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2화
역습 (1)
“…후우….”
더럽혀진 손을 씻고 화장실을 빠져나온 나는,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홍유라를 흘끔 바라보았다.
환한 조명 아래로, 축축하게 젖어 번들거리는 탐스러운 육체.
제대로 숨을 쉬긴 하는 건지, 엉망진창인 침대에 대자로 뻗어버린 그녀는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알아서 잘 정리하겠지.’
그렇게 그런 그녀를 뒤로하고 조용히 안방을 빠져나온 나는, 방바닥을 뒹구는 장난감들을 멀찍이 뛰어넘으며 냉장고로 향하였다.
“푸하….”
그리고는 시원한 물로 메마른 목을 축이며, 앞선 홍유라와의 ‘협상’을 돌이켜보았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
예상과 달리 홍유라와의 합의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심리적 우위를 점했던 덕분인지, 원래부터 그녀가 그런 취향이었던 건지.
아니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겠다.
도중에 은근한 광기를 보이며 맹목적으로 충성을 약속할 땐 살짝 섬뜩하기도 했으나, 어쨌든 그녀는 내 계획에 참여하기로 약속하였다.
솔직히 이곳에 찾아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와 관계를 맺는 걸 각오하기도 했었는데….
다행히 그녀는 내게 휘둘리는 게 마냥 좋았던 건지, 별다른 조건을 덧붙이지 않으며 협조해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연거푸 찬물을 마셔가며 뜨거워진 몸과 머리를 차분히 식힌 나는, 굴러다니던 휴대폰을 들어 연락처를 뒤져보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곧바로 설주희에게 연락할 생각이었다.
[ 나 : 좀 만나. ]
*
“드디어 왔네.”
설주희는 손에 든 휴대폰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슬쩍 끌어올렸다.
마침내 도지혁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꽤 오래 걸렸네.’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음을 흘린 그녀는, 매끈한 다리를 까닥이며 여유로이 답장을 고민해보았다.
일단 먼저 연락이 왔다는 건 이쪽에 주도권이 있다는 뜻.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도지혁이 먼저 상황을 정리하고 싶어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분명 그냥 연락했을 리는 없는데….’
물론 도지혁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머리부터 들이대는 스타일은 아니다.
오히려 상황을 뒤집을만한 무언가를 들고 올 확률이 훨씬 더 높았다.
‘그럼 뭘 준비했을까….’
설주희는 곰곰이 머리를 굴리며 도지혁이 시도할만한 방법을 고민해보았다.
아마 마음을 받아 주는 건 아니리라.
그게 아니라면,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받아줬을 테니까.
무엇보다 임아린과의 관계가 좋지 않게 끝난 이후이기에, 분명 연애 쪽으론 조금도 고려하지 않았을 거다.
그럼 도지혁의 입장에서 남은 방법은, 대화로 풀어 단념케 하거나, 맞불을 놓으며 상황을 뒤엎어버리는 것.
은근히 싸이코 기질이 있는 도지혁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중에서도 아예 맞불을 놓아 일을 망치는 쪽이 가장 그럴듯했다.
‘어떻게 나오려나….’
설주희는 마치 히로인을 공략하는 주인공이 된 것처럼, 두근거림에 빙글빙글 웃으며 도지혁이 펼칠만한 작전을 고민해보았고….
[ 지금 당장이면 만나 줄게. ]
답장을 보내어 도지혁과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약속 장소에 도착한 설주희.
“다른 손님분은 이미 도착하셨습니다.”
그녀는 도지혁이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직원의 안내를 받으며 예약한 방으로 들어섰고,
“…….”
드디어 도지혁과 마주하게 됐다.
“일찍 왔네?”
묘하게 담담한 그의 모습에 무심코 설렘을 숨기지 못한 그녀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핸드백을 슬쩍 내려놓은 뒤, 보란 듯이 다리를 꼬며 도지혁의 모습을 스윽─ 관찰해보았는데….
‘…뭐지?’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에게서,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고 말았다.
