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29화 (129/165)

제 129화

반란 (3)

‘작전은 좋았는데….’

도지혁은 당해버린 진서원을 바라보며 아쉬움에 입술 끝을 깨물었다.

팀 서울시청은 일반적인 팀들과 달리, 한 사람이라도 빠지면 제 기능을 못하는 극단적인 팀이다.

거기에 딜링을 전담한 진서원이 탈락해버렸으니, 서울시청의 패배는 시간문제.

어쩌면 설주희와 승부했을 때보다 훨씬 더 안 좋은 기록을 낼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나….’

도지혁은 팀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스스로의 선택을 살짝 후회했다.

그가 막고자 하면 얼마든지 막을 수 있었다.

어쨌든 팀의 관리자이니, 마음만 먹으면 무슨 핑계를 대든 승부를 막을 수 있었단 소리다.

하지만….

그는 멤버들을 존중해주었고,

그 존중의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었다.

촤아아아아악────!!!

미처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거침없이 내려치는 홍유라의 공격.

“큿…!”

방한나는 진서원의 탈락에 아쉬워할 새도 없이, 허겁지겁 방패를 치켜들며 홍유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터어어어엉─────!

아슬아슬하게 비스듬히 쳐낸 홍유라의 공격은 원래 힘의 일부분밖에 전달되지 않았는데,

그 일부분으로도 팔이 저릿한 게, 마치 거대한 괴수를 상대하는 것 같았다.

“여, 여기다!!!”

그때, 홍유라의 주의를 돌리려는 듯 멀리 떨어져 있던 김나래가 고성을 지르며 공격을 퍼부었다.

후우우웅─── 후우웅───

여러 방향에서 쏟아지는 불덩이들과 날카로운 바람들.

“…….”

홍유라는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김나래의 공격을 모두 피해냈고,

스윽─

검을 치켜들고 시선을 옮겨 김나래를 바라보더니….

“…!”

순간 살을 에는 살기를 뿜어내며 가볍게 검을 휘둘렀다.

사아아악──

그 순간.

촤아아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투명한 칼날들이 쏟아지며 김나래를 난도질해버렸다.

“컥…!”

“나, 나래 언니…!”

빈틈을 이용하여 거리를 벌린 채로 김나래의 탈락을 바라보던 방한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홍유라를 바라보았다.

무방비하게 검을 내린 채로 지그시 시선을 보내오는 그녀.

마치 승리를 당연히 여기던 설주희에게선 느끼지 못한, 알 수 없는 집념이 느껴졌다.

그녀는 진심이었다.

‘무, 물러서면 안 돼…!’

그럼에도 방한나는 방패를 꼭 움켜쥐며 홍유라와 맞섰다.

이 승부는 4분을 버티면 승리한다.

즉, 얼마나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든지, 버티기만 하면 이기는 것이다.

“절대 프로듀서님은 넘겨드릴 수 없어요!”

그런 방한나를 조용히 바라보던 홍유라는, 문득 시선을 옮겨 부스 바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도지혁이 있었고, 그의 모습을 확인한 홍유라는 다시 시선을 거두어 방한나를 바라보았다.

‘꽤…, 많이 아끼나 보네.’

그녀는 도지혁이 방한나를 유독 아낀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방한나도 자신과 같이, 잔 생각이 많아 자주 신경 써줘야 하는 타입이리라.

‘…기분 나쁘네.’

홍유라는 순간 끓어오른 질투심에 무심코 이를 갈았다.

그동안 참아왔을 뿐이지, 원래 그녀의 질투심은 설주희 못지않은 편.

전투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홍유라는, 천천히 발걸음을 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뭔가 착각하는 거 같아서 말하는데…. 지혁이는 원래 우리 거야.”

“…프, 프로듀서님은 퀸즈가 아니라, 서울시청 소속이에요!!”

물론 쉽게 물러설 방한나가 아니었고,

“…건방지네….”

홍유라는 당돌한 후배의 말에 나지막이 반응하며 달려들었다.

*

얼마 후.

평화로운 주말 아침.

“어서 와.”

이른 아침부터 외출 준비에 나선 나는, 홍유라의 오피스텔에 왔다.

