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린과의 회담을 마친 후.
적당히 이야기를 마치고 식당을 빠져나온 나는, 마왕군의 등장에 대해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 시기에 마왕군이라니…. 예상보다 너무 빠른데.’
분명 원작에서 국정원이 마왕군의 존재를 본격적으로 알아채는 건 세 번째 사건 직후.
한창 어수선할 시기를 맞아 대대적으로 게이트를 점검하던 도중에 마왕군의 흔적을 찾게 되고, 앞서 열린 서해 게이트 사건과 연결 지으며 마왕군의 실체를 제대로 알아차리게 되는데….
이번엔 순서가 완전히 반대.
세 번째 사건에 돌입하기도 전에 마왕군이 먼저 나타나 버린 것이다.
어쨌든 내게 사전 정보가 들어왔고, 적당히 대처할 수 있는 범위이긴 하지만….
이런 식으로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는 건 매우 곤란하다.
‘아냐. 아직 조사 단계니까…. 시기상으로 대충 맞을 수도 있어.’
물론 아직 일말의 희망은 있다.
박해린의 이야기에 따르면, 아직 게이트 속에서 발견된 문명의 정체에 대해 파악하지 못한 눈치다.
본격적으로 준비를 마치고 게이트 조사를 마친 뒤에, 그놈들이 지성을 지닌 마족들이라는 걸 알아차릴 즈음이면 원작의 시기와 얼추 비슷할 수도 있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예정보다 조금 일찍 퇴근길에 오른 나는, 전날에 약속했던 대로 임아린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최근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아서, 아마 오늘은 그녀가 작정하고 들러붙지 않을까 싶은데….
혹시 모르니, 올라가기 전에 미리 챙겨둔 피임약을 먹고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슬슬 약도 다 떨어져 가는 거 같은데. 미리 처방받아야 하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슬슬 막히기 시작하는 도로를 뚫고 차를 몰길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새 도착한 임아린의 아파트.
바스락바스락─ 톡─
주차를 마치고 가방 깊숙한 곳에 숨겨둔 피임약을 꺼낸 나는, 캡슐 한 알을 입에 털어 넣곤 자연스럽게 집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여느 때처럼 비밀번호를 누르며 임아린의 집안으로 들어섰는데….
“…응?”
집안에 아무도 없는 듯 모든 전등이 어둡게 꺼져 있었고, 오직 센서에 반응한 현관 조명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아린아?”
나는 별생각 없이 임아린을 부르며 신발을 벗곤 현관으로 들어섰다.
“…없나?”
그리고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 걸 확인하곤 집안으로 발을 내디딘 찰나.
스윽─
갑자기 뒤에서 느껴지는 정체불명의 인기척.
“!”
인기척에 반응하여 황급히 뒤를 돌아본 그 순간.
갑자기 전등이 화악 켜지더니, 무언가 팡팡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축하해요!”
“까, 깜짝이야….”
뭔가 했더니, 임아린이 나를 놀래주려고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헤헷…. 많이 놀랐어?!”
여전히 사랑스러운 미소를 짓곤 천진난만하게 감상을 물어오는 그녀.
나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장단을 맞춰주었다.
“너무 놀라서 심장 떨어질 뻔했어.”
“정말!? 헤헤…. 안 놀랄 줄 알고, 엄청 공들였지!”
그녀는 뿌듯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은근슬쩍 내 품에 폭─ 안겨왔는데….
무의식적으로 안겨온 그녀의 등을 쓸어내리던 도중, 문득 앞서 그녀가 말했던 ‘축하’에 관한 의문이 들었다.
“근데 뭘 축하한다는 거야?”
내 기억이 틀리지 않았다면, 오늘은 아무런 기념일도 아니다.
대체 그녀가 무얼 축하한다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궁금해?”
“응. 어엄청! 궁금해.”
임아린은 내 과장된 반응에 사뭇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스윽─
슬쩍 몸을 떼어내곤 자신의 아랫배에 양손을 모으며 한껏 기대에 찬 목소리로 넌지시 내뱉어왔다.
“생겨버렸어.”
딱 한마디.
그녀가 내뱉은 한마디에, 알 수 없는 감각이 발끝에서 찌르르 솟아난다.
“…어?”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나는, 뒤늦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휩싸이며 조심스레 되물어보았다.
