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륵─ 스륵─
단추에 감긴 끈을 천천히 풀어낸다.
손가락 끝에 붙들린 끈이 길어질수록 점점 커지는 묵직한 긴장감.
이윽고 모든 끈을 풀어내자, 굳게 닫혀있던 서류 봉투가 슬쩍 입을 벌린다.
이 안에 모든 게 담겨있다.
“…….”
다시 한번 깊게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숙여 봉투 안쪽을 흘끔 들여다보았다.
질긴 봉투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는 두툼한 종이 뭉치와 얇은 태블릿.
홍유라가 말했던 그대로다.
스윽─
나는 그대로 태블릿만 꺼내어 서류 봉투를 조수석에 내려놓곤, 곧바로 태블릿의 전원을 켜 보았다.
번쩍─
버튼을 누르자, 로고를 띄우며 밝아지는 액정.
태블릿이 완전히 켜지기까지 약 30초 동안. 머릿속에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정말 이걸 보는 게 맞을까.
사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은 게 아닐까.
대체 내가 이걸 봐서 무슨 이득이 있는가.
그렇게 죽고 못 살던 사랑스러운 여자친구의 실체를 알아내어, 무얼 하고 싶은 걸까.
잠재의식 속 근본적인 무언가가 임아린에 관한 부정적인 생각을 조금씩 억제하는,
마치 임아린이 나쁘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하지만….
그런 마음이 들면 들수록, 동시에 진실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더더욱 굳어지기도 했다.
임아린의 실체를 마주하며 얻게 될 좌절과 근심보다, 이 세계의 결말을 뒤흔드는 요소가 더 불편하게 느껴졌기에.
아무것도 모르고 당하느니, 차라리 직접 겪으며 통제하는 쪽이 훨씬 더 낫다는 생각이었다.
[ 사용 준비가 완료됐습니다. ]
그때, 작은 안내문과 함께 완전히 켜진 태블릿.
스윽─
나는 조심스레 잠금을 풀어, 화면 중심에 놓인 익숙한 문서 프로그램을 실행시켰고….
마침내 ‘임아린 보고서’라고 적힌 단출한 표지의 문서와 마주하고 말았다.
“…….”
쿵쾅쿵쾅 귓가에 울려대는 거센 심장 박동.
‘…가볍게…, 가벼운 마음으로 보자….’
나는 긴장된 마음에 침을 꿀꺽 삼키곤, 애써 가벼운 손놀림으로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문서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
20xx년 1월, 임아린 천화 그룹 간부와 접선.
……
문서는 매우 신경 써서 제작한 듯 시간 순서대로 깔끔히 잘 정리돼있었다.
……
당시 CCTV에 찍혔던 임아린의 모습. 현재 원본 소실됨.
……
그 덕분인지 문서에 쓰인 내용과 증거들은 너무나 원망스러울 정도로 선명히 눈에 들어왔고,
……
해외 가상 화폐 거래소로부터 거액이 입금된 정황.
입금된 금액 대부분은 여러 차례에 걸쳐, 당시 주요 간부들의 계좌로 옮겨졌다.
……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애써 가벼이 놀리던 손가락이 조금씩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
“으음….”
그 어느 때보다 한껏 진지한 표정을 띤 임아린은 침대에 늘어놓은 옷가지들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뭐가 좋을까….”
일부러 버리지 않고 챙겨둔 아카데미 제복부터.
건강미를 강조하는 레깅스와 민소매.
나체나 다름없는 적나라한 디자인의 전신 스타킹.
그리고 흔히 ‘역바니’라고 부르는 괴상한 슈트와 하트 모양 스티커까지.
하나같이 옷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디자인이었으나, 그녀는 익숙하다는 듯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혁이가 뭘 좋아할까….’
얼마 전 도지혁이 여태껏 피임약을 복용해왔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임아린은 연인 사이의 ‘신뢰’를 강조하며 도지혁과 약속을 맺었다.
약을 먹었다면, 반드시 서로에게 복용했다는 걸 말해주기로.
아무리 내용이 어떻든, 서로에게 결코 비밀은 만들지 말자는 약속이었다.
