푸르스름한 피부와 폭발적인 몸매.

한 손에 눈동자 같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들고 있던 그녀는 지팡이로 꿈속의 나를 겨누며 빽 소리를 질렀다.

“네놈을 반드시 노예로 만들어, 마왕님께 직접 진상하겠다!”

마왕군 사천왕, ‘차분한 마리’의 등장이었다.

‘셋째인가.’

원작 설정을 꿰고 있던 나는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고,

“역시 셋째였구만.”

마찬가지로 정보를 꿰고 있던 꿈속의 나도 묘하게 밋밋한 검을 치켜들었다.

그 순간.

꾸우욱─

부드러운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는 감각이 느껴졌다.

‘어, 잠깐…!’

나는 최대한 정보를 캐기 위해 꿈에서 깨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보았으나….

“핫…!”

결국, 눈이 뜨여버리고 말았다.

“우으응….”

귓가에 홍유라의 웅얼거림이 들려온다.

들러붙길 좋아해서 그런지, 그녀는 잠결에 찰싹 엉겨오며 온몸을 부딪쳐왔고,

일말의 저항 없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맨살에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잠시 잊고 있던 현실로 돌아와 버리고 말았다.

“…하아….”

그렇게 잠에서 깨어난 뒤.

홍유라가 욕실에 들어가 있는 동안, 나는 정신을 차릴 겸 거실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상황을 곰곰이 정리해보았다.

“…….”

홍유라와 했다.

그것도 엄청 많이.

지금껏 이렇게 혼이 쏙 빠질 정도로 만족스러운 잠자리를 경험해본 적은 손에 꼽았다.

아마 설주희가 보고 있었다면 질투심을 불태우며 화를 냈으리라.

“후….”

물론 후회는 없다.

후회하기엔 너무 즐겨버렸기에.

외려 이런 식으로 홍유라와 설주희를 제어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아니, 이거 진짜 괜찮은 거 같은데….’

아직 검증 단계이긴 하나, 그 야생마 같았던 설주희도 잠자리를 가진 후엔 얌전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격적인 언행은 천성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어도, 돌이켜보면 지난 10년을 통틀어 가장 다루기 편한 수준.

물론 홍유라야 평소에도 얌전했으니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지난 밤을 기점으로, 확실하게 내 편으로 돌아선 느낌이었다.

‘이게 정답이었나…?’

그렇게 지금껏 고수해온 팀 관리 방식에 의문을 느끼며 멍하니 커피를 홀짝일 즈음.

“커피 마셔?”

머리에 수건을 걸친 홍유라가 거실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크네….’

그리 해대고도 기력이 남았는지, 그녀의 얇은 옷차림을 보고 있자 자연스레 하반신에 힘이 들어갔다.

“크흠….”

나는 애써 그녀의 몸에서 눈을 돌리곤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며 미리 만들어둔 커피를 건네주었다.

“네 것도 해놨어.”

“아…. 고마워.”

호로록 커피를 들이켜는 소리가 잔잔하게 울려 퍼진다.

식탁에 마주 앉아 촉촉이 젖은 홍유라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짐짓 무게를 잡으며 말을 꺼냈다.

“유라야.”

“응?”

“혹시 해서 말하는데. 어젯밤은 어제로 끝난 거야.”

“…뭐?”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찡그리는 그녀.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숨을 고르곤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 관계는 똑같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그러니까, 혹시….”

“알았어.”

“…어?”

이미 내 의도를 눈치채고 있던 걸까, 그녀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해왔는데….

“네가 원할 때만 찾아도 좋아. 그대신…. 버리지만 말아줘.”

“…진심이야?”

“진심이야. 난 두 번째여도 좋거든. …첫 번째면 더 좋겠지만….”

차라리 설주희처럼 뻔뻔하게 나오면 모를까, 이렇게 밑도 끝도 없이 순종적인 모습을 보이자 되려 내가 못할 짓을 하는 기분이었다.

‘스읍, 이거 괜찮나….’

그렇게 아릿한 죄책감을 느끼며 조용히 커피를 홀짝이던 그때.

우우웅─ 우우웅─

테이블에서 충전 중이던 홍유라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주희네?”

“설주희?”

누군가 했더니, 하필 설주희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어, 잠깐. 이거 괜찮나…?’

유독 질투심이 강한 설주희에게 이 상황을 걸려도 괜찮을지 고민하던 그 순간.

“여보세요?”

잠시 내 눈치를 살피며 고민하던 홍유라가 대뜸 스피커로 바꿔서 전화를 받아버렸다.

[ 너, 어디야? ]

카랑카랑 울려 퍼지는 설주희의 목소리.

자리를 비울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이내 숨을 죽인 채로 두 사람의 통화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집이지. 무슨 일인데?”

[ 나, 지금 병원이야. ]

“…병원? 어디 아파?”

‘…어? 병원?’

생각지도 못한 발언에 놀란 홍유라와 나는 조용히 시선을 마주쳤고,

[ 그건 아니고. 아까 임아린 씨발년 좀 놀려주러 왔는데…. ]

뒤이어 울려 퍼지는 설주희의 목소리에 경악하고 말았다.

[ 이 미친년이 현관에 쓰러져있잖아. ]

*

국정원 본부.

여러 가지 모니터와 용도를 알 수 없는 전자 장치들이 가득한 방.

마족에 관한 정보를 무사히 상부에 전달한 박해린은 그새를 못 참고 새로운 임무를 찾고 있었는데….

“으음….”

