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16화 (116/165)
  • 제 116화

    업보 (5)

    주홍빛 벌판 위로 새카맣게 무장한 군대가 줄지어 움직인다.

    뒤이은 마족들도 빠르게 주둔지를 정리하며 본대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선두를 이끄는 무리는 이미 목적지를 정해둔 듯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확실하진 않지만, 게이트 입구가 있는 방향이었다.

    ‘…설마….’

    좋지 않은 예감을 받은 나는, 확인차 다급히 지도를 꺼내어 마왕군의 목표를 가늠해보았다.

    다행히 수많은 대군으로 이루어진 마왕군이 다닐만한 경로는 한정돼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경로를 추측할 수 있었는데….

    ‘…이쪽은 길이 너무 좁으니까…. 갈만한 곳은….’

    아무리 변수를 고려하여 경로를 되짚어봐도, 마왕군의 목적지는 모두 한 곳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입구….”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면,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는 게 확실했다.

    ‘…침착하자….’

    조용히 지도를 거두고, 저 멀리 우르르 움직이는 선봉대를 바라본 나는, 애써 침착함을 되찾으며 차분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정황상 마왕군의 목적지는 게이트 바깥.

    사실상 침공을 시작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시기가 너무 빨라.’

    원작 소설에선 분명 세 번째 사건이 터지고 난 이후에 침공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지금은 서해의 게이트는커녕 어떠한 전조조차 나타나지 않은 상황.

    일주일 정도 시기가 앞당겨졌던 두 번째 사건의 전례를 따져보아도, 세 번째 사건이 터지기까진 대략 두 달이나 남아있는 상황이다.

    ‘이것들이…. 선전포고부터 하겠다 이건가?’

    나는 예상을 벗어난 마왕군의 행보에 머리를 싸매며 다급히 대응책을 떠올려보았다.

    여기서 마왕군을 쓸어버리는 게 가장 좋지만, 진서원과 내가 저 수많은 대군을 상대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렇다고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 게이트를 빠져나가, 지원군을 불러오는 건 너무 늦다.

    ‘어떻게든 해야 하는데….’

    입술 끝을 질근질근 씹어대며, 최선의 방법을 추려내던 그때.

    “…….”

    어느새 철수 준비를 모두 마친 진서원이 다가와 조용히 시선을 보내왔다.

    새카만 색깔의 고글로 가려져 있었으나, 분명히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내가 지시를 내리기만 기다리는 것처럼.

    “…서원아.”

    “…!”

    제 이름을 불리자, 몸을 움찔거리며 깜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여오는 그녀.

    나는 그런 그녀의 어깨에 손을 슬쩍 얹으며 차분히 지시를 내렸다.

    “이야기 잘 들어. 지금 상황이 매우 급박해.”

    “…….”

    “너, 박해린 연락처 알지? 최대한 빠르게 게이트 빠져나가서, 박해린한테 연락해. 그리고 ‘게이트 너머로 수만의 적군이 쳐들어오고 있으니, 당장 상급 헌터들 소집해서 막아야 한다.’ 라고 전해. 이해했어?”

    진서원은 살짝 당황한 듯 잠시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오더니…,

    “…….”

    이내 지시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해왔다.

    이 와중에도 컨셉을 잃지 않는 걸 보면, 분명 잘 해내리라.

    “계속 모르는 척해서 미안해. 오늘 여기까지 따라와줘서 고마웠고, 그럼, 바로 출발하자.”

    그렇게 진서원에게 뒷일을 맡기곤, 곧바로 마왕군을 향해 몸을 돌린 순간.

    꾸욱─

    문뜩 그녀가 내 옷깃을 붙잡았다.

    “…….”

    슬쩍 뒤를 돌아보자, 그녀가 마치 ‘너는 뭘 하느냐?’라고 묻는 듯한 느낌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보내왔고,

    고글 너머로 가려진 무거운 시선에 괜히 찔려버린 나는, 변명에 가까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내가 시간 끌고 있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잠깐 시선을 보내오다 조심스레 옷깃을 놓아주는 그녀.

    “그럼, 부탁할게.”

    나는 그대로 그녀를 뒤로한 채, 홀로 마왕군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

    “진짜 징그럽네….”

    지형 정보를 이용하여 빠르게 마왕군을 추월한 도지혁은, 예상 경로에 포함된 거대한 협곡에 자리를 잡고 마왕군의 전력을 가늠해보았다.

    ‘원작대로면 대충 3만….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지.’

    마왕군의 선봉대를 이룬 마족 병력들은 대부분 C랭크 능력자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 5%의 지휘관들이 B급이며, 소수의 고위 간부가 A급.

    그리고 사천왕이라 불리는 선봉대장이 무려 S급이다.

    물론 이미 쟁쟁한 S급 헌터들과 겨뤘던 경험이 있는 도지혁이었기에, 객관적인 전력만 비교하자면 진군을 방해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

    그러나….

    위 계산은 말 그대로 대략적인 계산일 뿐.

    아무리 S급에 준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혼자서 3만 대군을 상대로 버텨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해보자.”

    그렇게 도지혁은 마음을 다잡으며 망원경을 집어넣은 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챙겨온 장비들을 꺼내보았다.

    주 무기로 들고 온 고급 브랜드의 양산형 검부터.

    투척용으로 개발된 송곳 모양의 수리검.

    그리고 시야를 가릴 수 있는 연막탄과 각종 약물이 담긴 유탄들까지.

    다리가 낫기 전을 생각하여 비상용으로 챙겨온 무기들이었지만, 손이 하나라도 부족한 지금은 매우 든든한 지원군들이었다.

    “일단….”

    도지혁은 그중에서 송곳 모양의 수리검을 집어 든 뒤, 곧바로 협곡 끄트머리에 수리검을 일일이 박아 넣기 시작했다.

