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04화 (104/165)

이러건 저러건 두 사람은 이 세계의 주인공들이다.

자살 기도까지 한 마당에, 그냥 가만히 내버려둘 순 없는 일.

아무리 강간…. 아니, 윤간 범이라고 해도, 세계가 멸망하는 것보단 두 사람을 살리는 게 낫다.

“…하아….”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벌컥─

“왜 안 나와?”

기다리다 못한 설주희가 욕실로 쳐들어왔다.

아무래도 슬슬 나가야 할 것 같다.

“…금방 갈게.”

그렇게 홍유라와 같이 욕실을 빠져나온 후.

‘일단 옷부터 좀 입히고….’

나는 두 사람과 함께 진중한 대화를 나누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저건 뭐지?’

설주희가 웬 서류 봉투를 든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

탁자에 놓인 서류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도지혁은,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흘끔 바라보며 말을 건네보았다.

“…이게 뭐야?”

그러자 설주희가 빠드득─ 이를 갈더니, 싸늘한 얼굴로 나지막이 대답했다.

“임아린이 개씨발년이라는 증거.”

“…뭐?”

“지금까지 임아린이 저질러온 짓들이 여기 담겨있어.”

도지혁은 홍유라의 말에 무심코 눈썹을 찡그리고 말았다.

순간 임아린을 옹호하는 말이 입안에 맴돌았으나, 차마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또다시 ‘치료’를 당할지 모르기에.

우선 두 사람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이야기를 들어주기로 했다.

“…임아린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그 좆 같은 년이 글쎄…!”

“주, 주희야! 내가 이야기할게!”

또다시 분노로 눈이 돌아간 설주희를 붙잡곤, 먼저 선수를 치는 홍유라.

“임아린은 오래전부터 널 혼자 독차지하기 위해 계략을 꾸며왔어. 얼마나 오래 된 지는 모르겠지만…, 마지막으로 확인된 건 최소 5년 전이야.”

“…나를 독차지 해?”

도지혁은 도저히 믿기 어려운 임아린의 악담에 어처구니가 없어지고 말았다.

임아린이 자기를 독차지하기 위한 계획을 꾸며왔다니.

그것도 5년 전부터?

아무리 임아린이 싫어도 그렇지,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일단 이야기를 꺼냈으니, 다 들어보자고 생각한 도지혁은 잠자코 귀를 기울였고,

홍유라는 임아린이 저질러온 짓 중에 굵직한 걸 짚어가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먼저…. 임아린은 천화 그룹에 접근했어.”

“천화…그룹?”

“그리고 어마어마한 돈을 퍼부어서 당시 간부들에게 로비를 했어.”

“…뭐?”

로비가 무엇인가.

쉽게 말해, 금품 청탁이 아닌가.

생각지도 못한 천화 그룹에 로비까지 튀어나오니, 도지혁은 개연성이 부족한 이야기에 신뢰를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임아린은 천화 그룹에 접근해서 한가지 연구를 의뢰했어. …환영 마법을 이용한 가상 미디어 제작에 관한 연구를.”

“!”

뒤이어 언급된 환영 마법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환영 마법? 천화 그룹이 환영 마법을 연구해? 그걸로 대체 뭘….”

“천화 그룹은 환영 마법으로 실사에 가까운 동영상을 만들려고 했어. 그리고…. 성공해냈지.”

“…성공했다고?”

“연구는 성공 직후에 폐기됐어. 그 자료는 이 안에 있고.”

도지혁은 꿀꺽 침을 삼키며 서류 봉투를 바라보았다.

홍유라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두툼한 서류 봉투가 판도라의 상자나 다름없는 것.

‘…아냐…. 말이 안 되잖아….’

하지만 이내 도지혁은 내심 두 사람의 주장을 부정하고 말았다.

정신이 온전한 상태로 말했어도 믿을지 말지 모르는 이야기인데, 하필 두 사람이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기에.

그는 우선 무죄를 전제로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그래서?”

“연구를 확인한 임아린은 천화 그룹을 이용해서, 너에 대한 여론을 조작했어. 천화 그룹이 너를 싫어한다고 말이야.”

천화 그룹에서 도지혁의 여론이 좋지 않은 건 엄연한 팩트.

“…….”

