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17화 (117/165)

제 117화

격류 (1)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주홍빛 협곡.

단신으로 입구를 막아선 도지혁은,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여 쏟아져 나오는 마족들을 차례대로 베어 넘겼다.

촤아아아악──!

날카롭게 벼린 그의 검이 번쩍일 때마다 달려드는 마족 서넛을 가볍게 날려버렸고,

촤아아아악──! 촤아아악───!

지칠 줄 모르는 듯 범벅이 된 채로 쉼 없이 검을 휘두르는 도지혁의 모습엔, 귀기에 가까운 집념이 뚝뚝 묻어나왔다.

“저게 인간이라고…?”

“괴, 괴물….”

침략자인 마족이 역으로 인간을 두려워하는 아이러니한 상황.

“나, 나는 못해…!”

눈앞에서 힘없이 쓰러진 동료들을 지켜보던 마족들이 수라와 같은 도지혁의 모습에 조금씩 주춤거리던 그때.

“놈은 혼자다! 겁먹지 말고 한꺼번에 달려들어!”

“마왕님이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용맹하게 싸워라!!!”

병사들 사이에 섞여 있던 마왕의 충실한 지휘관들이, 병사들의 등을 떠밀며 계속해서 맹공을 지시했다.

“으, 으아아앗!”

결국, 뒤에서 끝없이 밀려오는 아군들과 상관의 명령에 떠밀린 병사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무기를 치켜들며 도지혁에게 달려들었고,

촤아아아아악────!!!

“끄아아아악…!‘

이내 앞선 동료들과 나란히 몸을 겹치며, 비좁았던 협곡 입구에 바리케이드를 한층 더 쌓아주었다.

‘500.’

도지혁은 자신이 베어낸 적들을 체크하며, 검 끝에 맺힌 핏물을 털어냈다.

한참 베어낸 거 같은데, 줄여낸 적군의 수는 고작 500.

분명 하찮게 여길 숫자는 아니었으나, 하나하나가 약한 상대기도 했고, 워낙 머릿수가 많은 탓에 유의미한 수는 아니었다.

‘힘은 아직 충분해.’

전투가 내려 주는 특유의 흥분감과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사명감.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공이란 진취적인 우월감.

도지혁은 전투를 이어가면 이어갈수록 점점 더 고취되는 차분함을 꽉 움켜쥐며, 협곡에서 빠져나오는 마족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이 버러지 같은 놈들이──!”

그때.

“고작 인간 하나를 못 죽여서 동료를 저버리다니!!”

협곡 안쪽 무리에서 웬 거대한 덩치에 양손 도끼를 든 마족이 튀어나와 도지혁과 맞섰다.

‘A급?’

드디어 간부급 마족이 나타난 것이다.

‘양손 도끼…. 쓸만하겠군.’

도지혁은 상대가 마족이라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로 자연스레 마족이 지닌 기술을 훔쳐내며 천천히 검을 치켜들었고,

“하찮은 인간 주제에…, 잘도 우리를 농락했구나…!”

우락부락한 외형에 짙은 턱수염을 지닌 마족 간부는, 눈에 보일 정도로 씩씩거리며 엄포를 늘어놓았다.

“네 녀석의 사지를 찢어, 괴수들의 밥으로…!”

그 순간.

파아앙───!

도지혁이 흑사회 사건에서 훔쳐낸 고속 이동을 응용하여 순식간에 마족의 사정거리로 접근했다.

고작 간부급의 이야기를 일일이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무, 무슨…!”

“너희 대장이나 데려와.”

험악하게 일그러져있던 마족의 얼굴은 뒤늦게 뭔가 잘못됐음을 알아채며 당황으로 물들었고,

촤아아아악─────!

“끄으윽…!”

이내, 앞선 부하들과 같이 단칼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한 번에 쓰러졌다고…?”

최전방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족들은 한층 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도지혁을 바라보았다.

마족 중에서도 강자에 속하는 간부급을 단숨에 쓰러뜨리곤 무심하게 검에 고인 핏물을 털어내는 그의 모습은 그야말로 악귀 그 자체.

그저 인간을 하찮게 여기기만 했던 마족들에겐 굉장히 충격적인 장면이었는데….

파아앙─────! 파아아앙────!

갑자기 협곡 안쪽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굉음.

“……─”

도지혁은 벌써 원군이 도착했나 싶어 의아한 눈빛으로 협곡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파아아앙───!!!