“그…. 뭐, 뭐가…, 생겼다는 거야…?”
그러자.
임아린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당당히 선언해왔다.
“우리 아기.”
나는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말았다.
*
쏴아아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거센 물줄기.
“…….”
멍하니 몸을 적시고 있던 나는, 몇 번이고 되새겼던 임아린의 임신 소식을 다시금 떠올려보았다.
─생겨버렸어. 우리 아기.
계속해서 떠올릴 때마다 매번 간담이 서늘해지는 게, 그동안 봐왔던 유부남들의 마음을 조금 이해할 것 같았다.
‘아니…. 진짜로…?’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나는 그동안 압도적인 성능을 자랑하는 백일제약의 피임약을 꾸준히 복용해왔다.
그런데 임신이라니!
어찌어찌 좋게 생각하려고 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분명 안 빼먹었는데….’
혹시 내가 약을 빼먹은 게 아닐까 하고 곰곰이 과거를 되돌아봤지만, 항상 그녀와 만날 때면 잘 생각이 없더라도 빠짐없이 약을 복용해왔다.
그렇다고 복용 방법을 틀린 것도 아니고, 약이 안 듣는 체질도 아닌데….
“…미치겠네….”
임아린이 지금 임신을 해버린 이상, 나중에 벌어질 세 번째 사건이나 마왕군과의 결투에선 사실상 빠지는 수순.
하필 가장 큰 전력 중의 하나인 그녀가 빠지는 건 굉장히 치명적이다.
‘어떡하지….’
그렇게 하염없이 무거운 한숨만 푹푹 내쉬어가며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길 얼마나 지났을까.
‘…안 되겠다….’
결국, 결단을 내리며 샤워기를 잠가버린 나는, 재빨리 욕실을 나서며 옷을 걸쳐 입곤 거실로 향했다.
“흐흐흥….”
언제 케이크까지 사왔는지, 임아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으리으리한 저녁상과 케이크를 세팅하고 있었는데….
“어서 와서 앉아!”
자연스레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은 나는, 식탁을 살피는 척 그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음…. 이 정도면 되겠지?”
아무것도 모른 채, 기념일을 준비하는 그녀.
더 늦기 전에 말해야 한다.
‘…할 수 있다….’
깊은 심호흡을 내쉬며 마음을 가다듬은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보았다.
“저…. 아린아.”
“응?”
그녀는 촛불에 불을 붙이려는 듯 검지를 치켜들고 흘끔 눈을 마주쳐왔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짝 죄책감을 느낀 나는, 무거운 입술을 힘겹게 떼어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임신…. 진짜 확실해?”
“응…?”
“그…. 정말로 임신한 게 맞아?”
임아린은 손가락을 거두곤 무슨 의미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무래도 내가 말하려는 걸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말해야 한다.
“…아린아. 내가 계속 생각해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 사이에 애가 생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아니, 말이 안 돼.”
“무슨 말이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듯 살짝 불안한 표정을 짓는 그녀.
바스락─
주머니 속에 숨겨두었던 약을 테이블에 슬쩍 올려두자, 그녀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게 뭐야…?”
“…남성용 피임약이야.”
“으, 응…? 피, 피임약이라니….”
“…지금까지 이거 먹고 너랑 잤어. 한 번도 빠짐없이, 매번.”
순간 임아린의 얼굴에서 감정이 사라진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인지한 나는, 힘겹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동안 숨겨서 미안해.”
그러자.
천천히 시선을 옮기며 테이블에 놓인 약을 바라보는 임아린.
“아….”
그녀는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내뱉으며 나지막이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서 그랬구나…?”
왠지 모르게 담담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
‘뭐, 뭐야?’
그녀로부터 풍겨오는 알 수 없는 섬뜩함에 몸을 움츠린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레 입을 열어보았다.
“…아, 아린아?”
바로 그 순간.
“아아…. 깜짝 놀랐네.”
“어, 어…?”
임아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랑스러운 얼굴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난 또…, 무슨 문제라도 있는 줄 알았잖아…!”
‘…뭐, 뭐지…?’
따라가기 힘든 상황에 얼빠진 모습으로 멍하니 눈을 굴리고 있길 잠시.