무심코 입을 꾹 다물어버린 도지혁은 가만히 홍유라를 바라보았고,

홍유라는 내심 설득에 성공했음을 확신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임아린은 박정석을 죽이….”

바로 그 순간.

콰앙─!

집안에 울려 퍼지는 작은 폭음.

““!””

거실에 모여있던 세 사람은 갑작스러운 굉음에 화들짝 놀랐고,

“지혁아!!!”

뒤이어 들려오는 가녀린 목소리에 희비가 갈려버리고 말았다.

임아린이었다.

벌컥─!

“지…. 지혁아!!!”

순식간에 거실까지 쳐들어온 임아린은 도지혁을 발견하며 왈칵 눈물을 쏟아내더니, 헐레벌떡 달려들며 도지혁을 와락 끌어안았다.

“괘, 괜찮아?!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몸은?! 왜 연락을 안 받는데에!!”

“아, 아린아….”

당황한 도지혁과 은근슬쩍 몸을 더듬으며 안부를 묻는 임아린.

홍유라에게 붙들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주희는 곧바로 내공을 터트리며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 손 치워!!!”

“서, 설주희!”

‘앗…!“

도지혁은 진심으로 살기를 뿜어내는 설주희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임아린을 가려주었다.

아무리 임아린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Ex급인 설주희의 진심이 담긴 공격을 받아낼 순 없을 거라고 판단했기에.

자신이 대신 공격을 맞아 줄 생각이었다.

“읏…!”

그런데.

콰아앙──!!

설주희의 주먹은 허공에 나타난 무지갯빛 방어막에 막혀버렸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구나…?”

임아린이 그 짧은 찰나에 마법을 전개하여 공격을 막아낸 것이다.

“이 씨발년이…!”

공격을 막아내곤 제 역할을 다한 듯, 파스스─ 흩어지는 무지갯빛 방어막.

도지혁은 그 영롱한 모습에 또다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건 대체….’

그조차도 난생처음 보는 마법이었다.

“설주희! 진정해!”

“놔! 저 씨발년이, 여길 어디라고 와!!!”

“…나쁜년. 자살 쇼까지 벌여서 우리 지혁이를 꼬셔? 네가 진짜 사람이니…?”

“뭐? 쇼? 이 좆 같은 년이!!!!”

“임아린. 네가 저지른 짓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

“너희들 헛소리에 더 이상 놀아날 순 없어. …앞으로 다신 지혁이한테 찾아오지 마.”

임아린은 분노하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벙찐 도지혁을 붙잡고 다시 마법을 전개하였다.

순간이동 마법으로 빠져나갈 셈이었다.

“자, 잠깐, 아린아!”

“임아린!!!”

뒤늦게 정신을 차린 도지혁과 설주희의 절규를 무시한 임아린은 곧바로 마법을 사용했고,

화아아악───!

곧이어 두 사람은 거실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온몸을 감싸오는 특유의 부유감.

밝은 빛과 함께 눈앞이 번쩍이더니, 어느 순간 빛이 가라앉으며 확 달라진 주변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임아린의 집으로 전이해온 것이다.

“괘,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마력을 갈무리한 그녀는 다급히 내게 달라붙으며 몸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마, 많이 놀랐지…? 미안….”

그리고는 옷 아래를 확인하려는 듯 자연스럽게 옷깃을 붙잡았는데….

스윽─

“자, 잠깐만!”

윗옷이 들춰지려는 찰나, 화들짝 놀란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버렸다.

“어…?”

덩달아 놀란 듯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내오는 그녀.

‘아.’

뒤늦게 섣불렀음을 직감한 나는, 조용히 침을 꼴깍─ 삼키며 자연스럽게 말을 꺼내보았다.

“…아린아.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그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무, 무슨 일이라니…?”

“설주희 말이야! 홍유라도 그렇고…. 너네 무슨 일 있었어?”

“어, 어어…, 그, 그게….”

임아린은 슬쩍 옷깃을 놓곤 할 말을 고르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기 시작했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겨우 생각을 정리한 듯 조심스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저, 저번에…. 유라랑 주희한테 너랑 사귄다고 말했었거든? 그런데 갑자기 나한테 배신자라고 막 욕해서….”

“…걔네가?”

“으, 응…! 그래서 나는…. 그냥 네가 좋다고…. 포기하기 싫다니까아…. 막, 마악….”