앞선 승부의 보상을 지불하기 위함이었다.

‘묘하게 옷차림이 얌전하네.’

목을 살짝 덮는 검은색 나시에 적당히 몸매를 강조하는 치마.

마치 막 결혼한 새댁 같은 느낌으로 날 맞이해 준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사뭇 얌전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덥지? 오는데 차 안 막혔어?”

“그냥, 뭐….”

“고생했어. 짐은 이리 줘, 내가 안에 둘게.”

그렇게 홍유라가 짐을 받아 쪼르르 집안으로 사라진 사이.

자연스레 신발을 벗고 입구 옆의 부엌으로 들어선 나는, 시원한 물을 따라 마시며 그녀의 요구를 떠올려보았다.

‘집 데이트라….’

앞서 팀 서울시청과의 승부에서 승리한 홍유라는, 내게 집에서 같이 하루를 지내달라고 요구해왔다.

그녀가 워낙 유명하기도 하고 남다른 외모를 지닌 덕에 사람이 많은 곳을 썩 좋아하지 않아서 이해가 되는 부분이었다.

‘뭔가 있는 거 같은데.’

물론 의심스럽긴 하다.

왠지 모르게 멀쩡한 옷차림도 그렇고, 특별한 조건이 없는 것도 그렇고, 분명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는 느낌이었다.

“밥은 먹었어?”

그때, 짐을 놓고 돌아온 그녀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대충 때웠어. 점심에 먹으려고.”

“잘 됐다. 내가 맛있는 거 해 줄게.”

“…그러던가.”

“일단 편한 옷으로 갈아입을래?”

“…옷? 나 옷 안 챙겨왔는데.”

“괜찮아, 내가 그럴 줄 알고 미리 사뒀어.”

‘옷까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순순히 홍유라의 말을 따라, 옷을 갈아입기 위해 안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준비한 옷은 헐렁한 반바지에 가벼운 반소매 티셔츠.

예상과 다르게 정말 흔하고 평범한 조합이었는데….

약간 특이한 점이 있다면, 바지가 너무 얇고 허리의 고무도 묘하게 약해서 조금만 미끄러져도 스르륵 벗겨질 것 같았다.

“다 갈아입었어?”

“응. 생각보다 무난하네.”

내 반응이 우습다는 듯 입가를 가리곤 쿡쿡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내가 무슨 이상한 옷을 준비했을까 봐?”

“…의심 안 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난 그런 취향 아니니까, 걱정 안 해도 돼.”

홍유라는 자신의 취향이 평범하다며 뻔뻔하게 너스레를 떨었는데….

솔직히 퀸즈의 모두를 상대해본 나로선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따로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렇게 옷까지 모두 갈아입은 후, 나는 적당히 거실에 자리를 잡으며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물어보았다.

솔직히 이렇게 맞춰 줄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이번 일은 그녀를 위한 일종의 보상.

설주희 때처럼 끌려가지 않으려면, 미리 선수를 쳐서 주도권을 쥐고 그녀를 만족하게 하는 쪽이 훨씬 낫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으음….”

홍유라가 내 질문에 천천히 눈을 굴리며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더니.

“딱히 하고 싶은 건 없어. 그냥 편하게 있어도 돼.”

별로 원하는 게 없다며, 말 그대로 편안하게 지내달라고 말해왔다.

“…진짜?”

물론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생각은 없다.

이전에도 비슷한 케이스로 당한 경우가 있기에.

“응. 아니면…. 따로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어?”

“혹시 네가 하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도 돼. …뭐든지.”

“아니, 나도 없는데….”

하지만 홍유라는 정말 이번엔 그저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게 목적이라는 듯, 별다른 걸 요구하지 않았고,

‘어, 진짜로…?’

우리는 정말로 나란히 앉아 TV를 보며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기 시작했다.

[ 틀렸습니다! ]

[ 와아악! 이게 왜 틀려?! ]

“큭큭….”

TV속 출연진의 우스운 모습에, 입가를 가리곤 우아하게 웃음을 흘리는 그녀.

최근 어지러운 모습만 봐서 그런가, 오늘따라 얌전한 그녀의 모습에 왠지 더더욱 시선이 끌렸다.