물론 그동안 신뢰와 거리가 매우 먼 행보를 보여온 임아린이었지만….
도지혁은 아직 그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고,
만에 하나 알아챈다 하더라도, 그동안 쌓아온 애정과 틈틈이 심어둔 ‘보험’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이걸로 할까…?”
그렇게 고민을 마친 임아린은 하트 모양 스티커와 작은 플러그를 집었다.
속옷 대신 착용하여, 도지혁을 놀라게 할 생각이었다.
“히….”
깜짝 놀랄 그의 반응을 상상하며 준비를 끝낸 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산부인과에서 처방받아온 약을 슬쩍 꺼내 들었다.
도지혁 몰래 처방받아온 배란 유도제였다.
“흐흥….”
콧노래까지 불러가며 배란 유도제 섭취하는 임아린.
당연히 복용 사실을 도지혁에게 밝힐 생각은 없었고,
그녀는 살짝 허전한 아랫배를 슬슬 쓰다듬으며, 어서 그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렸다.
“언제 오려나….”
그토록 ‘신뢰’를 중요시하며 도지혁을 설득했던 그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녀는 숨기고 있는 게 너무나 많았다.
물론 막 계획을 짜던 시절엔 그녀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내심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의 계획이 차차 순조롭게 진행될수록 점점 죄책감에 무뎌지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 브레이크가 부러져버린 그녀는, 어느덧 당연하다는 듯이 거짓말을 내뱉는 수준까지 이르고 말았다.
한때 그 누구보다 순수했던 그녀의 사랑이….
추악한 욕망으로 변질해버린 것이다.
‘일단 밥부터 먹이고….’
그렇게 도지혁을 기다리며 끝없는 시뮬레이션을 반복하던 그때.
삑─ 삑─ 삑─ 삑─
갑자기 집안에 울려 퍼지는 도어락 소리.
드디어 도지혁이 퇴근한 것이다.
‘왔다…!’
자기도 모르게 해맑은 표정을 띤 임아린은, 반사적으로 입고 있던 돌핀팬츠를 추켜올리곤, 자연스럽게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재빨리 현관을 달려갔다.
마치 주인이 오기만 애타게 기다리던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다.
벌컥─
“어서 와…!”
임아린은 마침내 현관에 모습을 드러낸 도지혁의 모습에 한껏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자상한 미소를 띠곤 자신의 인사를 받아 주리라 기대하며.
“오늘도 고생했어…!”
그런데….
“응”
왠지 모르게 그가 담담한 반응을 보여오는가 싶더니,
한 마디 말도 없이, 신발을 벗곤 슬리퍼로 갈아신기 시작했다.
‘…어라?’
임아린은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채 수 있었다.
돌아오는 반응이 적다는 건, 지금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
아무래도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있던 것 같았다.
‘…어떡하지….’
살짝 초조함을 느낀 임아린은 입술 끝을 질끈 깨물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기분 나쁜 남편을 달래는 건 전적으로 아내의 몫.
어떻게든 그의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힘들었지…?”
우선 어떤 이유로 기분이 나쁜지부터 파악하기로 한 그녀는, 은근슬쩍 손을 뻗어 짐부터 정리해주기로 했다.
“가방 이리 줘…! 내가 치울게…!”
하지만.
“괜찮아.”
“…어, 어…?”
“내가 할게.”
“어…, 응….”
도지혁은 완곡하게 거절하며 가방을 내어주지 않았고, 끝내 스스로 짐을 정리하였다.
“…….”
평소 안방에 가방을 놓던 것과는 달리, 잘 보이는 거실 소파에 가방을 슬쩍 내려놓는 도지혁.
마치 금방이라도 자리를 뜨려는 사람처럼 보였다.
‘…기분이 많이 안 좋은가…?’
도지혁의 기분이 매우 안 좋다는 걸 감지한 임아린은, 어떻게든 기분을 달래 줄 요량으로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지, 지혁아…! 편한 옷 꺼내놨으니까, 먼저 씻고 올래…?”
