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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21화 (121/165)
  • 제 121화

    격류 (5)

    홍유라와의 만남이 정해진 뒤.

    서울시청 팀원들을 포함한 가까운 지인들에게 연락하여 적당히 상황을 수습한 나는, 평소엔 쳐다보지도 않던 선글라스까지 꺼내 들며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혹시 모를 파파라치를 위한 최소한의 대비였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사실 이런 와중에 구태여 집을 나서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얼굴까지 팔려버린 마당에, 괜히 홍유라를 만났다가 상황이 더 꼬일지 몰랐기에.

    하지만….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홍유라를 설득하기 위해선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까라면 까야지.’

    그렇게 주차해둔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와, 단지 바깥으로 향하는 길.

    웅성웅성─ 웅성웅성─

    아니나 다를까, 단지 입구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저 인간도 왔네. 그렇다면….’

    간간이 구면인 기자들도 보이는 것이, 죄다 연예계 기자들인 게 분명했다.

    “쯧….”

    나는 미리 준비해둔 선글라스를 잽싸게 착용하곤, 차단기를 넘어서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단지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어─! 도지혁 차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어느 기자의 고성.

    그새 차 번호까지 조사해왔는지, 아무래도 내 차를 알아본 거 같았다.

    ‘진짜 독하다, 독해.’

    물론 움직이는 차를 막아서는 건 불가능한 일.

    도지혁 씨─! 한마디만 해주세요─!

    사실관계 확인 부탁 드립니다─!

    특종에 눈이 먼 기자들은 차 속을 확인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밀며 안간힘을 쓰기 시작했고,

    나는 그런 기자들을 지나치며, 재빨리 도로로 빠져나갔다.

    “…설주희….”

    지금껏 프로듀서 생활을 하며 악질 기자들에게 시달린 적은 여러 번 있었지만, 이렇게 집 앞까지 대놓고 찾아온 건 또 처음.

    본의 아니게 탑 급 헌터의 기분을 느끼게 해준 설주희에게 뜨거운 감사를 표한 나는, 분노를 담아 속도를 높이며 재빨리 홍유라의 오피스텔로 향했다.

    ‘…여기는 없겠지?’

    그렇게 도착한 오피스텔.

    혹시 모를 추적에 대비하여 빙빙 크게 돌아온 나는, 가장 구석에 차를 대고 주변을 경계하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후….”

    그리곤 텅 빈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으며, 홍유라에게 도착했다는 연락을 보냈는데….

    1층을 지나, 사무실이 몰린 2층을 지나치던 무렵.

    띵──

    누군가 타려는지, 엘리베이터가 멈추었고,

    지이이잉───

    문 너머로 누군가 있는 걸 확인한 나는, 괜히 선글라스를 고쳐 쓰곤 구석으로 파고들며 휴대폰을 매만졌다.

    “오빠. 내가 좋게 말하고 있잖아요.”

    이윽고 가벼운 정장 차림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그녀는, 다행히 한창 통화 중인 듯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당장 옆에 있는 여자 바꿔요.”

    남자친구가 바람이라도 피우고 있었는지, 꽤 흥미진진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오빠. 진짜 뒤지고 싶어요? 내가 밑에서 뻔히 일하고 있는데, 그새 딴 년을 들여?”

    [ 하연아…! 그게 아니라니까…! 진짜 밥만 먹으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까…! ]

    얼떨결에 새어 나온 남자의 변명엔 당황스러움이 한껏 깃들어 있었고,

    띵──

    “오늘은 절대 그냥 못 넘……!”

    마치 설주희처럼 칠흑 같은 새카만 머리칼을 지닌 그녀는, 흉흉한 살기를 뿜어내며 엘리베이터에서 휙 내려버렸다.

    머지않아 이 오피스텔에 피바람이 불 거 같았다.

    ‘무섭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더니, 분노한 여성의 살벌한 모습을 마주해버린 나는, 몸을 부르르 떨며 괜히 뒷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하려는 짓이, 칼에 찔려도 할 말이 없는 짓이기에.

    물론 그것까지 계산에 두긴 했으나….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벌써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다시금 각오를 굳게 다지길 잠시.

    띵동──

    마침내 도착한 홍유라의 오피스텔.

    “…….”

    나는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그리고….

    도도도도──

    곧이어 문 너머로 자그마한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벌컥─

    기다렸다는 듯 현관문이 활짝 열리며, 밝은 얼굴의 홍유라가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

    그런데….

    “너….”

    뒤이어 그녀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혀버리고 말았다.

    붉은 머리카락과 색깔을 맞춘 동물 귀 머리띠와 자연스레 살랑거리는 강아지 꼬리.

    그리고 옷 대신 아슬아슬하게 중요 부위를 가린 하트 모양 패치까지.

    마치 문명을 겪지 않은 자연인과 대면하는 기분이었다.

    “…뭐야?”

    “그…, 네가 스트레스 많이 받은 거 같아서…, 이벤트로 준비해봤는데….”

    “…이벤트?”

    “너, 너무 과한가?”

    홍유라는 냉랭한 반응에 살짝 기죽은 모습을 보이며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는데….

    대체 무슨 원리인 건지, 그녀의 엉덩이에서 이어진 강아지 꼬리도 축 늘어지며, 그녀의 감정을 표현해왔다.

