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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15화 (115/165)

제 115화

업보 (4)

게이트까지 앞으로 약 500M.

수많은 장비가 달린 탑차를 끌고 배웅해주던 박해린은, 관리소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

“제가 배웅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예요. 더 도와드리고 싶은데, 신분 노출의 위험이 있어서….”

“…이해합니다.”

“조사 마치고 나오시면, 전화 한 통 해주세요.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네.”

박해린은 못내 자신이 따라가지 못한 게 안타까운 듯 아쉬움이 묻어나는 눈빛으로 나를 슬쩍 흘겨보았고,

“…조심히 다녀오세요.”

이내 단념한 듯한 말투로 에이전트 원과 나를 내려주었다.

그렇게 박해린을 태운 탑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에이전트 원을 바라보았다.

“…….”

에이전트…, 아니, 진서원은 자신의 임무에 열심히 집중하고 있는 듯, 꽤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왔는데,

가만히 보면 볼수록 대체 무슨 이유로 국정원에 가담한 건지, 알 수 없는 의문만 커졌다.

‘진짜 뭘까….’

내 개인적인 추측으론, 원작의 설주희 포지션을 진서원이 대신 차지한 게 아닌가 싶다.

정보에 의하면, 만년 인력난인 국정원은 항상 국내 헌터들을 눈여겨보고 있고, 그중에서 괜찮은 인재를 골라 접선을 시도한다고 한다.

원작 속 설주희도 한창 헌터로서 주가를 올릴 즈음에 국정원과 일하기 시작했으니, 대충 시기를 따져보면 진서원의 등장도 썩 말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뭐, 실전 경험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나는 당분간 에이전트 원의 정체에 대해 침묵하기로 했다.

물론 요주의 인물인 진서원이 내 통제를 벗어난 영역에서 활동한다는 게 살짝 걸리긴 하지만,

어쨌든 내가 눈치를 챘고, 정 안 되겠다 싶으면 언제든지 조치를 취할 수 있기에, 일단 모르는 체하기로 했다.

“저기다.”

그렇게 곧이어 도착한 게이트 관리소.

관리소 직원은 이미 사전에 귀띔을 받은 듯, 별다른 저지 없이 우리를 게이트 입구로 들여보내 주었다.

“준비됐어?”

“…….”

“특수요원이라고 했으니까, S급 게이트 정도는 밥 먹듯이 드나들었을 텐데…. 혹시 긴장한 건 아니지?”

“…….”

진서…, 아니, 에이전트 원은 여전히 입을 다문 채로 조용히 시선을 보내왔다.

고글을 끼고 있어서 눈이 보이진 않았지만, 분명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한 눈빛을 띠고 있으리라.

“가자.”

*

휘우웅……

게이트를 빠져나온 도지혁은 눈앞에 펼쳐진 엄청난 풍경을 보며 담백한 감상을 내뱉었다.

“넓네.”

거대한 황토색 바위들과 끝없이 늘어진 광활한 메마른 초원.

살짝만 스쳐도 불이 붙어버릴 것 같은 건조한 기후까지.

분명 살면서 처음 겪은 광경이었으나, 도지혁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 꿈…. 설마 했는데, 여기였나.’

도지혁은 최근 자신이 꿨던 예지몽이,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약간 다른 점이 있다면, 박해린 대신 진서원이 게이트에 따라왔다는 것.

그리고 꿈속 도지혁과 현실의 도지혁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 정도다.

‘조사만 빠르게 끝내야겠다.’

꿈과 다르게 자신의 무력이 객관적으로 부족하다는 걸 인지한 도지혁은, 최대한 전투는 피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진서원을 이끌고 천천히 길을 나섰다.

“일단 여기부터 내려가야 할 거 같은데…. 저쪽으로 가보자.”

한편.

“…….”

에이전트 원이 되어 묵묵히 도지혁의 뒤를 따르던 진서원은, 살짝 앞선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박해린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려보았다.

-지혁 씨를 지켜주세요.