그의 기분을 풀어 줄 수만 있다면, 한 마리의 개가 되어 바닥이라도 길 수 있는 심정.
임아린은 그 어느 때보다 헌신적인 마음으로 도지혁에게 슬쩍 천천히 다가섰다.
“일단 옷부터 벗고…!”
그러나.
“아냐.”
도지혁은 그런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오늘은 밥부터 먹을게.”
정확히는 받아주지 않은 것에 가까웠다.
“아…. 그, 그럼, 밥부터 차릴게…! 조금만 기다려줘…?”
연이은 거절에 살짝 충격을 받았던 임아린은, 퍼뜩 정신을 차리며 곧장 부엌으로 향했고, 온갖 마법을 동원해가며 재빠르게 저녁을 차리기 시작했다.
‘이, 일단 배부터 채워놓고…!’
우선 속을 든든히 채운 뒤에, 자신의 몸으로 얼버무리며 은근슬쩍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낼 계획이었다.
“지혁아…! 밥 다 차렸어…!”
그렇게 순식간에 차려진 으리으리한 저녁상.
“오늘은 네가 좋아하는 걸로 준비했어…! 많이 먹어…!”
“…고마워. 잘 먹을게.”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표정으로 식탁에 자리 잡은 그는, 무심한 손길로 가장 가까운 나물 반찬을 집어 입으로 가져갔고,
“…….”
그 모습을 지켜보던 임아린은 초조함에 몰래 발을 구르며 조용히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 잠시 후….
“…어, 어때…?”
참다못한 그녀가 조심스레 감상을 묻자.
“맛있네.”
다행히 도지혁이 만족스러운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 그래…?”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호평에 살짝 마음이 놓인 임아린은, 무심코 긴장을 풀며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곤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네가 전에 잘 먹던 게 생각나서 했는데, 입맛에 맞아서 다행이다…! 그럼 이것도….”
그 순간.
“저기, 아린아.”
갑자기 끼어들며 말을 끊어버리는 도지혁.
“…으, 응…?”
임아린은 묘하게 차가운 그의 반응에 몸을 움츠리며 다소곳이 손을 모았고,
그녀가 손수 차린 식탁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도지혁은, 돌연 시선을 옮기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없어?”
“…어, 어…? 가, 갑자기…?”
임아린은 어딘가 집요한 그의 물음에 굉장히 당황하고 말았다.
자신이 숨겨온 걸 세어보면, 밤낮을 지새워도 모자랐기에.
‘뭐, 뭐지…?’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인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냉철함을 잃어버린 채로 다급히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가 왜 갑자기 자신에게 고백을 요구하는 것일까.
혹시 뭔가 알아챈 게 아닐까?
홍유라, 설주희 그 망할년들이 뭔가 바람을 불어넣었을지도 모른다.
아냐….
어쩌면 그냥 떠보려는 걸지도 모른다.
욱하는 성격을 지닌 그가 비밀을 알아챘다면, 보나 마나 불같이 화를 냈을 게 뻔하니까.
아마 이상한 이야기를 듣곤 슬쩍 떠보려는 속셈이거나,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분위기를 잡으며 고백을 유도하려는 게 분명했다.
‘그, 그래, 분명 그럴 거야…!’
초조한 마음에 멋대로 판단을 내린 임아린은 도지혁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입을 열었다.
“어, 없지…! 우리 비밀 없이 지내기로 했잖아…?”
평소와 다름없는 거짓이었다.
“…….”
일순간 묘하게 일렁이는 도지혁의 눈빛.
임아린은 그런 그의 반응에 살짝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켰고,
“…그렇구나.”
정말로 큰 의미가 없었는지, 도지혁은 짧은 대답과 함께 시선을 거두곤 조용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자, 잘 넘어갔나…?’
그렇게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한 임아린은, 그저 그의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랬으리라 생각하며 예정대로 헌신적인 봉사를 계획하였는데….
“이만 갈게.”
도지혁은 식사를 마치자마자, 망설임 없이 집을 나서고 말았다.
‘…어…?’
