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8화
반란 (2)
“홍유라가 원래 저런 성격이었어?”
“설주희도 저랬잖아. 따라 하는 거겠지.”
“대체 얼마나 좋아하면 저러는 거야?”
“퀸즈 프로듀서로 10년이나 해먹은 이유가 있었네….”
끊임없이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한없이 쌓여 가는 수치스러움에 어금니를 꽉 깨문 나는, 빌다시피 사정하며 드러누운 홍유라의 손을 잡아당겼다.
“제발, 일어나…! 일어나서 얘기해!”
“…데, 데이트해줄 거야?”
마찬가지로 수치스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로 흘깃 시선을 보내온 그녀는, 그 와중에 데이트 의사를 물어왔고,
‘설주희!!! 이 미친년을 진짜…!’
홍유라에게 괜한 바람을 집어넣었을 설주희를 원망하며, 일단 일으키고 보자는 생각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아주기로 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바로 그 순간.
“자, 잠시만요…!”
누군가 헐레벌떡 다가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프, 프로듀서님은 넘겨 드릴 수 없어욧…!”
주먹을 꽉 움켜쥐곤 어울리지 않게 비장한 눈빛으로 홍유라를 노려보는 그녀.
방한나였다.
“…하, 한나야?”
“…?”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의 등장에, 홍유라도 나도 살짝 당황하고 말았는데….
“스, 승부해요! 전에 그랬던 것처럼, 똑같이 승부해요!!!”
방한나는 앞선 설주희의 전례를 들먹이며 홍유라에게 정정당당히 데이트를 따내라 주장했고,
“…마, 맞아요! 똑같이 승부를 겨루세요!”
“…….”
뒤이어 나타난 김나래와 진서원도 방한나의 편을 들며 그녀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아니, 얘네 무슨 깡으로….’
솔직히 그녀들의 용기엔 살짝 감동 받긴 했으나, 한편으론 무모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팀 서울시청은 이미 설주희에게 쓰라린 패배를 맛보았다.
이미 패배가 무엇인지 제대로 겪어보았는데, 구태여 다시 불리한 싸움을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저, 얘들아….”
나는 황급히 홍유라의 손을 내팽개치곤 멤버들을 말리려고 했다.
그러자.
“…승부?”
누워있던 홍유라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내 말을 가로막으며 멋대로 승부를 받아버렸다.
“좋아. 받아들일게.”
“야, 야…!”
미처 말리기도 전에 서로를 노려보며 대치하는 팀 서울시청 멤버들과 홍유라.
웅성웅성─ 웅성웅성─
“와…. 설주희랑 붙어서 깨졌다더니, 이걸 또 들이받네.”
“얼마나 프로듀서를 아끼는 거야?”
“도지혁, 진짜 세금 더 내라고….”
“나도 저런 멤버들 있으면 좋겠다.”
얼떨결에 관객들에게도 퍼져버린 승부는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져 버리고 말았고,
‘…이젠 나도 모르겠다.’
결국, 당사자들의 강력한 주장으로 홍유라와 팀 서울시청의 승부가 성사되고 말았다.
*
홍유라와의 승부가 결정된 직후.
그녀가 한규리의 도움을 받으며 준비하는 사이.
“나, 한나가 저렇게 무서운 표정 짓는 거 처음 봐….”
“…나도.”
앞서 준비를 마친 김나래와 진서원은 방한나의 모습에 살짝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
방한나는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집중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 귀기마저 느껴지는 게, 마치 사지에 나서는 한 명의 전사와도 같았다.
‘무조건 버텨야 해.’
그녀는 자신이 홍유라와 붙어서 얼마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홍유라는 만약 설주희가 없었다면, 당연히 파워 랭킹 1위를 차지했을 거라고 평가받는 최정상급 헌터.
고작 설주희의 카운터 한 번에 나가떨어진 수준으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러나.
이번엔 절대 그냥 물러설 순 없다.
아니, 죽어도 물러서면 안 된다.
혹여 또다시 방패가 부서지는 한이 있더라도.
메인 탱커로서 멤버들에게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
오직 방한나만 할 수 있으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
그렇게 승부 준비를 마치고 홍유라를 기다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준비됐어요.”
드디어 탈의실에 들어섰던 홍유라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
“우, 우와….”
“…돼지.”
팀 서울시청 멤버들은 홍유라를 보며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미처 개인 장비를 챙겨오지 못한 홍유라는, 앞선 설주희처럼 장비 대여소의 물건을 이용하여 전투를 준비했는데….
하필 그녀의 폭발적인 신체를…, 특히 압도적인 크기의 흉부를 완벽하게 커버할만한 전투복이 존재하지 않았고,
덕분에 빽빽이 죄인 그녀의 흉부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출렁이며 주변의 이목을 모조리 흡수해버렸다.
‘크, 크다아….’
물론 방한나도 홍유라에 뒤지지 않는 흉부를 지니고 있긴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아직 자신의 흉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지 못했다.
“다들 시작할게요…!”
그렇게 한규리의 신호와 함께 널찍한 훈련용 부스로 들어선 네 사람.
반대편의 홍유라와 노려보던 방한나는, 놀라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내며 팀원들에게 작전을 지시했다.
“서원아. 작전대로 나래 언니랑 내가 어떻게든 시간을 벌 테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타격을 먹여야 해. 알았어?”
“…응.”