앞서 진서원을 불러낸 박해린은, 도지혁을 지켜달란 의뢰를 맡겼다.

조만간 도지혁이 위험한 게이트에 들어설 예정인데, 혹여 전투가 벌어진다면 옆에서 그를 지켜달라는 이야기였다.

이미 흑사회 사건으로 도지혁의 비밀을 알고 있던 진서원은 흔쾌히 의뢰를 받아들였는데….

그녀는 합류를 조건으로 한가지 요구를 덧붙였다.

다름 아닌, 자신의 신분을 숨기게 도와달라는 이야기였다.

진서원은 도지혁이 멋대로 합류한 자신을 보곤 실망하지 않을까 걱정했고,

덕분에 ‘에이전트 원’이라는 수상한 설정의 요원이 되었다.

물론 도지혁의 능력으로 며칠 간 연습했던 진서원의 노력이 물거품 되고 말았으나….

‘…안 들켰겠지?’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던 진서원은, 평소와 다르게 대해오는 도지혁의 반응을 은근히 즐기며 따라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품었다.

“저기 봐.”

그때, 앞서 걷던 도지혁이 걸음을 멈추더니, 절벽 아래 먼 곳을 가리키며 흥미롭다는 듯 말을 꺼냈다

“S급 괴수, 빅모스…. 실제로 본 건 처음이네.”

언젠가 상대했던 강철 곰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코끼리 괴수.

풀 한 포기 자라지 않을 것 같은 풍경과는 달리, 빅모스의 등엔 싱그러운 녹색 초원이 자라나 있었는데,

그 초원을 기반으로 수많은 괴수가 모여들어 빅모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야말로 괴수들의 왕이라는 별명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크네.’

마찬가지로 S급 괴수를 처음 마주한 진서원은, 새삼스러운 감상을 품으며 거대한 괴수를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S급 괴수라고 딱히 특별한 외형을 지닌 건 아니었으나, 특유의 설명하기 어려운 압박감을 지니고 있었다.

“…….”

그렇게 어느덧 빅모스가 시야에서 사라졌을 즈음.

두 사람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마왕군의 전진 기지로 향했다.

“이쪽부터 길이 험하니까, 조심히 따라와.”

“…….”

“아, 특수 요원한텐 이 정도는 위험한 것도 아닌가?”

“…….”

“내가 실수를 저질렀네. 미안해요. ‘에이전트 원’.”

중간 중간 도지혁이 진서원의 컨셉을 놀려먹기도 하고,

“잠깐, 정지. 앞에 스피어헤드. 두 마리.”

“…….”

“B급이긴한데…. 몇 마리 더 있을지 모르니까, 저쪽으로 크게 돌아가자.”

“…….”

괴수를 맞닥뜨리며 경로를 수정하기도 하고.

“후우…. 저기, 원 씨. 원 씨도 물 좀 마실…. 아. 마스크 때문에 못 마시려나.”

“…….”

“…잠깐 5분 정도 저쪽 좀 살피고 올 테니까…, 물도 좀 마시고 해.”

정찰을 핑계로 진서원에게 휴식 시간을 주기도 하고,

“슬슬 나와야 하는데….”

그렇게 사전 정보와 비교해가며 거닐다 보니….

“아. 찾았다.”

마침내 마왕군의 근거지에 다다르고 말았다.

*

도지혁과 진서원이 한창 게이트를 거닐고 있을 무렵.

“앗, 시작하겠다…!”

홀로 집에 남아있던 방한나는 과자를 집어 들곤 잽싸게 소파에 몸을 던지며 TV를 켰다.

최근 뜨거운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 상담 예능을 시청할 생각이었다.

[ 당신의 사랑을 도와드립니다! 고품격 연애 상담소, 러브…! 시그널! ]

최근 겪었던 도지혁과의 헤프닝으로 크게 점수를 따냈던 방한나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희망을 품곤 본격적으로 남녀 관계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도지혁과의 관계가 일반적인 케이스와는 거리가 먼 탓에, 이렇다 할 전략을 세우기가 어려웠는데….