    ‘진짜 어이가 없네.’

    할 말은 많지만, 이런 사소한 걸로 잔소리를 할 시간은 없다.

    오늘은 홍유라의 기분을 맞춰주러 온 것이니, 얌전히 넘어가는 게 맞으리라.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해.”

    “으, 응….”

    *

    “…….”

    홍유라를 따라 오피스텔 내부로 들어서던 도지혁은, 그녀의 탐스러운 엉덩이 사이에서 돋아난 강아지 꼬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진짜 꼬리 같지는 않았는데….

    미묘하게 마력이 느껴지는 게, 역시 마력으로 작동하는 아이템 같았다.

    ‘진짜 이딴 곳에 기술 쏟지 말라고.’

    그렇게 도지혁이 상상을 초월한 산업 기술에 내심 감탄하길 잠시.

    “아, 앉아.”

    “…….”

    그는 홍유라의 안내를 받으며 잠자코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스윽─

    기다렸다는 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다소곳이 바닥에 무릎을 꿇는 홍유라.

    금방 터져버릴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그녀의 일면엔 은근한 기대의 빛이 서려 있었다.

    “…….”

    물론 도지혁은 그런 그녀의 행동이 못마땅할 뿐.

    하지만 목적이 목적이기에, 애써 별다른 말은 꺼내지 않았다.

    “…유라야.”

    “으, 응?”

    “그거, 무슨 동물이야?”

    “어…, 어?”

    “그 꼬리랑 귀. 세트 아냐?”

    홍유라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도지혁의 관심에 반색하며 해맑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마, 맞아! 강아지 세트인데, 정확히는…. 아, 암…, 캐….”

    그러나 스스로 설명하고도 부끄러웠는지, 마지막엔 설명을 포기하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는데….

    ‘…왜, 귀엽냐….’

    그런 그녀의 모습이 외려 도지혁의 심금을 울려버리고 말았다.

    평소 성숙하고 우아한 모습과 완전히 상반된 모습이 치명타를 먹여버린 것이다.

    “…그래? 그러니까, 개라는 거잖아?”

    말 그대로, 소 뒷걸음치다 쥐 잡는 격.

    그녀가 무엇을 기대하고 이런 옷차림을 했는지 단번에 파악한 도지혁은,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고자 슬쩍 손을 내밀었다.

    “손.”

    그 순간.

    “…어?”

    상황을 따라가지 못하고 얼어붙은 홍유라.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던 도지혁은, 무심한 말투로 다시 한번 지시했다.

    “손.”

    그러자.

    “!”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파악한 홍유라는 황급히 손을 내밀었고,

    텁─!

    마침내 손을 받아낸 도지혁은, 그녀의 손을 꼬옥 붙잡아주며 머리카락을 쓰다듬어주었다.

    “착한 아이네.”

    착한 아이.

    홍유라는 죽을 만큼 부끄러운 한편, 가슴 깊숙한 곳에서 피어오르는 묘한 쾌감에 무심코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주, 준비한 보람이 있었어….’

    사실 홍유라는 직접 꼬리를 착용하는 순간까지도 매우 걱정이 많았다.

    이런 급진적인 행위를, 그가 얼마나 마땅찮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괜히 점수를 깎아 먹는 게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주저하며 머리를 싸맬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히 도지혁은 좋게 받아들여 줬고, 무려 ‘착한 아이’라며 극찬까지 덧붙여주었다.

    물론 이건 모두 도지혁의 계획이었지만….

    “헤….”

    이미 한 마리의 충실한 개가 돼버린 홍유라는, 아무래도 좋았다.

    *

    한편.

    도지혁이 한창 홍유라를 입맛대로 조련하고 있을 즈음.

    “…흐흥….”

    설주희는 여유로이 콧노래를 부르며 거품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하와이로 갈까….”

    그녀는 이미 승부에서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벌써 신혼여행지를 고민했는데….

    사실 그녀의 계획이 정상적으로 흘러간다면, 승리는 떼놓은 당상이나 다름없었다.

    설주희는 자신이 벌여놓은 걸 이용하여 도지혁과 협상에 나설 계획이었다.

    공식적으로 자신과 사귀기 시작했다는 걸 밝히고, 날뛰는 여론을 잠재우라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받아들일 때까지 계속해서 공개적으로 구애할 거라고.

    사실상 협박에 가까운 계획이었다.

    물론, 그녀도 생각 없이 막 지른 행동은 아니다.

    도지혁은 설주희를 좋아한다.

    그게 이성으로서든 단순한 친구로서든.

    이른바 콘크리트 층에 가까운 호감을 지니고 있다.

    지난 일들을 돌아보던 그녀는 그 사실을 정확히 눈치채게 됐고,

    평소 은근히 져주던 그의 성격을 이용하여, 언론을 잠재우기 위한 ‘가짜 연인 관계’를 맺어버리겠다는,

    가짜 연인 관계로 시작하여, 정실의 위치를 공고히 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이었다.

    “흐흥….”

    그렇게 승리를 확신한 설주희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한가로이 도지혁의 연락을 기다렸다.

    자신의 앞날에, 어떤 위기가 다가올진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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