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101화 (101/165)

“……내가……잘못……너도……어쩔 수…….”

귓가에 들려오는 가느다란 미성.

누군가 내 앞에서 중얼거리고 있다.

‘…설주희…?’

너무나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에 몽롱한 정신을 깨운 나는, 이마에 느껴지는 은은한 통증에 살짝 인상을 쓰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보았다.

그런데.

눈앞이 캄캄한 게, 분명 눈을 뜨고 있음에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어라?’

당황스러움에 몇 번이고 눈을 깜빡거리자, 눈꺼풀을 쓸어대는 부드러운 감촉.

아무래도 무언가 내 눈을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무슨….’

갑작스러운 봉변에 살짝 당황한 나는, 일단 눈앞을 가린 천부터 벗겨 내기 위해 팔을 움직였다.

하지만….

꾹─ 꾸욱─

부드러운 천이 내 손목을 꽉 붙들어 맸다.

팔까지 묶인 것이다.

“아.”

너무나 당황스러운 마음에 나지막이 탄식을 내뱉은 찰나.

“…….”

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던 설주희의 목소리가 뚝 끊겨버렸고,

‘뭐, 뭐지?’

시야를 잃고 한껏 예민해진 나는, 아주 가까이서 느껴지는 설주희의 인기척에 재빨리 입을 열어보았다.

“…주희야?”

그러자.

“……응.”

매우 가까이서 들려오는 작은 목소리.

묘하게 음울한 그녀의 목소리에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한 나는, 침을 꼴깍 삼키곤 차분하게 상황을 파악하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보았다.

“지금 앞이 안 보이는데. 이거 네가 그런 거야?”

설주희는 곧바로 대답해오지 않았다.

뭔가 고민에 빠진 듯, 한참이 지난 후에야 나지막이 대답을 들려주었다.

“……응.”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범행을 시인해왔고,

나는 그녀의 정신 상태가 많이 불안정한 걸 고려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대화를 주도해나갔다.

“…그래. 그럼, 이제 이것 좀 벗겨 줄래? 앞이 안 보여서 그런가, 너무 답답하네.”

하지만….

“안 돼.”

설주희는 사뭇 싸늘한 말투로 내 제안을 거절해버렸다.

‘곤란한데….’

종잡을 수 없는 설주희의 태도에 살짝 놀란 나는, 이내 방식을 바꿔 설득을 다시 시도해보았다.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근데 이건 왜 씌운 거야? 혹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면, 더 벗겨달라고 안 할게.”

“…….”

또다시 고민에 빠진 듯 입을 다물어버린 설주희.

그녀는 이번에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생각을 정리한 듯 나지막이 대답을 꺼내왔는데….

“내 꼴 보여주기 싫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유가 튀어나왔다.

대체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다고 눈을 가려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미치겠네.’

설주희의 주장에 말문이 순간 턱 막혀버렸던 나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주희야. 난 이미 네가 어떤지 다 봤어. 다 봐버렸는데, 이제 가려서 무슨 소용이 있겠어?”

“…….”

“정말 괜찮으니까, 일단 눈부터 풀어줘. 우리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해보자.”

마치 토라져 버린 아이를 달래는 기분.

필사적으로 너그러운 마음을 다지며 설주희의 대답을 기다리던 그때.

스윽─

무언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고,

스르륵─

마침내 눈앞을 가리고 있던 무언가가 풀어졌다.

내 설득이 먹혀든 것이다.

‘으….’

비로소 눈의 자유를 되찾아낸 나는, 시큰거리는 눈을 연신 깜빡거리며 눈앞의 설주희를 바라보았다.

“…….”

잔뜩 헝클어져 산발이 된 검은색 머리카락과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 위로 진하게 발린 붉은 립스틱.

그리고 그새 갈아입은 듯, 딱 달라붙는 하얀색 티셔츠와 짧은 돌핀 팬츠까지.

얼핏 보면 멀쩡한 것 같았으나, 자세히 보면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엉망이다.

홍유라와 똑같은 상태였다.