“나래 언니도 저 신경 쓰지 말고 맘껏 퍼부어요.”
“…지, 진짜 괜찮겠어?”
“이렇게 맞으나, 저렇게 맞으나. 탈락하는 건 똑같아요.”
“…으, 응. 해볼게.”
삐이이익─────
시작을 알리는 비프음이 부스 내부에 울려 퍼진다.
진서원과 김나래는 앞서 계획한 작전대로 후방에 자리를 잡았고,
“후우….”
콱 움켜쥔 방패를 치켜든 방한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마력을 최대로 끌어올리며 홍유라에게 달려들었다.
타앗─!
‘그런 작전인가.’
매섭게 돌격하는 그녀의 모습에 금세 작전을 파악한 홍유라.
그녀는 방한나를 먼저 날려버릴 생각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스윽─
그리고….
‘…지혁이한텐 나로 충분해.’
자신과 견줄 방한나의 압도적인 몸매를 떠올리곤 약간의 감정을 담아, 검 끝을 힘껏 내리쳤다.
촤아아악───!
그 순간.
“!”
섬뜩한 살기를 감지한 방한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강제로 몸을 비틀었다.
타아아앙─────!
일직선으로 내려친 검은 방패의 곡면을 타고 흐르며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고,
“!”
부스 밖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도지혁은 공격을 막아낸 방한나의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겨우 B급인 방한나가 S급인 홍유라의 진심이 담긴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역시, 지혁이가 키워서 그런가?’
외려 공격이 막혀버렸던 홍유라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일말의 동요조차 없이 검을 치켜올렸고,
‘그래도 두 번은 안 될 거야.’
억지로 방패를 비틀며 자세가 무너졌던 방한나를 향해 검 끝을 내리치려 했다.
그 순간….
후우우웅───!
갑자기 나타나 그녀의 눈앞을 지나치는 자그마한 불덩이.
움찔─
홍유라는 눈가에 느껴지는 뜨거움에 잠시 멈칫거리고 말았다.
김나래가 방한나에게 시간을 벌어 준 것이다.
“서원아아!!”
그렇게 방한나를 지켜낸 김나래는 곧장 대기하고 있던 진서원에게 신호를 보냈고,
파직─! 파지지직───!
어느새 천장에 들러붙어 홍유라의 사각을 노리던 진서원은, 기다렸다는 듯 내공을 터트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파아아앙────!
홍유라의 뒤통수를 노리는, 증오와 살기가 담긴 주먹.
‘됐다…!’
가까스로 자세를 잡아낸 방한나는, 홍유라에게 닿기 일보 직전인 진서원의 주먹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작전이 먹혀들었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스윽─
애석하게도 진서원의 공격은 홍유라에게 닿지 못했다.
살기를 감지한 홍유라가, 기괴한 몸놀림으로 몸을 비틀며 공격을 완전히 피해버린 것이다.
“…어.”
성공적으로 타격을 먹이지 못한 진서원은 그대로 반동을 받아 홍유라의 사정거리에 들어서고 말았고,
촤아아아악─────!!!!!!!
뒤이은 그녀의 카운터 공격에 제대로 치명타를 입고 말았다.
*
“…….”
밥 대신 비약을 먹은 부작용으로 몹시 쇠약해진 임아린은 언제부턴가 환영 마법을 부리지 못하게 됐다.
마력이 부족한 건 아니다.
그저, 마법을 사용할 수가 없는 상태.
말 그대로, 몸이 생존 본능에 따라 마법을 거부하고 있었다.
“…….”
유일한 위안이었던 환영 마법을 잃은 임아린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눈을 감고 편안히 잠들 수조차 없던 그녀는….
‘…지혁이가 좋아할까?’
도지혁의 취향에 맞춰, 자신을 꾸미기 시작했다.
헤어스타일부터 사소한 액세서리까지.
언제든지 그에게 예쁨 받을 수 있도록,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스스로를 꾸몄다.
“…헤, 헤헤….”
환영 마법에 심취한 탓인지, 그녀는 이따금 도지혁의 환영을 보기도 했다.
“…어, 어때…? 이, 이거…, 예뻐…?”
환상 속의 도지혁은 언제나 임아린에게 친절했다.
“…으, 응…. 네, 네 앞에서만 입을게…, 히, 히힛….”
언젠가 두 사람이 연인이었을 때처럼.
“저, 저기…. 나, 요즘 배가 아픈데…. 호, 혹시…. 이, 임신 아닐까…?”
결국, 믿기 힘든 현실에서 도망쳐버리고 만 것이다.
“…어, 어떡하지…? 배가 너, 너무 아파…. 우, 우리 아이 잘못되는 건 아니겠지…?”
물론 그녀의 배가 아픈 건 순전히 비약 과다 복용으로 인한 환상통일뿐.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 끔찍한 통증조차도 그녀에겐 한줄기 행복으로 느껴졌다.
“으, 응…. 겨, 견뎌볼게…!”
적어도….
그 고통을 받는 동안엔, 환상 속의 도지혁으로부터 관심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아…. 그, 근데…. 너무 아파서…. 조, 조금만…, 조금만 누워있을게…. 내, 내가 미아…….”
그렇게 방바닥에 엎어진 임아린은 정신이 희미한 와중에도 아랫배를 소중히 감쌌고,
“…….”
이내 지쳐 쓰러지듯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