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8화
격류 (2)
당황스럽다는 감정을, 이렇게까지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었을까.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진서원은, 핏물에 푹 젖어버린 고글을 올리며 시선을 마주쳐왔다.
어딘가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눈빛.
내 눈치를 살피듯 요리조리 뜯어보던 그녀는, 조심스레 말을 건네왔다.
“…오빠, 괜찮아?”
그녀의 말투엔 걱정스러움이 잔뜩 담겨있었는데,
마치 조금 전에 벌어진 일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게, 외려 기묘한 섬뜩함을 자아냈다.
‘…이게 무슨….’
나는 미처 따라가기 힘든 상황에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진서원을 바라보았다.
분명 게이트로 바깥으로 나갔어야 할 그녀가 왜 여기에 서 있는 걸까.
아니, 임무를 등지고 여기까지 달려온 건 둘째 치고, 대체 방금 보인 힘은 무어란 말인가.
마왕군의 최대 전력 중 하나인 사천왕을 순식간에 섬멸해버렸다.
원작 속에서 상당한 성장을 이룩했던 설주희조차도 고전했던 상대를, 말 그대로 단숨에 터트려버린 것이다.
“…많이, 다쳤어?”
피범벅이 된 채로 아무렇지 않게 안부를 물어오는 행동도,
“…마, 많이 아파?”
마치 사랑스러운 연인을 보는 듯, 애틋한 감정이 뚝뚝 묻어나오는 시선까지도.
그녀의 요소 하나하나가, 내가 지금껏 어떤 존재를 옆에 끼고 있었는지 비로소 실감케 했다.
원작 속 천마는 사라진 게 아니었다.
그저,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모, 모리모니임!!!!”
“이, 이 놈드을!!!! 감히 모리모님을!!!!”
그때, 대장을 잃은 마족들이 분개하며 달려들기 시작했다.
“!”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의 어깨너머로 몰려오는 마족들을 바라보았다.
“…아….”
그러자 돌연 진서원이 짜증 난다는 듯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으며 천천히 몸을 돌리더니….
“…치우고 올게.”
아무렇지 않게 살벌한 말을 내뱉으며 다시 고글을 착용하였다.
“…어?”
저릿할 정도로 살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모습에 놀라, 다급히 그녀를 붙잡으려는 찰나.
“자, 잠깐, 서원…!”
내 부름을 뒤로한 채, 그녀가 협곡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윽─
그녀가 마족을 향해 발을 내디딘 그 순간.
쿠구우우웅─────
대기를 짓누르는 숨 막히는 압박감.
“케, 켁…!”
“수, 숨이…, 아, 안 쉬어….”
“끄윽….”
협곡을 뛰쳐나오던 마족들은 거품을 물며 맥없이 픽픽 쓰러지고 말았고,
“…도, 도망쳐!!!!!”
“괴, 괴물이 온다!!! 당장 도망쳐!!!”
“살려줘!!!”
입구 근처에 모여있던 마족들은, 전의를 잃고 겁에 질려 황급히 협곡 안쪽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천마신공을 완전히 깨우치고 나서야 비로소 발현하는 무공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세상에….’
갑자기 말도 안 되게 성장해버린 진서원의 능력에 당황하여, 넋을 놓고 바라보길 얼마나 잠시.
콰아아아아앙──────!!!!!
진서원이 새카만 내공을 폭발시키며 협곡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진짜 천마의 살육이 시작되었다.
*
같은 시간.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게 꾸며놓은 임아린의 집.
“아린아. 여기는 어때?”
도지혁과 똑 닮은 사내는, 찰싹 여인에게 휴대폰을 들이밀며 말을 건넸다.
“일정도 딱 맞고, 숙소도 엄청 예쁜 거 같은데. 우리 여기로 할까?”
그러자.
“응! 나는 네가 좋으면, 어디든 좋아…!”
임아린과 똑 닮은 여인이, 특유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을 껴안았다.