쪼르르 다가온 임아린이 내 다리 위에 앉아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진짜 다행이다…. 약 때문에 그런 거 맞지…? 혹시 다른 문제 있는 거 아니지…?”
“어…. 아린아? 이게 무슨….”
“사실…, 나 임신 안 했어….”
“…뭐?”
임신을 안 했다니.
그럼 날 속였다는 말인가?
“미안해…. 많이 놀랐지…?”
“아린아. 내가 지금 이해가 잘 안 가서 그러는데….”
“그치만….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그렇게 많이 했는데, 임신을 안 했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무슨….”
임아린은 필사적인 얼굴로 내게 산부인과를 다녀왔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의사 선생님이, 임신 안 한 게 이상한 수준이라고, 남편도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그러셨어…!”
괜히 얼굴이 화끈거린다.
알고 보니 임아린은 줄곧 내가 아이를 가지고 싶어한다고 착각하여 피임을 하지 않았고,
막상 임신이 안 되는 걸 이상하게 여기며 병원에 들렀는데,
거기서 내게 무언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곤 이 말도 안 되는 작전을 꾸몄다는 이야기였다.
‘어이가 없네….’
날 속였다는 생각에 화가 나기도 하고, 이런 정신 나간 계획을 당당히 꾸민 그녀의 행동에 살짝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너…. 만약 내가 아무 말 안 했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당연히 다 밝히려고 했지…! 그래도 먼저 말해줘서 고마워…!”
사실대로 이야기해줘서 고맙다며 선수를 치곤 자연스레 내 반응을 가로막는 그녀.
‘뭐 이런….’
나도 피임약을 숨겨온 게 있어서 화를 내기도, 그렇다고 잠자코 넘어가기도 뭐한.
말 그대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무튼 다행이야…! 그럼 우리 아이 가질 수 있는 거지…?”
“…어?”
“아이는 몇 명이 좋을까…?”
은근슬쩍 아이 계획을 읊는 임아린의 행동에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껴버린 나는, 그녀의 고개를 슬쩍 떼어내며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저…. 아린아. 아이는 너무 이르지 않을까…?”
“응? 그런가아…?”
“그, 그래! 우리 둘이 지내다가 생각해도 안 늦잖아. 둘이 지내는 거 싫어?”
“아니, 나는 좋은데…. 아이가 있으면 더 좋지 않을까 하고….”
묘하게 야릇한 시선을 보내오며 가슴팍에 손을 얹는 그녀.
위험하다.
그녀는 진심으로 아이를 바라고 있었다.
꼴깍─
가슴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경종에 침을 꼴깍 삼킨 나는, 다급히 이야기를 돌리고자 그녀의 엉덩이를 조심스레 움켜쥐며 속삭였다.
“그럼, 내가 둘이 지내는 게 얼마나 좋은지 알려 줄게.”
뭔가 그녀에게 말려버린 기분이 들었지만, 일단 그녀의 잘못된 사상을 고쳐먹는 게 먼저였다.
“아,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너부터 먹고 먹을게. 그래도 되지?”
“…으, 응….”
그렇게 나는 그녀를 번쩍 들어 곧장 안방으로 향했고,
나를 속여먹은 그녀에게 분풀이하듯,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칠게 대해주었다.
*
다음 날.
서울 외곽의 어느 고급 오피스텔 단지.
“…여기 어딘데….”
출장을 핑계로 사무실에서 빠져나온 나는, 홍유라가 알려 준 주소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워낙 그녀가 유명한 덕분에 밖에서 만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는데, 그녀도 자신의 유명세를 의식한 듯, 아예 오피스텔을 빌려버렸다.
솔직히 내 입장에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정신 건강을 위해 맞춰 주기로 했으니, 얌전히 따르기로 했다.
[ 1505호 ]
“여긴가?”
그렇게 홍유라가 알려 준 호실 앞에 서서 메시지를 날리자, 잠시 기다려 달라는 답장이 돌아왔고,
“……”
잠자코 휴대폰을 집어넣곤 그녀가 나오기만 기다리던 그때.
벌컥─
마침내 현관이 열림과 동시에 안쪽에서 달콤한 향기가 풍겨왔는데….
“!”
나는 문 틈으로 슬쩍 상체를 내민 그녀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어서 와.”
압도적인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아니, 대놓고 몸매를 자랑하려는 듯한 매우 얇은 옷을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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