자신이 배신자 취급을 당했던 기억을 떠올린 걸까.

그녀의 사랑스러운 눈망울이 점점 촉촉하게 젖어갔다.

“나쁜 요, 욕도 하고…. 주, 주먹도 휘두르고오…, 흑….”

그런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가녀리고 안타까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동정심이 먼저 들었으나….

─임아린은 오래전부터 널……

홍유라에게 들었던 이야기 때문인지, 왠지 모르게 전처럼 덮어두고 그녀를 옹호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자, 울지 말고.”

나는 애써 차분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고 토닥여 달래주며, 완전히 진정하기를 기다렸다.

퀸즈의 멤버들이 서로에게 공격을 퍼부을 정도로 사이가 나빠졌다는 걸 알아차린 이상,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훌쩍….”

그렇게 품에 안기 채로 한참을 울먹이던 그녀는, 드디어 진정한 듯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기분 탓인가….’

그 모습이 마치 묘하게 내 눈치를 살피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으며 그녀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요구하려고 했다.

“좀 진정했어?”

그런데 그때.

덥석─!

갑자기 그녀가 내 턱을 콱 움켜쥐며 고개를 강제로 돌리더니,

“아, 아린아?”

이내 못 볼 걸 봤다는 듯 눈을 부릅뜨곤 살벌한 표정을 띠기 시작했다.

“…마크….”

“어?”

“이거…. 이 자국 뭐야…?”

‘좆됐다.’

아무래도 미처 가리지 못한 키스 마크를 들켜버린 모양이었다.

“지혁아…. 이게 뭐냐니까…? 걔네가 무슨 짓 했어…?”

크게 분노한 듯 놀랄 정도로 낮은 목소리를 내며 나지막이 추궁해오는 임아린.

아직 듣지 못한 세 사람의 일을 잠시 뒤로한 나는, 우선 그녀를 진정시키고 보자는 생각으로 은근슬쩍 얼버무리기 위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아린아. 이건 내가 차근차근 설명할 테니….”

하지만.

“아니지…? 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지…?”

역시 임아린도 그 두 사람의 친구라 그런지, 이미 전후 사정을 대충 파악한 듯한 눈치였다.

“…아린아. 그게….”

“아, 아니야…, 그 그럴 리 없어 ….”

“그, 아린아. 그런 거 아니야. 응? 그러니까 일단 진정하고….”

“아, 안 돼!!!!!”

그 순간, 냅다 몸을 내던지며 온몸으로 달려드는 그녀.

“우왓…!”

재빨리 임아린을 받아내어 방바닥에 주저앉자, 그녀가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바둥거리기 시작했다.

“시, 싫어…! 지혁이는 내 거야…!”

마치 발작을 일으키듯, 어린아이처럼 허겁지겁 몸에 달라붙어 오는 그녀.

‘하필 이때….’

가장 중요한 타이밍에 폭발해버린 그녀의 행동에 살짝 난처함을 느낀 나는, 일단 천천히 고민해보자는 생각으로 그녀를 꼬옥 안아주며 자상히 말을 건네보았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

“흐읏…, 미안해, 나 때문에 괜히…. 나 버리지 마…. 끅, 내가 더 잘할 테니까…! 응…? 제발 버리지 마아…!”

“내가 널 버리긴 왜 버려! 지금도 잘하고 있어.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흑, 지혁아아…!”

임아린은 내 목덜미를 끌어안곤 미친 듯이 피부를 쪽쪽 빨아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키스 마크를 덮으려는 것 같았다.

잠시 그녀를 떼어낼지 말지 고민하던 나는, 이내 체념한 채로 얌전히 몸을 내주곤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다.

‘쉽지 않네….’

결과적으로 임아린과의 대화는 그렇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홍유라와 설주희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하자니 자연스레 두 사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는데,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임아린이 극도로 예민한 반응을 보여왔고,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가려고 하면, 임아린이 심각한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했다.

솔직히 ‘얘가 일부러 이러나?’라는 생각이 아주 살짝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으나….

너무 설주희와 홍유라의 주장에만 기울어진 거 같아서, 당분간 중립을 고수하기로 했다.

…딱 당분간만.

*

“좋은 아침입니다.”

“어! 프로듀서님!!!”

“어어, 이게 누구야!”

다음 날.