처음으로 임아린의 계획이 엎어져 버린 순간이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임아린의 집을 나선 직후.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엘리베이터 입구에 달린 패널의 숫자가 하나씩 바뀌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필 지하에서 출발하느라, 꽤 오래 걸릴 것 같았다.
“…….”
임아린은 내게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고 대답해왔다.
여느 때처럼 한없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사실 그녀의 입에서 대답이 튀어나오기 전까진, 적어도 나에게만큼은 사실대로 고백해주리라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만약 정말로 그녀가 모든 사실을 밝히고 진심으로 사과해온다면, 정말로 그런다면 그녀에게 한 번의 기회를 줘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녀가 말로 꺼내기조차 어려운 악독한 짓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설령 그녀가 저질러온 모든 악행의 증거를 내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 하더라도.
어쨌든 내가 선택한 여자이니, 모든 걸 감수할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임아린은 또다시 거짓을 이야기했다.
물론 진정으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걸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내 일거수일투족과 휴대폰까지 감시하는 게 아니라면, 홍유라로부터 증거를 받았다는 것까진 알아채지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내뱉은 단 한 번의 거짓말이 내 마음에 확실한 파동을 일으켰고,
잔잔했던 파동은 어느새 거대한 쓰나미가 되어 내 마음을 엉망진창 헤집어놓더니, 이윽고 임아린이라는 인간에 대한 끝없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대체 지금까지 내게 몇 번이나 거짓말을 하고 얼마나 많이 속여온 것일까.
여태껏 내게 속삭여온 사랑이 전부 거짓이었던 건 아닐까.
사실 내가 아는 ‘임아린’이란 여자는 애초부터 잘 만들어진 가짜였던 게 아닐까.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쉽다고 하는데, 정말 나를 속이면서 자그마한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한 걸까.
그렇게 끝없이 샘솟던 의심은 금세 내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녀에 대한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
다행인지 아닌지, 생각했던 것만큼 막 충격에 빠지지는 않았다.
이미 홍유라와 설주희에게 귀띔을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마음속 깊은 곳에 나도 모르는 희망을 품고 있어서 그런 걸까.
임아린의 실체를 마주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이 크게 요동치지는 않았다.
사실 그동안 여러 일을 거치며 나도 알게 모르게 성장한 건 아닐까?
[ 7 ]
지하에서 출발한 엘리베이터는 아직도 중간밖에 오지 않았다.
최상층에 가까워서 그런가, 꽤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아마 조금만 더 기다리면 여기까지 올라오겠지.
마음 같아선 더 빨리 내려가고 싶었으나, 마땅한 선택지는 없었다.
계단으로 내려가기엔 너무 높고,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건 너무 무모하기에.
그래서 나는 잠자코 숫자가 바뀌는 걸 응시하며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이젠 정말 내려갈 일밖에 안 남았으니까.
*
텅 빈 집안.
그 중심에 선 임아린은 천천히 눈을 깜빡여보았다.
당연하게도 집안 풍경은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고,
유일하게 벽면에 달린 시계만이 야속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었다.
“…….”
임아린은 아직 집안에 남아있는 도지혁의 미약한 온기를 느끼며 천천히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는 평소와 달리 비어있는 옆자리를 매만지며 생각해보았다.
분명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고.
‘…눈치…챘나…?’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역시 그가 자신에 관한 비밀을 알아챘을지도 모른다는 것.
설주희와 홍유라로부터 뭔가 이야기를 듣고, 감춰진 진실을 눈치챘다는 것이다.
정황상 제일 그럴듯한 추측이기도 하고,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싸늘한 반응을 보일만 한 이유가 없었는데….
동시에 섣불리 단정 지어버릴 수도 없었다.
말 그대로,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기에.
만약 지금껏 저질러온 것들을 도지혁이 모두 알아챘다면, 분명 무슨 말이든 꺼내왔을 거다.
왜 그랬냐고 묻거나, 진짜 저지른 게 맞느냐는 둥, 진실을 물어왔으리라
그러나 도지혁은 ‘숨기는 게 없느냐’라는 애매한 질문만 던지곤, 별다른 이야기는 꺼내오지 않았고,
그냥 피곤하다는 말과 함께 휙 떠나버렸다.