그녀는 여러 이유로 우선순위에서 밀린 사건 중에서 눈에 띄는 사건을 조사하고 있었다.

“실종 인원만 9명….”

최근 경상도에서 잇따라 벌어진 게이트 조사반 실종 사건이었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마족에 관한 정보를 접했던 박해린은 이 사건이 뭔가 미심쩍다는 의심을 품었다.

게이트 속 미개척 지역을 조사하는 건 유독 사고율이 높은 분야.

그 과정에서 낮은 랭크로 평가된 게이트가 상위급으로 격상되는 일도 있기에, 이번에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던 상위급 괴수에게 당했을 확률이 높았으나….

“실종자들이 왜 무전을 쳤을까….”

박해린은 앞서 실종됐던 조사반이, 추가 인력 지원을 불렀다는 점에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고 말았다.

‘기록도 없고…. 대체 뭐지?’

그렇게 그녀가 조사반에 관한 정보를 뒤지며 머리를 싸매고 있을 즈음.

뚜루루루───

갑자기 박해린이 앉아있던 자리 근처에 놓인 전화기가 울리기 시작했다.

“!”

마족에 관한 이야기라는 걸 직감한 그녀는 자료를 내팽개치곤 다급히 전화를 받아보았다.

“바, 박해린 전화받았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내용이 아닌 듯, 수화기를 든 그녀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는데….

“…네?”

일순간 그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서, 서해에…. 게이트 징후요…?”

이윽고 그녀는 알겠다는 말과 함께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

자리로 돌아와 펼쳐놓았던 자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스윽─

그대로 자료를 한쪽에 치워둔 뒤, 구석에 굴러다니던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다.

*

홍유라와 함께 다급히 병원으로 향한 우리는 곧장 설주희와 대면했다.

“설주희! 임아린은?”

“…뭐야. 왜 도지혁이 같이 있어?”

설주희는 나를 보곤 어딘가 떫은 듯한 반응을 보여왔는데….

“홍유라…. 너 그걸 바로 일러바친 거야!?”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 너. 설마, 했어?”

“…….”

눈치 빠른 그녀는 내가 홍유라와 데이트했다는 걸 알아차린 듯 내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왔고,

“그래서, 임아린은?”

나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뒤로한 채, 임아린에 관한 이야기부터 물었다.

“많이 안 좋대? 의사는 뭐라고….”

“흐응…. 그렇게 걱정돼?”

“…뭐?”

“네 인생 내 인생 죄다 망친 썅년이 그렇게 걱정되냐고.”

“…설주희.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뭐가 안 중요해! 너, 내가 왜 저년 안 죽이고 살린 지 알아? 저 씨발년 눈에서 피눈물 나는 거 보려고 직접 병원까지 데려온 거야! 근데 네가 그딴 식으로 나오면 안되지!”

“너….”

“얘들아. 여기 병원이야. 이제 그만해.”

우리는 홍유라가 끼어든 덕분에 가까스로 다툼을 멈추었고,

“도지혁 너, 지금 내 남자친구야. 임아린이 아니라, 내 남자라고. 내가 옆에서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볼 거니까…. 행동거지 조심해.”

설주희의 살벌한 경고와 함께 겨우겨우 임아린이 입원한 병실로 들어설 수 있었다.

드르륵─

문을 열자 화악 풍겨오는 특유의 소독약 냄새.

고급스럽게 꾸며진 단독 병실로 들어서자, 익숙한 향기가 코끝에 스쳐 지나갔다.

임아린의 향수 향기다.

나는 괜히 무거워진 마음에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침대로 조심스레 다가가 보았고,

비로소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었다.

“…….”

얇은 팔에 주렁주렁 수액을 꽂은 채로 곤히 잠든 그녀.

항상 잘 관리되어 좌르르 윤기가 흐르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했으며,

안 그래도 얇고 가녀렸던 그녀의 몸은 안쓰러울 정도로 메말라 보였다.

누가 봐도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하아….”

착잡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쉬며 무심코 앞머리를 넘겨주려던 그때.

“…뭐하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설주희가 나지막이 경고를 보내왔다.

“아니, 그냥 머리카락이….”

“근데. 그걸 왜 네가 만져줘?”

“그냥….”

“…그건 내가 봐도 좀 아닌 거 같아, 지혁아.”

무심코 변명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변호하려 했던 나는, 현 여자친구들의 주장에 조용히 손을 거두고 말았다.

‘미치겠네….“

그녀의 얼굴만 확인하고 병실을 나온 우리는, 병실에 붙은 보호자 대기실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비약 중독?”

임아린의 정확한 병명은 비약 중독.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비약을 너무 많이 복용하여 몸이 제대로 망가진 거라고 한다.

“아린이가 대체 왜….”

“뻔하지. 그 좆 같은 환영 마법으로 자위하다 마력 부족하니까….”

“야, 설주희. 제발 말 좀 곱게 해.”

“…도지혁. 지금 여친 앞에서 전 여친 편드는 거야?”

“편드는 게 아니라…!”

“뭐가 아니…!”

“얘들아, 그만.”

그렇게 설주희와 투닥거리길 반복하며 어찌어찌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

우우웅─ 우우웅─

품 속에 넣어뒀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나 전화 좀.”

나는 양해를 구하며 잠시 대기실을 빠져나가, 텅 빈 복도에서 전화를 확인해보았고,

“…박해린?”

뜻밖의 연락에 놀라며 재빨리 전화를 받아보았다.

그리고….

“여보세….”

[ 도와주세요. ]

“…네?”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다짜고짜 도움을 요청하는 그녀의 말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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