그런 의미에서 자극적인 소재로 이루어진 ‘러브 시그널’은 아주 교과서적인 방송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우움…. 마시따….”

그렇게 방한나가 별생각 없이 과자를 와구와구 집어먹으며 행복한 모습으로 TV를 지켜보던 그때.

[ 영원한 국민 여왕, 자랑스러운 S급 헌터…! 설주희 씨 모셨습니다! ]

“…웅?”

TV 속에 익숙한 얼굴이 등장하였다.

퀸즈의 멤버이자, 도지혁의 오랜 친구, 설주희였다.

‘…설주희가 여기에 나오네…?’

이때까지만 해도 방한나는 설주희의 등장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 주희 씨가 러브 시그널에 찾아와 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아니, 천하의 설주희에게도 고민이 있습니까? ]

TV속 MC의 말마따나, 천하의 설주희에게도 연애 고민이 있다는 게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내가 설주희였으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텐데….’

“쩝….”

부러움에 입맛을 다신 방한나는 무심히 과자를 집어 입으로 가져갔고,

[ 어…. 보내주신 사연에 따르면. 남사친…, 때문에 고민이시라구요…? ]

[ 네….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한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

이어진 설주희의 사연에 그대로 얼어붙고 말았다.

‘어…, 남사친…?’

설주희와 10년이 넘게 알고 지내온 남사친.

정보가 틀린 게 아니라면, 분명 도지혁 뿐이었다.

“…어, 어라?”

당황한 방한나는 과자를 내려놓곤 다급히 TV 볼륨을 높여보았다.

그리고….

[ 사실 그 친구랑 제가 꽤 오랫동안 같이 일했거든요. ]

[ 네…. 그동안 같이 일하면서 나름 어필을 하기도 했는데, 제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잘 안 먹혔던 거 같아요. ]

속속 드러나는 너무나 명백한 증거에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마, 말도 안 돼….”

임아린에 이어 설주희까지 경쟁 상대라니.

안 그래도 어려웠던 승부가, 기하급수적으로 어려워지는 순간이었다.

‘프로듀서님은 대체…!“

방한나는 괜히 이곳저곳에 꼬리를 치고 다닌 도지혁이 원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마음을 접을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이,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생각지 못했던 설주희의 참전 덕분에 정신을 번쩍 차린 그녀는 잽싸게 먹던 과자를 몽땅 버려버렸고,

‘일단 탐색부터…!’

다급히 거실에 매트를 깔아놓곤, 스쿼트 동작을 반복하며 설주희의 방송을 염탐하였다.

*

같은 시간.

‘생각보다 너무 많은데?’

깎아지른 절벽 끄트머리에서 멀리 떨어진 마왕군을 훔쳐보던 나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커다란 군세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마왕군은 이 게이트에 정착한지 오래된 듯, 거의 마을에 가까운 형태를 이루고 있었는데,

군집한 수가 어마어마한 게, 병력을 가늠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쉽지 않겠는데….’

이윽고 망원경을 내린 나는, 한창 자료용 사진을 찍고 있던 진서원을 흘끔 바라보았다.

“…….”

시킨 일을 곧잘 하는 게, 아무 생각 없이 따라온 것 같지는 않았다.

‘귀엽네.’

그렇게 여러 가지 자료를 준비하며 사전 조사를 마친 후.

“…슬슬 돌아가자.”

“…….”

한시라도 빨리 대응팀을 구축하고자, 곧바로 발길을 돌려 게이트를 빠져나가려는 찰나.

부오오오오오옹-----

“…어?”

마왕군 쪽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부오오오오오옹-----

마치 뿔피리를 부는 듯한 묵직한 소리.

부오오오오오옹-----

정체 모를 뿔피리 소리는 총 네 번까지 이어졌고,

부오오오오오옹-----

“이건 대체….”

원작에도 등장하지 않은 마왕군의 행동에 의아해하던 그 순간.

“!”

주둔하고 있던 마왕군 전체가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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