“…아린아. 우리 지금 숙소 예약 중이잖아. 자꾸 이런 식으로 유혹하면 곤란해.”
“으응? 뭐가아…?”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짓곤 껴안은 사내의 팔을 조몰락거리며 유혹하는 여인.
“자꾸 이러면, 진짜 혼나?”
사내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여인을 바라보았고,
“어, 어떻게…?”
여인은 사뭇 기대된다는 표정을 지으며 사내의 손을 다리 사이에 끼워버렸다.
“이게…!”
“꺄아앗…!”
세상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몸을 겹치는 두 사람.
“사랑해.”
“나도, 나도 사랑해…!”
두 사람은 마치 서로에게 녹아드는 것처럼, 쉼 없이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며 행복한 시간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
그들의 반대편, 거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던 임아린은, 정신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만들어낸 환영이었다.
“헤헤….”
자신이 만들어낸 환영을 보며 행복해하는 것만큼 비참한 게 또 있을까.
사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이 무의미하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차마 공허한 행복이라도 놓칠 수가 없었다.
이것마저 놓아버리면, 정말 고통밖에 남지 않기에.
하지만 그 행복조차도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지, 지혁, 지, 지.”
“사랑, 사, 사랑.”
소파 위에서 사랑을 나누던 두 사람이, 마치 버퍼링에 걸린 것처럼 버벅거린다.
마력이 부족한 바람에, 마법 자체가 뒤틀리기 시작한 것이다.
“…아….”
결국, 밤새 환영을 유지한 덕분에 마력이 텅 비어버린 임아린은, 뒤늦게 밀려오는 마력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고 말았다.
빈 마력통으로 마법을 유지하는 건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다.
물론 마법 전개를 포기하고, 환영을 흩트리면 되는 일이었으나, 임아린은 결코 자신과 도지혁의 환영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하아…하윽….”
그녀는 심장을 죄어오는 고통에 비지땀을 흘리며 바닥을 기어갔고,
겨우겨우 냉장고에 다다르며, 잔뜩 쌓인 약병 하나를 끄집어냈다.
강제로 마력을 채워 주는 비약이었다.
뽕─
뚜껑을 연 그녀는, 마치 약을 찾는 중독자처럼 허겁지겁 비약을 들이부었다.
“콜록, 콜록…!”
마력을 채우는 비약은 뛰어난 효능을 자랑하는 만큼, 몇 가지 부작용을 동반하고 있다.
우선 독한 재료로 만들어진 덕분에 혀가 마비돼버릴 정도로 고약한 맛을 자랑하며,
“아….”
억지로 마력을 회복시키는 만큼,
“아…!”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일으킨다.
“끄윽…!”
임아린은 텅 비었던 마력이 차오름을 느끼며 심장을 부여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허억, 허윽, 끅…!”
점점 희미해지는 의식.
그 속에서 사랑하는 그이의 얼굴을 떠올리자, 겨우겨우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아…하아….”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던 임아린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다시 거실로 향하였고,
“사랑해.”
잠시 멈춰두었던 환영 마법을 다시 전개하며,
공허한 나락으로 천천히 기어들었다.
*
“무, 무슨 일이 있던 거예요…?”
게이트 밖에서 만난 박해린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우리를 반겨주었다.
정확히는 피 칠갑을 한 진서원의 모습에 놀란 것 같았지만,
내 쪽도 멀쩡하진 않아서 딱히 할 말이 없었다.
“전투가 좀 있었어요.”
“아니, 전투가 있던 건 누가 봐도 알 거 같은데….”
“좀 심각한 일이에요.”
“…시, 심각한 일이요…?”
나는 박해린의 차량으로 이동하며 간단히 마왕군에 관한 정보를 전달했다.
외계 문명인 마계에서 침공을 시도하고 있으며, 우리가 상대한 건 그 선발대.