설주희와 홍유라에게 잡힌 이후 임아린을 달래느라 또 하루를 소비해버린 나는, 장장 나흘 만에 사무실로 출근하여 김준형과 한규리를 만났다.

“아, 아니…. 얼마나 고생하셨으면…! 얼굴이 엄청 수척해요!”

“대체 무슨 일인데 연락도 못한 거야?”

“그냥…, 좀 일이 있었어. 아무튼,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다.”

“…뭐, 잘 처리는 된 거지?”

“대충.”

“그럼 됐고. 고생했다.”

“어쨌든 잘 해결돼서 정말 다행이에요…!”

갑자기 연락이 끊긴 동안 팀원들에게서 매우 많은 연락이 왔었는데….

‘어른의 사정’을 덧붙인 나는 뒤늦게 급한 일이 생겨서 그렇다는 말로 적당히 얼버무렸고, 다행히 팀원들은 내 사정을 이해한 듯 순순히 믿어주었다.

정확히는….

‘팀원들’만 말이다.

“또 당도 엄청 높게 했네…. 서원아. 너무 달게 먹으면 안 좋다니까?”

“…!”

탕비실을 다녀온 듯 양손에 커피 캐리어를 든 채로 사무실에 들어서다, 눈을 마주치곤 우뚝 멈춰서는 진서원.

“왜 갑자기 멈추는….”

뒤따라 들어오던 방한나도 덩달아 걸음을 멈추며 천천히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겨왔고,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의 모습에 무심코 미소를 띤 나는, 슬쩍 손을 들며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그러자.

“프, 프로듀서니임!!!”

“…오빠…!”

두 사람이 우르르 달려들어 나를 둘러싸곤 재잘재잘 말을 걸어왔다.

“거, 걱정했잖아요!!! 큰일 있으셨던 거예요!? 이제 괜찮으세요…?!”

“응. 덕분에 이제는 괜찮아.”

“하아…. 진짜 다행이에요…!”

“…오빠. 왜 내 연락 안 받았어?”

“어, 서원아. 어제 톡방에 이야기했던 대로, 바쁜 일이 조금….”

“…왜 안 받았냐니까?”

“야, 진서원! 프로듀서님이 바쁘셨다고 하잖아!”

“…아닌데.”

“너어…! 진짜 자꾸 그렇게 버릇없이 굴래!?”

“…또 때리게?”

“야, 야! 내가 언제 때렸다고 그래! 아, 아니에요! 저 서원이 안 때렸어요!”

“…어제, 등 맞았는….”

“그건 네가 분리수거 잘못해서 그런 거잖아!”

여전히 친근한 모습으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살짝 난처한 미소를 띤 나는, 옆에서 흐뭇하게 바라보던 한규리와 김준형을 쳐다보았는데….

알고 보니, 진서원과 방한나가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하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사실 평범하게 기특하다고 여길만한 일이었으나,

어지러울 정도로 막장이었던 그녀들을 만나고 난 뒤라 그런지, 방한나와 진서원이 투닥거리는 것조차 썩 귀엽게 느껴졌다.

“여기까지 온 김에, 같이 밥이나 먹고 가.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

“앗, 진짜요!?”

“…밥 먹고, 집에 가야 해?”

“너네 어차피 여기서 할 것도 없지 않아?”

“어, 없지는 않을걸요…?”

“…있어.”

설주희나 홍유라. 그리고 임아린에 비교하면, 이 두 사람은 귀여운 게 맞았다.

“후….”

그렇게 시간은 훌쩍 흘러, 어느덧 다가온 오후.

식사를 마치고 멤버들을 집으로 돌려보낸 나는, 혼자 라운지로 빠져나와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까.’

임아린의 이야기는 제대로 듣지도 못한 채, 홍유라와 설주희의 이야기만 일방적으로 들어버린 상황.

마치 곪았던 상처가 터져버렸는데, 치료는커녕 꿰매지도 못한 상태로 방치된 상황이다.

어쨌든 누군가는 이 상황을 수습해야 하고, 정황상 중심에 선 내가 수습을 자처할 수밖에 없는데….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다.

‘…누구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설주희와 홍유라의 주장에 따르면, 임아린이 그동안 상상도 못할 짓을 저질러왔다고 하고,

임아린의 주장에 따르면, 설주희와 홍유라가 자신을 질투하여 일을 벌인 거라고 한다.