뒤이어 귀를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협곡을 틀어막고 있던 마족들과 입구에 널린 마족들이 바깥으로 튕겨져 나왔다.

“…!”

뜬금없는 내분에 살짝 당황했던 도지혁은 무더기로 날아오는 마족들을 피한 뒤,

또각─ 또각─

당당하게 협곡을 빠져나오는 정체불명의 마족 여성을 쳐다보았다.

높은 구둣발과 가죽으로 꽉 조인 공격적인 몸매.

푸르스름한 피부와 전장에 어울리지 않는 고운 외형.

화려한 그녀의 외모와는 달리, 한 손엔 살벌한 형태의 금속 채찍이 들려 있었다.

‘…S급….’

마왕군 선봉대장이자, 사천왕 중 4번째.

우아한 모리모의 등장이었다.

‘드디어 나왔구나.’

원작 소설을 몇 번이나 읽었던 도지혁은 그녀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채찍을 사용하는 S급 마족은 단 하나밖에 없었기에.

‘뭔가 얼굴이 익숙한데….’

그런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피던 그는, 눈앞의 그녀가 얼마 전 꿈속에서 보았던 그 마족임을 금세 눈치챌 수 있었는데….

‘역시 예지몽이 맞았어.’

이번에도 꿈이 그대로 이뤄졌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흥. 하찮은 벌레 주제에….”

날카로운 눈매를 부라리며 도지혁을 쏘아보는 모리모.

“겨우 혼자서 이 몸을 막으려 하다니, 아주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그녀는 단숨에 도지혁을 찢어버릴 수 있었지만, 자신이 물먹었던 만큼 그대로 돌려주기 위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며 천천히 입을 놀렸다.

“지금이라도 바짝 엎드려서 싹싹 빌면, 봐줄 생각도 있어. …대신, 네 녀석이 죽인 만큼 낳아야 할 테지만 말이….”

“미친년.”

“…뭐?”

물론 도지혁은 그녀와 놀아 줄 생각이 없었다.

“겨우 사천왕이란 년이 고작 이런 기습조차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다니. 솔직히 기대했었는데, 마왕군 수준도 알만하군.”

“…네놈…. 내가 사천왕이라는 걸 어찌….”

“네 언니들 실력은 안 봐도 뻔하겠어. 사천왕이니 뭐니, 슬슬 소꿉놀이는 그만두고, 곱게 마계로 돌아가.”

“…!”

마치 모든 걸 아는 것처럼 말하는 도지혁의 언행에 놀란 모리모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마계와 마족의 존재는 둘째 치고, 침공 계획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기에.

“네놈. 정체가 무엇이냐?”

“얌전히 돌아간다면 대답해줄게.”

그렇게 흥미를 끌 법한 정보를 던지며 시간을 번 도지혁은, 그 사이 그녀의 능력과 수준을 파악하며 재빨리 공략법을 짜보았다.

‘기회는…, 두 번.’

“…대체 인간이 어떻게 우리를 아는 거지?”

“어째서 당연히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그렇게 정보를 흘리고 다니면서, 정말 안 들킬 줄 안 건가?”

“…뭐야?”

그렇게 도지혁이 순조롭게 시간을 끌며, 모리모에 대한 공략을 세우던 찰나.

쿠우우웅─────

갑자기 나타나 대기를 짓누르는 정체 모를 불길한 압박감.

“칫, 비겁하게, 또 무슨 짓을…!”

‘…뭐지?’

모리모와 도지혁 두 사람 모두,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기를 들고 주변을 경계하던 그 순간.

퍼엉─!

정체불명의 굉음과 함께, 도지혁의 시야에서 모리모가 사라져버렸다.

“커흑…!”

갑작스러운 습격으로 협곡에 처박혀버린 모리모는, 가까스로 놓치지 않은 금속 채찍을 쥐곤 정체불명의 적에게 대응하기 위해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렸는데….

팟──!

이미 상대는 그녀에게 접근한 지 오래.

“아, 안 돼!!!”

모리모는 미처 따라가지도 못한 엄청난 속도에 덜컥 겁을 먹으며 꽥 비명을 질렀고,

퍽─!

이내 무언가 터져나가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끝으로, 일방적인 폭력은 끝을 맺고 말았는데….

‘…무슨….’

한순간에 벌어진 상황에 아무것도 못 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도지혁은, 일순간 목덜미를 훑는 섬뜩한 감각에 무심코 검을 치켜들었다.

그러자….