이로서 추측할 수 있는 건, 도지혁이 아직 범행에 확신을 품지 않았다는 것.
아니면….
모든 진실을 알고도 일부러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
임아린은 지금껏 자신이 관찰해온 ‘도지혁’의 성격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이제는 사라져버린 ‘황제’ 도지혁부터 현재의 프로듀서 도지혁까지.
양쪽 모두 도지혁 본인이기에 기본적인 성격이나 성향은 매우 비슷했지만, 지내온 환경에 따른 약간의 차이점은 존재했다.
예를 들어, 황제 도지혁은 흔히 말하는 영웅에 가까운 행보를 보여주었다.
그는 아무런 기반도 없이 오직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S랭크 헌터가 되어, 일일이 짚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난 업적을 세우곤 당당히 영웅이라 불리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범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에 뽑히기도 했는데….
세상 완벽할 것 같았던 그에게도 유일한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여성에게 약하다는 것.
정확히는 색(色)에 약하다는 것이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황제의 이명에 혹했건, 도지혁이란 인물에게 반했건, 그를 찾는 여성들은 그야말로 지천에 널려있었고,
결국, 기다리다 못한 설주희의 맹공에 맥없이 함락되고 말았다.
문제는 그 이후로 약점이 드러난 도지혁에게 수많은 여성이 들이대기 시작했다는 건데,
설주희의 임신을 틈타 맹공을 펼친 홍유라가 당당히 첫 번째 첩의 자리를 차지해냈고,
유일하게 임아린만 마지막까지 순정을 지키는 꼴이 되었다.
그에 반해, 현재의 프로듀서 도지혁은 어떤가?
나름 견줄만한 업적을 기리긴 했으나, ‘프로듀서’라는 직업 덕택에 앞선 황제처럼 영웅으로 칭송받진 않았다.
당연히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지도 않고,
퀸즈라는 막강한 가림막 덕분에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받게 됐으며,
한 번에 한 여성만 바라보는 매우 건전한 사상을 갖게 되었다.
그대신 오랫동안 관리자 역할을 맡은 영향으로 살짝 냉철한 면이 두드러졌는데….
현재 그의 성격을 따져보면, 증거가 확실한 상황에서 모든 걸 눈치채고도 가만있을 사람은 절대 아니었다.
‘그럼 아직 의심하는 수준인 건가….’
사실 도지혁은 그동안의 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자백의 기회를 주고 추궁하지 않았으나,
그런 그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임아린은 멋대로 단정 지어버리고 말았고,
도지혁이 살짝 흔들리고 있다는 추측에 무게를 실으며 앞으로의 계획을 떠올려보았다.
“…….”
지금의 도지혁에겐 몇 가지 암시가 걸려있다.
설주희나 홍유라에게 걸어뒀던 종류와는 다른, 대체로 신뢰에 관한 내용으로,
웬만한 정신력으론 암시를 억누르는 게 불가능하니, 제대로 작동되고 있다는 전제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약만 아니었어도….’
임아린은 변기 속으로 사라진 피임약들을 떠올리며 조용히 이를 갈았다.
이번에 확실히 임신했더라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었을 터.
하지만 이미 벌어지고 지나간 일이기에, 아쉬워도 어쩔 수 없다.
“…하아….”
어쨌든 지금 할 수 있는 건 평소보다 더 헌신적으로 다가가며 확실하게 정실의 입지를 굳히는 것.
물론 홍유라와 설주희에게 역풍이 불게 하여서 확실히 눌러버리는 게 최고의 방법이지만,
까딱 잘못하다간 같이 휩쓸릴지도 모르니, 당분간 몸을 사리는 게 맞다.
‘…그 시계만 있었더라면….’
임아린은 언젠가 사용했던 ‘회중시계’를 떠올리며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정확한 입수 방법만 알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시간을 되돌렸을 텐데.
“하아….”
다시 한번 무거운 한숨을 내쉰 임아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안방으로 향했고,
도지혁의 마음을 되돌릴만한 방법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
한편.