이렇게 반대로 주장이 엇갈린 이상, 어느 한 쪽이 잘못된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건 자명한 일.

문제는 어느 쪽이 거짓말을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아린이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설주희와 홍유라가 범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나를 범했던 범죄자들과 여자친구 중에선 당연히 여자친구 쪽으로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 봉투.’

미처 확인하지 못했던 그 증거들이 눈에 밟힌다.

만약 설주희와 홍유라의 주장이 진짜라면, 임아린은 몇 년 전부터 나를 독차지하기 위해 소름 끼치는 계획을 세워온 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것 같은 사랑스러운 여자친구가 사실은 소시오패스 집착녀였다니.

부디, 그런 끔찍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아….”

걱정어린 한숨과 함께 휴대폰을 꺼낸 나는, 메신저를 켜고 연락처를 열어보았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맨 위에 떠있는 연락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는데….

1. ㄱ아린♥

2. ㄱ유라

3. ㄱ주희

‘…아린이가 맨 위네.’

새삼스레 임아린의 연락처가 가장 위에 올라와 있다는 걸 발견하고 말았다.

─이렇게 하면 연락처가 맨 위에 올라온대…!

언젠가, 자신들의 연락처가 가장 위에 있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그녀들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 우리 매니저도 남자친구 그렇게 저장해놨던데. 그래서 그랬구나?

─뭐? …도지혁. 당장 바꿔.

홍유라와 설주희도 임아린의 주장에 동의한 덕분에 나는 그녀들의 연락처를 바꾸게 되었고,

한글 순서상, 자연스럽게 임아린이 내 연락처 1번을 차지하게 됐다.

혹시….

이것도 사실 임아린의 계획이 아니었을까?

‘…선동이 이래서 무섭다니까.’

괜히 머리를 흔들며 쓸데없는 생각을 날려버린 나는, 두 번째로 찍혀있는 홍유라의 연락처를 눌러 메신저를 열었다.

그리고는….

[ 좀 만나. ]

그때 확인하지 못했던 증거들을 보여달라고 말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어두운 방.

“…….”

임아린은 푹신한 의자에 올라 무릎을 감싸고 앉은 채로 화면이 꺼진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최근 묘하게 달라진 도지혁의 행동을 의심쩍게 여기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에, 괜한 불안감을 느끼며 애꿎은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그년들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거 같긴 한데…. ’

설주희와 홍유라의 감금 사건 이후, 임아린에 의해 구조된 도지혁은 이전보다 더 그녀를 피하기 시작했다.

은근슬쩍 몸을 더듬으며 분위기를 잡으려고 할 때마다, 피곤하다는 둥, 갑자기 일 얘기를 꺼내는 둥, 온갖 핑계를 덧붙이며 스킨십을 피했다.

물론 이는 도지혁이 강제로 범해졌던 것에 대한 후유증이라고 설명할 수 있었으나….

도지혁의 자잘한 버릇마저도 줄줄이 꿰고 있던 임아린은, 그가 명백히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어떡하지….’

임아린은 손톱을 질근질근 씹어대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원래 그녀의 계획대로였다면 홍유라와 설주희는 스스로 자멸하며 자연스레 도지혁을 포기했어야 한다.

실제로 설주희는 자살 기도까지 했으니, 사실상 성공 직전까지 다다랐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예상과 다르게 너무 빨리 회복세를 보여왔고,

지금껏 저질러온 악행에 관한 증거를 모았다며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이기까지 했다.

말 그대로 기분만 나빠진 상황이었다.

“…….”

물론 도지혁이 아직 긴가민가한 모습을 보이는 걸 보면 충분히 승산은 있다.

오래전에 개발한 추적 마법을 이용해가며 도지혁의 행적을 수시로 체크하던 임아린이, 왜 이틀씩이나 도지혁을 찾지 않았겠는가?

그녀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방관한 것이다.

오직 도지혁과의 사랑에 쐐기를 박아버리기 위해서.

이미 전생의 경험으로 숱한 일들을 겪어온 임아린은 본의 아니게 남자를 빼앗기는 것에 무뎌지고 말았다.

