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화
업보 (2)
늦은 밤.
또다시 술에게 손을 벌린 나는, 알싸한 술기운으로 온몸을 휘감았다.
“푸하….”
내가 술을 먹는 건지, 술이 나를 먹는 건지.
내일이 주말이라는 핑계로 평소보다 더 열심히 술을 퍼부은 나는, 코가 비뚤어지게 취하여 막 비워낸 술잔을 식탁에 내려놓곤 딱딱한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대었다.
바로 몇 걸음만 옮기면 푹신한 소파와 아늑한 침대가 기다리고 있었으나….
오늘 따라 왠지, 그 편안함이 썩 껄끄럽게 느껴졌다.
“…하아….”
임아린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거리를 둔 것도 어느덧 며칠 전의 일.
그동안 나는 술독에 빠져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술과 가까이 지내왔다.
사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술에 의존하는지, 나도 잘 모르겠다.
분명 사무실에선 ‘오늘은 절대 안 마셔야지’하고 굳게 다짐하는데,
퇴근해서 집에만 오면, 무언가에 홀린 듯 술병부터 찾고 있다.
아마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렇게 빠져들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술 많이 마시면 안 돼…!
─마실 거면, 물도 꼭 많이 마셔! 술 한잔에, 물 한잔! 알았지…?
불현듯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임아린의 걱정 어린 잔소리.
식탁을 흘깃 바라보자, 반밖에 남지 않은 브랜디 병과 덩그러니 놓인 술잔이 눈에 들어왔고,
새삼스레 물은커녕 안주조차 없이 술만 들이붓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나는, 고개를 돌려 싱크대 근처의 정수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 순간.
‘아.’
나는 무심코 임아린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는 걸 눈치챘고,
이 와중에도 그녀의 말을 따르려는 스스로에게 강렬한 혐오감을 느끼고 말았다.
아무래도 머리가 덜 깨진 게 분명하리라.
“으휴….”
그렇게 호구 같은 스스로를 책망하며, 조금이라도 더 빨리 정신을 흐리기 위해 술병으로 슬쩍 손을 뻗은 그 순간.
띵동─ 띵동─
갑자기 집안에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둔해진 몸을 채찍질하며 일으킨 나는, 인터폰으로 다가가 늦게 온 손님의 정체를 확인해보았고,
‘…응?’
뜻밖에 인물의 등장에 물음표를 띄웠다.
[ 어? 프로듀서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혹시 안에 서원이 있나요…? ]
방한나였다.
*
‘…괜히 왔나….’
문 앞에 선 방한나는 괜한 불안함에 발을 동동 굴렀다.
사라진 진서원을 찾으러 왔다는 명분이 있긴 했으나, 너무 늦은 시간이라 폐를 끼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이 들었다.
‘혹시 진짜 여기 있는 건 아니겠지…?’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녀가 진서원을 찾는다는 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다.
오랜만에 진서원과 야식을 먹으려던 방한나는 그녀가 방에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렸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으로 도지혁에게 찾아온 것이기에.
정확히는 진서원이 새치기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에서 비롯된 행동이었지만,
어쨌든 진서원을 찾으러 온 건 맞았다.
그때.
철그럭─ 철그럭─
현관문 너머로 들려오는 인기척.
“!”
방한나는 순식간에 머리카락과 옷매무새를 깔끔히 매만졌고,
끼이익─
잠시 후, 문이 살짝 열리더니….
“…한나야?”
문틈 사이로 도지혁이 묘하게 불그스름한 얼굴을 살짝 드러냈다.
“아, 프로듀서님!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혹시 서원이 안에 있나요…?”
“서원이?”
상대가 진짜 방한나라는 걸 확인한 도지혁은, 그제야 현관문을 활짝 열어주며 차분히 대답했다.
“아니, 안에 없는데…. 무슨 일 있어?”
“아…. 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집에 없더라구요. 연락도 안 받고….”
“…그래?”
도지혁은 내심 아무런 일도 아닐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다른 사람이 그랬다면 몰라도, 그 진서원이라면 별로 위험할 일이 없기에.
외려 그녀에게 해코지하려는 사람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어떡하죠…? 경찰에 신고라도 할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 서원이가 애도 아니고…. 자기 앞가림은 잘하는 아이니까, 안심해도 돼.”
“그럴까요…?”
그렇게 진서원의 관한 문제를 생각보다 간단히 해결해버린 방한나는 도지혁의 눈치를 살펴보았고,
“저…, 프로듀서님.”
이내 그에게서 풍겨오는 술 냄새에 슬쩍 눈을 굴리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근데, 혹시…. 술…드셨어요…?”
그러자.
“…티나?”
도지혁이 애써 당황한 기색을 숨기며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하였는데….
“조, 조금…. …혼자 드시고 계셨어요…?”
“어…, 응.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네.”
‘무슨 일이 있으셨구나.’
방한나는 그런 그의 모습에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다는 걸 짐작했다.
물론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이상한 행동은 아니었으나….
평소 도지혁을 긴밀히 관찰해온 그녀는, 그가 심리적으로 힘들 때마다 만취할 정도로 술을 마신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 그러셨구나….”
무릇 헌터라면 치고 빠져야 할 때를 잘 알아야 하는 법.
“사실 저도 서원이랑 맥주 한잔하려고 했었는데….”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음을 눈치챈 방한나는 세상 순수한 얼굴로 시커먼 속내를 가리며 도지혁에게 미끼를 내던졌다.
