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14화 (114/165)

제 114화

업보 (3)

꿈을 꾸었다.

이따금 자각몽 형태로 미래의 일을 나타내던 예의 그 꿈이었다.

“적당히 포기해.”

황폐해진 벌판에 선 꿈속의 나는 앞서 전투라도 벌인 듯, 바닥에 엎어진 푸르스름한 피부의 여인에게 검을 겨누고 있었는데,

분명 한 번도 본 적 없는 낯선 외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묘하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마족인가?’

원작 소설에 따르면, 푸르스름한 피부는 마족의 주요 상징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지금 꿈속의 나에게 깔린 게 마족이란 이야기가 되는데….

원작 속에서 마족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타이밍을 생각해보면, 아마 세 번째 사건 이후에 벌어진 일인 것 같았다.

“흥. 겨우 날 죽인다고 우리 계획을 멈출 수 있을 거 같아? 조만간 네 녀석과 네 아내를 갈기갈기 찢어, 괴수들의 먹잇감으로 던져 줄 테다!”

죽음을 불사한 듯. 두 눈을 부라리며 살벌한 협박을 내뱉는 마족 여성.

“…….”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꿈속의 나는 사뭇 싸늘한 표정을 짓곤, 푸르스름한 살갗에 검 끝을 쿡- 찔러 넣으며 나지막이 경고했다.

“할 수 있으면 해봐. 조만간 그 위대하신 마왕님도 내 좆집으로 써 줄 테니까.”

“이 더러운 놈이…! 감히 마왕님을 모욕하…!”

서걱--

미처 마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수급을 베어낸 꿈속의 나는, 무심한 얼굴로 검 끝에 묻은 피를 촥 털어내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

전투가 벌어진 황폐한 벌판엔 이미 수많은 마족이 널려있었는데….

꿈속의 나는 천천히 벌판을 가로지르며 어딘가로 향하였고,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그마한 바위에 기대어있는 한 인간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

낯익은 얼굴.

국정원 소속 요원 박해린이었다.

“…….”

엉망진창인 꼴을 한 박해린은 이미 목숨이 끊어진 듯, 반쯤 뜬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고,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조심스레 손을 뻗어 그녀의 눈을 감겨주었다.

‘…박해린이…?’

나는 생각지 못한 박해린의 등장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박해린이 나왔다는 건, 꿈속의 나도 국정원과 함께 일하고 있다는 뜻.

즉, 이곳이 S급 게이트에 나타난 마왕군의 전진 기지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이었다.

‘도대체….’

지금까지 이 괴상한 예지몽은 항상 의미심장한 무언가를 내포한 채로 내게 나타났다.

그런데….

이번엔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도통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하아….”

그렇게 꿈속의 내가 한숨을 내쉬며, 지친 듯한 모습으로 바위에 슬쩍 걸터앉은 그때.

“……!”

갑자기 어디선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스릉--

재빨리 검을 치켜든 꿈속의 나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는 누군가를 바라보았고,

나는 정체 모를 압박감에 덩달아 긴장하며 상대의 정체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아….’

머지않아 압박감을 흩뿌리는 범인의 정체를 알아챈 나는,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관리는커녕 대충 풀어헤친 새카만 머리카락.

불길한 기운을 뿜어내는 검붉은 갑주.

그리고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귀기 어린 눈매.

분명 아는 얼굴이었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내가 아는 사람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천마…!’

살인귀 진서원의 등장이었다.

“하필 이때….”

꿈속의 나조차도 천마와 1:1로 붙는 건 버거운 듯, 살짝 긴장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건 기회야…!’

진정한 천마의 힘을 미리 확인할 수 있다는 생각에, 진서원…. 아니, 천마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 순간.

띠리리링-- 띠리리링--

귓가에 울려대는 익숙한 소음.

“!”

나는 쩌렁쩌렁 울리는 휴대폰 벨소리와 함께, 그대로 꿈에서 퍼뜩 깨어나고 말았다.

“…으으….”

아직 가시지 않은 취기와 함께 안방에서 눈을 뜬 나는, 재빨리 머리맡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시간은 오전 8시.

상대는….

“…어.”

박해린이었다.

*

퀸즈의 멤버들은 오래전부터 도지혁이라는 마라톤을 내달려왔다.

그녀들은 각자의 성향대로, 자신만의 계획을 내세우며 도지혁을 차지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데….

다른 후보들을 무너뜨리며 가장 유력한 1등 후보로 앞섰던 임아린은 완주 직전에 제 발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고,

무엇보다 확실한 완주를 목표로 둔 홍유라는 최대한 몸을 사리며 천천히 페이스를 조절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뒤쳐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압도적인 승리를 꾀하던 설주희는….

“당신의 사랑을 도와드립니다! 고품격 연애 상담소, 러브…!”

““시그널!””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자신만의 지름길을 개척해나가기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러브 시그널, 아주 귀하디 귀한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맞습니다. 이분이 나오실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이번 주, 과감하게 시청률 두 자릿수 봅니다!”

“영원한 국민 여왕, 자랑스러운 S급 헌터…! 설주희 씨 모셨습니다!”

설주희는 최근 획기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연애 상담 방송에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블랙 로즈와의 승부 이후 첫 번째 방송 출연이기도 하고,

한창 소속 길드가 여러 가지 문제로 시끌시끌했기에,

좋든 싫든 말 그대로 화제를 쓸어 담을 수밖에 없는, 매우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주희 씨가 러브 시그널에 찾아와 주신 건 정말 감사한데…. 아니, 천하의 설주희에게도 고민이 있습니까?”

이어진 MC의 당돌한 물음에, 조심스레 대답하는 설주희.

“사실…. 꽤 많이 있어요.”

“고민이 많다고요?!”