심지어 가장 친하다고 생각했던 친구와 사랑하는 이로부터 아이의 초음파 사진을 받았고,

같은 피해자라고 생각했던 친구에게도 배신당하여 완전한 외톨이가 되었는데, 그깟 잠자리 한번이 대수겠는가?

당연히 기분은 결코 좋지 않았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겨우 잠자리 한번으로 ‘남자친구를 빼앗겼던 비련의 여자친구’라는 명분을 챙길 수 있게 됐다.

어차피 임신도 안 했을 테니, 고작 기분이 나쁜 정도로 언제든지 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여지를 얻게 된 것이다.

만약 누군가 임아린의 머릿속을 들여다본다면, 그녀의 생각을 이상하게 여길 순 있지만….

가장 친한 친구에게 사랑하는 이를 빼앗기고, 그의 죽음까지 옆에서 지켰던 그녀에겐 더 이상 타협은 존재하지 않았다.

끼익-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임아린은, 곧바로 추적 마법을 이용하여 도지혁의 위치를 확인해보았다.

‘아직 사무실이네.’

그리고는 도지혁이 사무실에 있다는 걸 확인한 뒤, 책상 서랍에 고이 모셔두었던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만에 하나 무슨 일이 벌어져도 도지혁을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키 카드.

간이 임신테스트기였다.

‘시기상으론 완벽해.’

아직 특별한 증상은 없었지만, 임아린은 자신이 임신했음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그동안 임신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관계를 맺어왔기에, 당연히 임신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물론 도지혁이 꼬박꼬박 피임약을 복용한 덕분에 임신하지 않았지만….

“후….”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던 임아린은 포장을 뜯어 테스트기를 꺼내 들었고,

보다 더 극적인 서프라이즈를 위해, 맞춤 케이크 업체에 주문할 문구를 떠올리며 방을 나섰다.

*

홍유라와 연락하여 그녀들이 주장하던 증거 자료를 받기로 약속한 후.

나는 그것과 별개로 홍유라에게 한 가지 부탁을 추가로 주문하였다.

[ 주희 좀 잘 부탁할게. 맡길 사람이 너밖에 없어. ]

바로 설주희에 관한 문제였다.

아무리 설주희의 상태가 많이 호전됐다고 하나, 그녀는 자살 기도를 시도할 정도로 정신이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다.

이러나저러나 주인공인 그녀를 잃어버릴 수는 없는데, 임아린과 사귀고 있는 나로선 그녀를 돌봐 줄 수가 없는 처지다.

그래서 특별히 홍유라에게 설주희 좀 잘 봐달라는 부탁을 요청한 것인데….

[ 저기 그럼… ]

[ 나도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될까? ]

이때가 기회라는 듯, 홍유라도 내게 요구를 들이밀어 왔다.

바로 주기적으로 자신과 함께 시간을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그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나는 이미 임자가 있는 몸이고, 설주희와 만나는 걸 조심하는 이유와 일맥상통했기에.

그러나….

뒤이은 그녀의 한마디에 마음이 흔들리고 말았다.

[ 지혁아 ]

[ 나도 많이 아파 ]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여 잠시 잊고 있었지만, 홍유라도 설주희와 똑같은 환자다.

사실 그녀도 특별 취급을 받아야 마땅한데, 도리어 환자에게 환자를 맡겨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한 발 물러서서 곧바로 그녀의 조건을 받아들였고, 임아린의 눈을 피하고자, 며칠 뒤에 잡힌 출장에 맞춰 자료를 건네받기로 했다.

‘이게 맞겠지….’

솔직히 아직도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

설주희와 홍유라의 주장도 그렇고, 두 사람과 다른 증상을 보여온 임아린도 그렇고, 모두에게 미심쩍은 부분이 존재하는 건 부정할 수가 없다.

‘그 마법도 그래.’

특히 의문스러운 점은 임아린의 마법.

임아린은 나조차도 알지 못한 강력한 마법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사용하였다.

어떠한 특정 마법을 개량한 게 아니라, 아예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을 사용해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전에도 비슷한 느낌의 사건이 있긴 했었다.

언젠가, 우리가 아직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시절.

임아린이 고위급 마법인 ‘추적 마법’을 개량하여 나를 찾아낸 적이 있다.

그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는데….

차분히 따져보면, 추적 마법은 당시 그녀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마법이었다.

만약, 정말로 임아린이 내게 숨기고 있는 게 있다면….