“…….”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홍유라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이랬다.

나란히 앉아 TV를 보거나 책을 읽기도 하고.

가끔 집에만 있는 게 답답할 땐 드라이브를 다녀오거나, 전시회나 영화를 보기도 했다.

최근 여러 가지 일이 겹치며 이런 여유로운 시간이 부족하긴 했지만….

우리는 마치 오래된 연인처럼, 자연스레 서로에게 맞춰가며 잔잔한 일상을 보내왔다.

‘…이것도 결국, 내 점수를 따려는 거겠지.’

하지만 이것도 모두 의도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사람들 앞에서 드러누우며 생떼를 부리기까지 했는데, 고작 이런 평범한 걸로 만족할 리가 없으니까.

필시 임아린이나 설주희와 다른 포지션을 취하여 점수를 따려는 계획이리라.

‘그래도…. 이건 이거대로, 나쁘지 않네.’

작전을 파악하며 한결 마음을 놓은 나는, 이내 순순히 홍유라의 작전에 놀아나 주기로 했다.

[ 기다리고 기다리던 그 시간, 간식 타임! ]

[ 와아아! ]

[ 자, 오늘의 간식은…! ]

그렇게 적당히 틀어둔 TV 예능에선 어느새 새로운 코너를 진행하였고,

“저거 맛있겠다.”

“그래? 저기 배달되는데.”

“저게 여기까지 와?”

“응. 전에 보니까, 근처에 있더라고. 이따 시켜먹을까?”

“네가 밥 차려 준다며. 밥부터 먹고 생각해보자.”

먹음직스럽게 찍힌 간식을 보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던 도중.

스윽─

어느 순간 홍유라가 소파에 슬쩍 몸을 눕히더니, 자연스레 내 허벅지에 머리를 얹어왔다.

“…….”

마치 허락을 구하듯 흘끔 시선을 옮기곤 눈을 마주치는 그녀.

‘…오늘따라 예쁘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의 매끈한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며 조용히 TV를 바라보았다.

이 정도 스킨십은 괜찮다는 의미다.

[ 자, 크림으로 콧수염 만들면 10점! ]

[ 도저언! ]

퀸즈의 멤버들이 모두 그렇지만, 홍유라는 유독 스킨십을 좋아한다.

그녀는 이렇게 찰싹 달라붙은 채로 무심하게 만져지는 걸 매우 좋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거칠게 대해지는 걸 좋아하는 그녀의 성벽이 이런 취향에서 비롯됐다는 걸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쓸데없는 걸 알아버렸네.’

강렬한 붉은색 머리카락부터 시작하여 말랑한 귓불.

날렵한 턱에서 도톰한 입술까지.

마치 귀한 장난감을 다루듯,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그때.

덥석─

누워있던 홍유라가 내 손목을 슬쩍 붙잡아왔다.

‘응?’

그녀는 붙잡은 손을 자신의 어깨로 끌어당기는가 싶더니, 내 손가락을 자신의 나시 사이로 슬쩍 집어 넣으며 물끄러미 시선을 흘겨왔다.

옷 안쪽도 만져달라는 의미였다.

“편하게 쉬자며.”

나는 어이없다는 눈빛을 띠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아, 안쪽이 간지러워서….”

그녀는 가당치도 않은 핑계를 대며 기대에 찬 눈빛으로 다시 한번 내 손을 꾹 잡아당겼고,

“안 될까…?”

그런 그녀의 얼굴과 꽉 죄인 흉부를 번갈아보며 한참 동안 고민하던 나는….

“…이번만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팔쪽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가슴을 콱 움켜쥐었다.

“아읏….”

속옷을 입지 않은 듯, 저항 없이 손끝에 느껴지는 말랑한 생살의 촉감.

아무리 손을 크게 펴도 손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게, 묘한 만족감을 충족시켜주었다.

‘이거…. 말려든 거 같은데.’

머리 한구석에선 이미 홍유라의 작전에 제대로 말려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확실히 크네….’

이성을 짓누르는 압도적인 촉감에 설득당하여,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가슴을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장장 데이트 시작 1시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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