    콱─! 콱─!

    “후…, 엄청 단단하네.”

    비지땀을 흘려가며 단단한 바위에 수리검을 깊숙이 집어넣는 사이, 어느덧 마왕군의 선두가 협곡으로 들어서기 시작했고,

    “조금 부족한데…. 어쩔 수 없지.”

    도지혁은 재빠르게 수리검 작업을 마무리한 뒤, 협곡을 따라 마왕군의 선두 쪽으로 다가서며 빙결탄을 꺼내 들었다.

    빙결탄은 터지는 순간 주변을 꽁꽁 얼리는 일종의 보조 아이템.

    빠각─!

    뇌관을 제거하고 안에 든 액체의 양을 확인한 그는, 마비탄을 비롯한 각종 유탄들을 꺼내어 빙결액을 뿌렸다.

    쪼록─

    그러자.

    쩍… 쩌저적…

    유탄 겉면에 꽃이 피어나듯 얼음 결정이 맺히기 시작했고,

    “이쯤이면….”

    도지혁은 빙결액의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재빨리 절벽으로 다가가, 절벽 끄트머리에 유탄들을 붙여놓았다.

    “앞으로 일곱 개….”

    그렇게 간격을 두고 준비해둔 유탄들을 차곡차곡 붙여놓길 얼마나 지났을까.

    쿵─! 쿵─! 쿵─! 쿵─!

    어느덧 협곡에 접어든 마왕군의 발소리가 협곡의 벽면을 타고 묵직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다.

    “…후우….”

    단단히 채비를 마치고 검을 쥔 도지혁은, 검 끝으로 단단한 바닥을 짚으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쿵─ 쿵─ 쿵─ 쿵─

    발밑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

    진동에 맞춰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대는 게, 애써 외면했던 긴장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

    마왕군과의 첫 전투는, 도지혁에겐 매우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원작 속에서 마왕군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건 다름 아닌 설주희.

    ‘최강고수’의 주인공인 설주희였다.

    도지혁은 그녀와 마왕군이 싸우던 장면을 절대 잊을 수가 없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소설이 망가지는 순간이었으며,

    가장 아끼던 등장인물인 설주희가 본격적으로 불행해지는 순간이었기에.

    순서는 조금 달라졌지만, 어쨌든 이 전투가 세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분기점이라는 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무조건 버텨야 해.’

    가장 큰 문제였던 다리도 완벽하게 고쳐놨고,

    골칫덩이였던 트라우마도 얼추 해소했으며,

    진서원을 시켜서 원군까지 불러둔 상황.

    비록 갑작스러운 상황에 기존 계획만큼 준비가 덜 되긴 했지만, 결코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할 수 있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인 도지혁은 검을 뽑아든 뒤, 협곡 아래의 마왕군을 흘끔 바라보았다.

    슬슬 위치에 다다른 게, 당장 시작해도 될 것 같았다.

    웅웅웅웅────

    곧바로 마력을 끌어올린 도지혁은, 저 멀리 심어둔 수리검을 바라보며 검을 치켜들었고,

    “하앗…!”

    망설임과 함께 허공을 베어냈다.

    촤아아악──────!

    그 순간.

    콰앙─! 콰아앙─! 쾅──!

    마력에 반응하여 연달아 폭발하는 수리검들.

    우지끈──!

    폭발에 휘말린 절벽은 하나의 거대한 바위가 되어, 협곡 사이를 굴러떨어지더니….

    쿠우웅───!!!!

    거침없이 전진하던 선봉대의 선두를 제대로 짓눌러버렸다.

    도지혁의 첫 번째 작전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스, 습격이다앗───!!! 다 뒤로 빠져──!!!”

    선두를 뒤따르던 본대는 일제히 진군을 멈추며 재빠르게 퇴각을 시도했는데….

    “당장 뒤로 돌아!! 습격이다아!!!”

    “다 뒤로 빠…!”

    바로 그때.

    파앙──!

    갑작스러운 습격에 우왕좌왕하던 마왕군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펑펑 터지기 시작했다.

    협곡 절벽에 가벼이 고정돼있던 각종 유탄들이, 앞선 폭발에 깨져 나가며 마왕군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이다.

    “으아아! 어, 얼어붙는다!!!!”

    “부, 불이야!! 다, 다들 떨어져!!!!”

    “사, 살려줘!!!!! 모, 몸이…! 아아아악!!!”

    얼음, 불, 마비 등등.

    온갖 효과를 지닌 공격들이 마족들을 무차별적으로 폭격하기 시작했고,

    “당장 빠져나가!!!”

    “선두는 버린다!! 당장 도망쳐!!!”

    미처 공격에 휘말리지 않은 마족들은, 혼란에 빠진 선두를 버리고 다급히 협곡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쪽으로 도망쳤는데….

    “어딜.”

    이를 가만히 지켜볼 도지혁이 아니었다.

    후미를 노리고 협곡 입구에 나타난 도지혁은,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마족들의 움직임을 통제했다.

    “저, 적이다!!!”

    “인간이다!!! 인간들의 기습이다!!!”

    “전투 준비!!!!!”

    다급히 무기를 치켜들며 전투를 준비하는 최후미의 마족들.

    자신들이 바리케이드가 되는 줄도 모르고, 도지혁을 상대하기 위해 움직임을 멈추었다.

    ‘C급, B급…. 이쪽엔 잔챙이만 있구나.’

    그 사이 능력을 이용하여 근처에 주요 간부들이 없다는 걸 확인한 그는, 홍유라로부터 훔쳐온 검술을 떠올리며 마왕군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너넨 한 발자국도 못 나간다.”

    진짜 주인공이 활약할 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