“…진짜?”
설주희는 홍유라로부터 도지혁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혁이가 직접 증거 받아갔어. 조금만 기다리면 될 거야.”
임아린에 관한 증거를 직접 건네줬으니, 조만간 임아린도 죗값을 치를 거라는 이야기였다.
“하! 개 같은 년. 빨리 그년이 관짝으로 기어들어가는 꼴을 봐야 하는데….”
당연히 홍유라는 자신이 도지혁과 맺었던 일련의 약속만 쏙 빼놓은 채로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아무것도 모르는 설주희는 그저 기사회생했다고 생각하며 본격적으로 도지혁을 차지할 생각에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가지? 하와이?”
“…주희야.”
“왜. 넌 하와이 싫어? 아…. 넌 유럽으로 가고 싶다고 했지?”
“그게 아니라…. …우리도 아직 지혁이한테 용서받은 거 아니야.”
“용서? 우리가 왜 또 용서를 받아.”
설주희는 자신이 저지른 짓들을 모두 용서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있었다.
“용서는 도지혁이 받아야지. 감히 그딴 년한테 속아 넘어가? 이 정도면 다리몽둥이를 부숴서 집안에 묶어놔도 합법이야.”
“…….”
홍유라는 잠자코 대답을 아끼며 자신의 가슴을 강제로 움켜쥐던 도지혁의 모습을 떠올렸다.
평소엔 볼 수 없었던 강압적인 태도로 자신을 짓누르던 그의 모습을.
그녀는 도지혁이 선천적으로 누군가에게 깔려 살 인물이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마치 강하게 누르면 누를수록 강하게 튕겨 나오는 스프링처럼.
그런 그의 편린을 맛본 홍유라는 이미 자신이 취해야 할 스탠스를 염두에 두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천진난만하게 계획을 펼치는 설주희를 보며 살짝 안타까운 마음을 품었는데….
‘…이게 기회일지도 몰라.’
한편으론 설주희가 임아린과 함께 넘어지는 걸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유유상종이 따로 없었다.
“…혹시, 진짜로 지혁이한테 뭐 하려는 건 아니지?”
“그럼, 가만있게?”
홍유라의 물음에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친 설주희는 팔짱을 꼬며 말했다.
“임아린은 알아서 나가떨어질 테니까, 지혁이 주변에 맴도는 쌍년들부터 싹 쳐내야지.”
“뭐?”
설주희가 말하는 ‘쌍년’들이란, 도지혁과 연관된 여인들.
팀 멤버인 방한나와 진서원, 그리고 세진 길드의 단장 이혜리를 뜻하는 것이다.
“그 걸레년들부터 정리하고…. 함부로 눈을 못 굴리도록 아예 은퇴를 시켜야겠어.”
“지, 지혁이를 은퇴시키겠다고…?”
“집안에서 조신하게 내조나 하라고 해야지. 임신한 와이프가 원하는데, 어쩔 거야?”
홍유라는 설주희의 원대한 계획에 살짝 놀라고 말았는데….
내심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설주희가 알아서 나가떨어지겠다는 걸 막아설 이유는 없으니까.
“…난 모르는 일이야.”
“응? 넌 싫어?”
“나는…, 내가 알아서 할게. 같이 힘내보자.”
“흐응….”
설주희는 은근슬쩍 선을 긋는 홍유라의 발언에 살짝 눈을 가늘게 떴다.
아무리 홍유라라도, 적이 되면 봐줄 수 없기에.
설주희의 사랑은 그런 식이었다.
“그래…, 알아서 잘해봐. 나중에 한입 달라고 하지 말고.”
“삐졌어?”
“삐져? 내가? 흥!”
“알았어. 그럼 조금만 도와줄게.”
“너….”
눈치를 살피던 홍유라는 은근슬쩍 설주희의 기분을 풀어주었고,
‘주희를 잘 자극하면….’
‘유라가 도와주면 낙승이지.’
같은 목적을 둔 그녀들은,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시작 선에서 밀려났던 치타들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