“괜찮으시면, 혹시 저도 낄 수 있을까요…?”
긴장되는 순간.
“…같이 마시자고?”
도지혁은 잔뜩 기대가 담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당황한 듯 눈을 크게 굴리더니….
“…그럴까?”
흔쾌히 제안을 받아들였다.
미끼를 물어버린 것이다.
“탄산수라도 좀 타서 줄까?”
“앗, 괜찮아요! 그냥 마실게요!”
“독할 텐데….”
“마, 많이 독한가요…?”
“음…. 60도 정도?”
“그, 그럼…, 맛부터 보고 생각해볼까요…?”
그렇게 무사히 집안으로 입성한 방한나는 도지혁과 함께 술판을 벌였다.
“저…, 프로듀서님. 여기 안주가 안 보이는데, 설마 안주도 없이 드신 거예요…?”
“…어? 아, 아냐. 먹다가 치웠어.”
“정말요? 흔적이 없는….”
“…자. 이 잔 써.”
“아, 감사합니다.”
방한나가 합류한 덕분에, 도지혁은 자연스레 안주와 물을 챙기기 시작했고,
“으음…. 이거 그냥 마시는 게 훨씬 맛있어요…!”
“맛있으면 다행이네. 창고에 잔뜩 쌓여있으니까, 편하게 마셔.”
“우와…. 다 선물 받으신 거예요?”
“응. 일하다 보니까, 점점 쌓이더라고. 안 그래도 처치 곤란이었는데, 한나 덕분에….”
침울하기만 했던 술자리도 어느새 한층 밝아졌는데….
“이 여름에 내복? 설마…, 빨간 건 아니지?”
“서, 설마요! 빨간 내복이라니…. 너무 아저씨 같아요…!”
“좀 그런가? 그래도,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셨겠다.”
“맞아요! 엄청 감동하셔서…. 다음에 꼭 프로듀서님 뵙고 싶다고 하셨어요…!”
이는 두 사람 모두에게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왔다.
실연의 상처에 시달리던 도지혁은 방한나와의 대화로 본의 아닌 카운슬링을 꾀하였고,
단순히 점수 따기를 목표로 두었던 방한나는 얼떨결에 폭발적인 호감도 상승을 이룩해냈다.
“응? 왜 그러세요?”
“아니, 눈에 뭐가 들어간 거 같아서….”
“제가 봐 드릴게요…!”
적당한 핑계를 대며 도지혁의 옆으로 자리를 옮긴 방한나.
“어떠세요? 이제 괜찮으세요?”
“으음…. 아. 이제 됐다. 고마워.”
“헤헷….”
그녀는 은근슬쩍 그대로 눌러앉곤 도지혁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착실히 호감도를 높여나갔는데….
“그러니까아…. 나는 우리 팀이 잘 됐으면 좋겠는데에….”
“더 따라 드릴까요?”
“응….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지?”
“팀이 잘 됐으면 좋겠다?”
“아…, 그렇지.”
아무리 도지혁이 방한나의 페이스에 맞춰 느긋하게 마시더라도, 두 사람의 혈중 알코올 사이에 격차가 벌어지는 건 불가피한 일.
“힘드시면…. 살짝 기대셔도 돼요.”
“아…. 그 정도는 아니야. 나 아직 안 취했어.”
“진짜요…?”
“그러엄! 조금 더 마셔도 돼.”
딱 기분 좋게 취한 방한나는, 점차 무방비해지는 도지혁을 지켜보며 내심 입맛을 다셨고,
‘…귀엽네….’
그렇게 두 사람의 음주가 날이 바뀔 때까지 이어져갈 무렵.
“으….”
계속된 음주에 결국, 머리끝까지 취해버린 도지혁은, 마치 꽃을 찾아가는 한 마리의 꿀벌처럼 방한나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포옥─
얼굴을 부드럽게 짓누르는 압도적인 자애로움.
세계 최강의 몸매를 지닌 홍유라에 필적한 그녀의 흉부는 묘한 안정감을 자아내며 도지혁의 마음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고,
‘아….’
이미 지칠 대로 지쳐버린 상태에서 만취하기까지 한 도지혁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한나야, 진짜 미안한데에…, 내가 진짜 너무 어지러워서…, 진짜 조금만 이러고 있을 테니까아….”
“저는 괜찮으니까, 얼마든지 기대셔도 돼요.”
“으응…. 진짜 조금마안….”
정작 가슴을 내준 방한나는 말 그대로 미치기 일보 직전.
‘…치, 침착, 침착하자…! 제발 침착해, 방한나…! 여기서 실수하면 다 끝장이야…!’
그녀는 유례없는 흥분감에 젖어 허벅지를 꼼지락거리면서도, 죽을 각오로 정신을 콱 붙들며 도지혁의 지친 마음을 달래주었다.
*
같은 시간.
“…….”
진서원은 야밤에 새카만 선글라스를 쓴 수상쩍은 여성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갑자기 날아온 메시지에 반응하여 순순히 나와줬더니, 뜬금없이 국정원 소속 요원이란 걸 밝히며 다짜고짜 의뢰를 요청해왔기 때문이다.
“…갈래요.”
이내 흥미가 떨어져 버린 진서원은 가차 없이 뒤를 돌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자, 잠시만요…! 서원 씨…!”
스스로를 '박해린'이라 소개했던 수상쩍은 여인은, 진서원의 돌발 행동에 화들짝 놀라며 다급히 뒤를 쫓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