마왕은 최소 수십만의 병력을 지니고 있고,
최근 벌어졌던 게이트 폭주도 모두 마계의 짓.
마족들의 목표는 괴수를 이용하여 침공하는 것인데, 조만간 훨씬 커다란 사건이 터질 테니,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 마왕이라니, 이게 무슨 만화도 아니고….”
물론 박해린은 내 말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갑자기 마왕이니, 침공이니, 죄다 뜬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릴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서원아, 그거 보여 드려.”
“…응.”
“어? 그러고 보니, 원 씨 정체 들켰….”
“…이거.”
“아, 네. ……어라?”
그녀는 내가 챙겨온 사진들과 증거들을 살피더니…..
“…이, 이거 진짜예요?”
“여기, 도움이 될만한 증거들도 챙겨왔어요. 그…. 시체도 있으니까, 조심해요.”
“……그럼.”
“진짜입니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듯 얼굴을 굳히며 딱딱한 반응을 보여왔다.
“당장 터지는 건 아니니까,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어, 어떻게….”
“준비만 제대로 하면 됩니다. 준비만. …물론 준비가 제대로 안 되면, 다 죽겠지만요.”
“…네?”
“농담입니다.”
“…저기요.”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박해린과 눈을 마주치며 똑똑히 말했다.
“이제 해린 씨 역할이 가장 중요해요.”
“저요…?”
“마왕의 정체를 알리는 건 모두 해린 씨한테 달려 있어요.”
“그, 그렇게까지….”
“도울 일이 있으면 얼마든지 부담 갖지 말고 말하세요. 필요하면 증언이라도 할게요.”
박해린은 살짝 부담을 느낀 듯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피했고,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이내 결연한 눈빛을 띠며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알았어요. 해볼게요.”
마왕의 침공을 막기 위한 첫걸음에 들어선 것이다.
“그럼, 저희는 들어가 볼게요. 찝찝해서 빨리 씻고 싶네요.”
“…….”
“…최대한 빨리 연락 드릴게요.”
그렇게 박해린의 차를 타고 집 근처로 돌아온 진서원과 나는, 벽을 타고 창문을 넘어 함께 집으로 들어섰다.
“서원아. 욕실에서 먼저 사용해. 그, 장비들은 다 안에 둬도 돼.”
“…오빠는?”
“나는 방에 있는 욕실 쓸게.”
“…같이 씻어도 되는데.”
“아냐, 같이 씻기엔 좁아.”
사실 욕실은 절대적으로 좁지 않다.
임아린과 몇 번 사용해봤기에,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응.”
그러나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던 진서원은 얌전히 발길을 옮겨 욕실로 향하였고,
나는 조용히 방 안쪽의 욕실로 향해 찝찝한 몸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
몸을 타고 흐르는 뜨뜻한 물줄기.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나는, 마족들을 도륙 내던 진서원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으….’
무심코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살벌한 기억.
원작 속 잔혹한 살인귀와 한 지붕 아래서 샤워를 하고 있다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떨떠름해졌다.
‘이제 어떡하냐….’
진서원이 천마로서 각성해버린 건 매우 경계해야 할 일이다.
막말로 그녀가 확 돌아버리면 순식간에 상황이 엎어질 수도 있기에.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내 말을 잘 듣고 있고,
외려 눈치를 본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조심하고 있다.
이걸 든든한 아군이 생겼다며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폭탄을 껴안았다고 슬퍼해야 하는 건지….
그녀의 처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영, 감이 잡히지 않는다.
‘뭐, 방법이 없을까….’
그렇게 진서원에 대한 생각에 빠져, 멍하니 물만 맞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후우우욱─
갑자기 문이 열리는 기척이 느껴지더니, 욕실 내의 훈훈한 공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화들짝 놀란 나는 다급히 물을 잠그곤 얼굴을 훑어 내리며 고개를 돌려보았고,
“…서, 서원아!”
수건으로 몸을 가린 채, 욕실 입구에 선 진서원을 발견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