“…하아….”

그렇게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책상을 툭툭 두드리고 있던 그때.

우우웅- 우우웅-

갑자기 울려대는 휴대폰.

“응?”

나는 슬쩍 시선을 옮겨 구석에 충전 중이던 휴대폰을 흘끔 바라보았고,

“!”

화면에 찍힌 그녀의 이름에 살짝 놀라고 말았다.

[ 박해린 ]

다름 아닌 국정원에서 온 연락이었다.

꾸욱-

일단 전화를 받아 진동을 멈춘 나는, 그대로 몸을 일으키곤 화장실을 가는 척 자연스레 사무실을 빠져나왔고,

복도가 텅 비었다는 걸 확인하곤 야외 라운지로 발길을 옮기며 휴대폰을 귓가로 가져갔다.

“도지혁입니다.”

인사를 건네자,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 박해린이에요. 당장 좀 만날 수 있을까요? ]

꽤 중요한 이야기인 듯, 그녀는 다짜고짜 만남을 요구해왔는데….

“아직 업무 중입니다만.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복도를 지나치던 세진 길드의 직원과 슬쩍 눈인사를 건네며 그녀의 용건을 떠보았고,

[ ……. ]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는, 이윽고 어쩔 수 없다는 듯 한마디를 툭 내뱉어왔다.

[ …국가의 안보가 달린 일이에요. ]

“…예?”

*

뜬금없는 박해린의 소식에 급히 외근을 나온 나는, 곧바로 그녀가 예약한 일식집으로 향했다.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중요한 일인데, 또 빠질 수야 없죠.”

박해린은 그동안 꽤 고생했는지 묘하게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와 다른 진한 화장에 가슴팍이 파인 검은색 원피스까지.

그동안 봐왔던 단정한 느낌의 복장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공격적인 의상을 입고 있었다.

‘뭐…, 일단 지켜볼까.’

딱히 별스럽게 여길 마음이 없었던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잠자코 자리를 잡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꽤 비싼 곳 같은데. 세금을 이렇게 막 써도 괜찮아요?”

“…귀하신 분을 모시는데, 이 정도는 해야죠.”

“많이 급하신가 봅니다.”

“…노코멘트하겠습니다.”

나는 묘하게 필사적으로 보이는 박해린의 태도에 살짝 의아함을 품었다.

국가 안보가 달린 일인데, 굳이 나를 데려가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좀 드시죠.”

“그럴까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으로 젓가락을 든 나는, 미리 내어진 회 한 점을 집어 들었다.

그 순간.

“…술 한잔 따라 드릴게요.”

뜬금없이 박해린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술병을 들더니, 공손히 무릎을 꿇곤 내 잔에 술을 채워주기 시작했다.

마치 내게 접대라도 하려는 느낌이었다.

“뭡니까?”

“…으….”

박해린은 내 물음에 몸을 움찔거리며 순간 수치스럽다는 표정을 짓더니, 애써 담담한 말투로 시치미를 뗐다.

“그냥, 술 따라드리는 건데요.”

“근데 그렇게 가슴을 내밀면서 따라요?”

“…….”

“박해린 씨한테 이런 거까지 시키는 거 보니까…, 국정원 상황이 대충 그려지네요.”

원작 속에서도 국정원은 여러모로 인력난에 시달려왔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까지 해서 내 비위를 맞추려는 걸 보면….

아무래도 내 예상보다 꽤 심각한 일인 것 같다.

“후우….”

박해린이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들이켠 나는, 빈 잔을 슬쩍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을 건넸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그러자 박해린이 조심스레 술병을 내려놓더니, 면목없다는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왔다.

“그게….”

그리고….

자초지종을 듣게 된 나는, 예상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건에 무심코 얼굴을 굳히고 말았다.

“…정말요?”

“…예. 최근 발견된 게이트에서 발달한 문명의 흔적이 발견됐어요. 저희 쪽에서 조사를 보내고 싶은데, 하필 S급 게이트라….”

S급 게이트 내부에서 문명의 흔적이 발견됐다는 것.

단순히 내용만 보면 심각한 일이 아닌 것 같지만, 문명이 나타났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던 나는 심각히 여길 수밖에 없었다.

‘발달한 문명이라면….’

틀림없는 마왕군의 흔적이었다.

등록된 마지막 회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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