마치 토벌을 앞두고 한창 날카로운 모습을 보이던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기분 탓인가?’
이윽고 단순히 기분 탓이라며 넘겨버린 그녀는, 다시 미소를 띠며 뻔뻔하게 말을 꺼내보았다.
“웬일이야? 먼저 다 보자고 하고.”
그러자 도지혁이 짧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몸을 기대더니, 깍지를 낀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담담히 대답해왔다.
“좀 보고 싶어서.”
“…나를?”
“응.”
설주희는 보기 드문 도지혁의 돌직구에 살짝 놀라워했다.
이토록 그가 직접 ‘보고 싶다’라고 말하는 건 매우 드문 일.
분명 그녀로선 쌍수를 들며 반겨야 할 일이었으나, 말한 대상이 도지혁이란 사실에 외려 의심을 품고 말았다.
“별일이네. 보자마자 버럭 화를 낼 줄 알았는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온 거야?”
“맞아. 그동안 좀 생각을 해봤는데…, 그동안 내가 너무 꽉 막혔던 거 같더라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어딘가 너그러운 모습을 보이는 도지혁.
‘…진짜 뭐지?’
설주희는 색다른 그의 모습에 묘한 두근거림을 느끼면서도, 그의 꿍꿍이를 알아낼 속셈으로 선뜻 입을 열었다.
“그래서. 이제 어쩔 생각인데? 내 마음, 받아 줄 거야?”
그러자.
“…….”
도지혁이 묘한 눈빛을 번뜩이더니….
톡톡──
자신의 옆자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무언의 신호를 보내왔다.
옆으로 오라는 의미였다.
‘뭐야?’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한 설주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도지혁의 행동에 고운 미간을 살짝 좁히며 되물었다.
“지금, 나보고 거기 앉으라는 거야?”
“내가 갈까?”
도지혁은 진심이었다.
“…….”
설주희는 눈을 가늘게 뜨곤 도지혁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꼬았던 다리를 풀며 천천히 몸을 일으키곤, 순순히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됐지?”
그렇게 도지혁과 함께 나란히 앉은 그녀는,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에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을 느끼며 얌전히 답을 기다렸다.
그 순간.
스윽─
도지혁이 팔을 들어 설주희에게 두르더니, 팔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자신에게 밀착시켰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그의 공격에 당황한 설주희는 애써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되받아쳤다.
“이, 이제야 그럴 마음이 든 거야?”
“싫어?”
도지혁은 우악스럽게 그녀를 품 안으로 끌어당기며 옆 가슴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했고,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연이은 역공에 한층 더 당황한 설주희는, 비로소 그의 진짜 작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자신을 역으로 공략하여,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는 괘씸한 작전을.
‘내가 이대로 쉽게 넘어갈 거 같아?’
이내 작전을 눈치챈 설주희는 재빨리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도지혁의 다리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 끝에 느껴지는 단단함.
“너무 흥분한 거 아냐?”
그녀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그를 자극하려고 했지만….
도지혁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아예 상의 아래로 손을 집어넣곤 맨살을 훑으며 속삭였다.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래도 단단히 함락시켜버리겠다는 생각인 것 같았다.
‘이, 이건 이거대로…. …아냐, 정신 차려 설주희! 이대로 넘어가면 끝장이야!’
잠시 마음이 흔들렸던 설주희는 퍼뜩 정신을 차리며 도지혁의 손길을 부드럽게 뿌리치곤 단호히 말했다.
“도지혁. 이런 식으로 얼버무려도 그냥 안 넘어가니까, 미리 똑바로 말해. 너, 내 마음 받아 주는 거 맞아?”
설주희의 목적은 도지혁을 독차지하는 것.
만약 그가 여기서 긍정을 표한다면, 사실상 목적을 이뤘다고 볼 수 있다.
“…….”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지그시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도지혁.
스윽─
곧이어 그는 그녀의 살결을 아슬아슬하게 훑으며 담담히 대답했다.
“어. 맞아.”