“세상에…. 아니, 주희 씨 같은 분도 연애로 애를 먹으면, 대체 저희 같은 사람은 어떡합니까!”

MC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설주희를 드높이며, 그녀의 고민을 더더욱 돋보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물 흐르듯 방송을 이끌어가며, 자연스레 설주희의 사연을 소개하였는데….

“자아 자아. 일단, 설주희 씨의 사연부터 들어보죠.”

“어…. 보내주신 사연에 따르면. 남사친…. 때문에 고민이시라구요…?”

“네…. 알고 지낸지 10년이 넘은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한테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설주희는 정체불명의 ‘남사친’을 언급하며, 한껏 풀이 죽은 모습을 카메라 내비쳤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MC들은, 기다렸다는 듯 덩달아 애통해하며 ‘정체불명의 남사친’에 관한 의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10년이나 알고 지내셨으면, 사실상 볼 장 다 봤거든요.”

“그동안 친구로 지내왔으니, 다가가기 어려울 수 있어.”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위치를 점했다고 볼 수 있죠. 모르는 사이가 아니니까, 잴 필요가 없잖아요!”

앞서 작가들로부터 대충 귀띔을 받았던 MC들은, 수준급의 포장으로 설주희를 가련한 짝사랑녀로 만들었다.

설주희의 계획대로였다.

“주희 씨! 혹시 ‘그분’은…, 주희 씨의 마음을 알고 계실까요?”

“…네.”

“세상에, 세상에….”

“우와….”

“사실 그 친구랑 제가 꽤 오랫동안 같이 일했거든요.”

그녀는 사연을 풀어놓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도지혁의 신상을 노출하였다.

“아, 같이 일하셨다면, 혹시 퀸즈에서…?”

“네…. 그동안 같이 일하면서 나름 어필을 하기도 했는데, 제가 연애 경험이 없어서 그런가, 잘 안 먹혔던 거 같아요.”

“아니, 주희 씨, 모솔…!?”

“어쩌다 보니….”

“그동안 이곳저곳에서 대시가 들어오진 않았나요?”

“음…. 연락처를 묻는 분들도 많고, 어떻게 번호를 알아내서 먼저 연락해오신 분들도 계셨는데…. 저는….”

“이미 마음은 콩밭에 있었구나.”

카메라에 담긴 설주희의 모습은 그야말로 지고지순한 짝사랑녀 그 자체.

뒷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설주희의 편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이걸 어떻게 해명할 건데?’

설주희는 너무나 순조로이 진행되는 계획에 내심 미소를 지었다.

며칠 뒤에 이 녹화본이 전파를 탄다면, 세상 모든 여론이 그녀에게 힘을 실어 주겠지.

물론 그런다고 순순히 곱게 당해 줄 도지혁은 아니었지만….

‘내 건 내가 지켜야지.’

적어도 그의 임자가 어떤 사람인지, 세상에 확실하게 각인시킬 수는 있으리라.

*

앞서 박해린의 연락을 받았던 도지혁은 개인적으로 이혜리와 백유진의 도움을 받아, 곧 다가올 토벌을 준비했다.

그 사이 설주희가 점심식사를 핑계로 회사로 찾아오는 둥, 홍유라가 야릇한 사진을 보내오는 둥, 작은 헤프닝이 있긴 했지만….

다행히 별다른 문제 없이 순조롭게 채비를 마칠 수 있었고,

“오랜만이네요.”

마침내 박해린과 합류하여 본격적인 사전 조사에 나섰다.

해당 게이트는 강원도 철원에 위치한 S급 게이트.

메마른 협곡과 탁트인 벌판 지형으로, 광활한 환경에 맞게 거대한 몸집의 괴수들이 즐비한 게이트였는데….

“통신이 안 된다고요?”

“네. 극비리에 임무를 진행해야 해서, 통신은 불가능해요.”

웬일인지 박해린은 보안을 이유로 들며 도지혁에게 카메라를 건네곤 자료 수집을 부탁하였다.

“제가 대충 하거나 도망치면 어쩌려고요?”

“그래서 저희 쪽에서도 요원을 하나 붙이기로 했어요. 원래 제가 직접 갈 예정이었는데, 다행히 요원 하나가 남아서….”

“…요원이요?”

“아, 마침 저기 오네요. 여기에요!”

박해린은 직접 게이트에 따라가는 대신, 경호 겸 보조로 국정원에서 파견된 전투 요원을 하나 붙여줬는데….

‘…뭐야?’

도지혁은 새카만 장비로 온몸을 꽁꽁 싸맨 요원의 등장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이쪽은 ‘원’ 씨예요. 아무렇게나 편하게 부르시면 돼요.”

“…도지혁입니다. 오늘 잘 부탁합니다.”

“…….”

목소리조차 들려줄 수 없는 건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대신하는 에이전트 원.

‘어이가 없네.’

도지혁은 그런 그의 모습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슬쩍 팔짱을 꼬며 박해린에게 대놓고 물었다.

“이 사람, 강해요?”

“네. 저희 에이스예요.”

“흐음….”

너무나 당당한 대답에 외려 의심을 품어버린 도지혁은, 에이전트 원의 수준을 파악하고자, 몰래 능력을 사용하며 시선을 옮겨보았다.

그런데.

“……?”

원을 바라보던 도지혁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왜 그러세요?”

“…?”

의아하다는 듯 말을 건네는 박해린과 보기와 다르게 귀여운 몸짓으로 갸우뚱거리는 에이전트 원.

도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며 얼굴을 가린 에이전트 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 이름 : 진서원 / 잠재 랭크 : S / 보유 능력 : 천마 신공 Lv8 내공 운용 Lv8 ]

‘내 눈이 잘못됐나…?’

그의 상태창엔 적혀있어선 안 될 이름이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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