터벅─ 터벅─

피어오른 흙먼지와 흩날리는 잔해 사이로, 정체불명의 인물이 피투성이 된 모습으로 천천히 걸어나왔고,

“…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바짝 경계하고 있던 도지혁은, 이윽고 밝혀진 그녀의 정체에 멍하니 검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둘러싼 새카만 장비.

아담한 키와 왜소한 체구.

‘얘가 왜….’

게이트 입구로 보냈던 진서원이, 피칠갑을 한 채로 눈앞에 서 있었다.

*

도지혁이 한창 협곡에서 작전을 펼치고 있던 무렵.

“…….”

1초라도 빨리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쉼 없이 게이트 입구로 달려가던 진서원은, 좋지 않은 예감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오빠….’

그녀는 도지혁이 자신을 혼자 보낸 순간부터, 그가 수많은 대군을 상대할 계획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챘었는데….

그가 맡겨 준 임무가 있기에, 차마 자신도 돕겠다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괜히 억지로 도우러 갔다간, 도지혁에게 미움을 살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괜찮겠지.’

진서원에게 있어서 도지혁의 말은 절대적.

그가 괜찮다고 했으니, 무조건 괜찮을 것이고, 무슨 일이 있어도 게이트를 빠져나가, 박해린에게 임무를 전달해야 했다.

하지만.

‘괜찮…겠지?’

진서원은 끊임없이 경종을 울리는 자신의 촉에 흔들렸다.

임무고 나발이고, 당장 도지혁을 구하러 가야 한다며 끝없이 경고를 보내오고 있었다.

‘어떡하지….’

도지혁을 만난 이후, 진서원은 그의 말을 받들며 살아왔다.

그가 제시했던 길들은 하나같이 틀린 게 없었고, 잠자코 따르기만 해도 금이 떨어지는, 말 그대로 탄탄대로였기에.

자연스레 스스로의 판단보다, 도지혁의 판단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느낌이 아예 달랐다.

당장 도지혁을 구하러 가지 않으면, 평생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솟구쳤다.

‘…그래도…. 오빠가 시킨 일부터….’

끝내 도지혁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애써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다시 게이트를 향해 나아가려 했다.

그런데.

쿠구구궁───

저 멀리, 희미한 폭음과 함께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지혁의 전투가 일어나고 있는 곳이었다.

“…….”

가열차게 흔들리는 진서원의 마음.

도지혁의 임무를 따르고, 후회할 건지.

아니면 임무를 져버리고, 도지혁을 도우러 갈 건지.

어느 쪽을 고르든 리스크는 존재했다.

‘이럴 때 오빠는….’

그녀는 언젠가 도지혁이 조언해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모든 선택지에 하자가 존재할 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맞아. 합리적인 선택은 아니어도, 마음은 편할 거 아냐. 그렇지?

그리고는….

결국, 다시 발길을 돌려, 격전지를 향해 달려갔다.

도지혁에게 책망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으나,

그동안 도지혁을 겪어온 그녀는 자그마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 오빠는 그 정도로 실망 안 해.’

도지혁이 고작 이 정도로 자신을 싫어할 리가 없다는 굳은 믿음을.

탓─

이윽고 협곡 근처의 절벽에 다다른 진서원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도지혁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그녀는 머지않아 협곡 입구를 지키고 있던 도지혁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어?’

마족들을 상대로 홀로 선 그는 온몸을 피로 적신 듯 새빨갛게 물들어있었고,

그의 모습을 확인한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피, 피…?’

사실 전투를 겪다 보면, 몸에 피가 묻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미처 그것까지 고려하지 못한 진서원은 단순히 그가 큰 부상을 입었다고 생각했고,

‘오빠가…. 다쳐…?’

다시 외톨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공포감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오, 오빠….”

가슴을 검게 물들이는 압도적인 절망감.

제때 도와주지 못했다는 무력함과 평생 만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주체할 수 없는 부정적인 감정은 진서원의 마음을 강하게 죄여왔고,

파직─! 파지직─!

감정에 반응하여 터져 나온 새카만 내공이 스파크를 튀기며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파지직───! 파직──!

그 순간.

협곡을 빠져나와, 도지혁과 마주 서는 한 여자.

“…….”

살기를 띤 진서원은 그 여자가 적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고,

타앗─!

더러운 암캐로부터 사랑하는 오빠를 지키기 위해, 한 마리의 살인귀가 되어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반드시 죽인다.’

천마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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