“…정말? 그냥 얼버무리려고 이러는 거 아냐?”
도지혁은 끊임없이 의심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렸고, 이내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다시 한번 고백했다.
“아니야. 그 방송 보고 많이 생각해봤어. 네가 얼마나 날 좋아했는지…. 내가 얼마나 눈치가 없었는지 이제야 알겠더라.”
“…그걸 이제 알았어? …그래서?”
“나랑 사귀어줘.”
“…진짜? 거짓말이 아니라?”
“응.”
마침내 설주희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
‘…아….’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기쁨을 숨기지 못한 그녀는 애써 웃음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으며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런데 그때.
“유라도 좋다고 했으니까, 이제 너만 받아들이면 돼.”
도지혁이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뭐?”
뜬금없이 등장한 홍유라에 화들짝 놀란 설주희.
그녀는 목덜미에 느껴지는 불쾌한 감각을 느끼며 황급히 도지혁을 노려보았다.
“갑자기 유라는 왜….”
“아까 유라 만나고 왔는데, 유라는 괜찮다고 말했어. 우리 다 같이 사귀는 거.”
“뭐라고…?”
설주희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다같이라니, 설마 셋이 사귄다는 이야기인가?
“너네 원래 나랑 동반 결혼식 하려고 했다면서. 그러니까 같이 사귀어도 괜찮잖아?”
“그건….”
“아. 순서는 상관없어. 나는 다 평등하게 아껴 줄 거니까, 안심해도 돼.”
‘이,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그 대신 관계를 맺는 건 전부 내 마음대로. 멋대로 덮치는 순간, 바로 헤어지는 거야. 아. 손으로는 해줄 수 있으니까, 언제든지 이야기해도 돼. 아까 해봤는데, 유라는 꽤 마음에 들어 하더라.”
뻔뻔한 얼굴로 일방적인 조건을 늘어놓는 도지혁의 모습에 잠시 말문이 막혔던 그녀는, 그가 숨겨온 진짜 속셈을 마침내 알아챌 수 있었다.
그는 진심으로 마음을 받아 준 게 아니었다.
그저, 통제를 위해 목줄을 채우려는 속셈이었다.
“너….”
“이게 싫으면, 나도 어쩔 수가 없어. 내가 좀 까다로운 거 알지?”
“대놓고 양다리를 걸치겠다고…? 진짜 미쳤어?”
“그럼, 안 미친 것처럼 보였어?”
도지혁은 설주희의 옆 가슴을 콱 움켜쥐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런 짓까지 했으면, 내가 이렇게 나올 것도 예상했어야지.”
“이게 진짜…!”
“다시 말하지만, 유라는 좋다고 했어. 그래서 걔는 내 여자친구가 됐고, 넌 아직 아니야. 이게 무슨 말인지 잘 알지?”
도리어 자신을 협박하는 도지혁의 행동에 욱한 설주희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며 큰소리를 쳤다.
“내가 이런다고 포기할 거 같아?! 나는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너 몰래 찍어뒀던 사진도, 동영상도, 다 뿌릴 거야!”
하지만.
“뭐…. 싫으면 말고.”
도지혁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 뻔뻔한 표정을 지으며 짐을 챙겼고,
“언제든지 생각 바뀌면 이야기해. 나는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으니까.”
어이 없다는 듯 노려보는 설주희에게, 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경고를 날렸다.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혹시 괜한 짓은 안 했으면 좋겠어. 내가 평등하게 사랑할 생각이긴 한데, 감정이라는 게 맘처럼 움직이지는 않으니까…. 무슨 말인지 알지?”
쓸데없는 짓을 했다간, 처우가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는 협박이었다.
“…너, 너어…!”
“나는 바빠서 이만.”
그렇게 엄포를 놓고 방을 나서는 도지혁의 뒷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보던 설주희는, 주먹을 부르르 떨며 굳게 다짐했다.
‘절대 가만 안 둬…!’
무슨 일이 있어도, 그의 뜻대로 굽히진 않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