“…풀어줘서 고마워.”

나는 최대한 그녀에게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부드러운 말투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그녀도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왔고,

예상보다 쉽게 상황을 풀어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나는, 천으로 꽉 묶인 손목을 흘끔 쳐다보며 슬쩍 입을 열어보았다.

“그럼 이제 이것도 풀어볼까? 슬슬 어깨가 아프려고 하는데.”

그 순간.

“그건 안 돼.”

표정을 싸악─ 바꾸며, 싸늘하게 반응해오는 그녀.

아무래도 이건 봐줄 수 없는 부분인 것 같았다.

“…주희야. 너도 알겠지만, 내가 지금 못 풀어서 안 푸는 게 아니야. 널 존중해주고 싶어서 물어보고 있는 거야.”

나는 그녀를 떠보고자, 짐짓 단호한 태도를 보이며 으름장을 늘어놓았고,

“…!”

뒤늦게 나도 능력자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모습으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더니, 사뭇 초조한 말투로 제안을 들이밀어 왔다.

“이야기 다 끝나면, 풀어 줄게.”

그녀의 상태를 생각해보면, 썩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좋아. 그래서…,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나는 환자를 대한다는 마음으로, 품고 있던 의문을 모두 제쳐놓곤 그녀에게 먼저 기회를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올 것이 왔다는 듯 살짝 긴장한 표정을 짓더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천천히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너한테 미안해서 그러는데, 사과하고 싶어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임아린 이야기부터 하기로 했어. 근데 내가 널 좋아하는 것도 이야기해야 하고, 네가 임아린이랑 사귀고 있어서, 말을 잘못하면 괜히 나를 미워할 거 같아서….”

하지만 맥락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횡설수설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화가 성립되지 않았는데…

‘임아린?’

유일하게 그녀의 이름만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그래도 네가 도망칠 거 같아서, 일단 묶고….”

“저…. 주희야.”

나는 은근슬쩍 끼어들며 그녀에게 넌지시 질문을 건네보았다.

“중간에 말 끊어서 미안한데, 혹시 아린이 이야기부터 물어봐도 될까?”

바로 그 순간.

그녀는 마치 들어선 안 될 말을 들은 것처럼 험악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씨발…씨발년…. 좆 같은 여우년이…!”

다짜고짜 폭언을 중얼거리며 부들부들 떨어대는 그녀.

“…주희야?”

뭔가 심상치 않은 그녀의 반응에 조심스레 말을 건넨 찰나.

“지혁아.”

설주희가 갑자기 고개를 퍼뜩 쳐들곤,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임아린 그 씨발년, 절대 믿으면 안 돼. 다 널 속인 거야…. 우리도 속이고, 전부 다!”

나는 살벌하게 눈을 부릅뜬 그녀의 모습에 살짝 움츠러들고 말았고,

그녀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다가오며 임아린에 대한 험담을 이어나갔다.

“박정석. 임아린 그년이 박정석 죽인 거야. 너 퀸즈에서 자르려고 일부러 그룹에 접근했고, 그 좆 같은 동영상도 그렇고, 다 임아린 그 쌍년이 개수작 부린 거라고!”

‘…박정석?’

박정석이라면, 몇 년 전에 돌연사한 천화 그룹의 이사.

내 길드 운영에 매번 퇴짜를 놨던 사람이기에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임아린이 그를 죽였다니.

그것도 모자라, 그녀가 나를 독차지하기 위해서 수작을 부렸다고?

받아주고 싶어도, 너무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어찌 받아 줄 수가 없었다.

“주희야. 일단 진정하고….”

“그 씨발년이, 유라랑 나를…!”

“아린이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잖아. 지금 너무 흥분했….”

일단 그녀를 진정시키자는 생각으로 다급히 입을 연 순간.

“…….”

갑자기 하던 말을 멈추곤, 부릅뜬 눈으로 지그시 응시해오는 그녀

꿀꺽─

등골을 쭉─ 훑는 섬뜩한 감각에 무심코 침을 삼킨 나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주희야?”

그 순간.

“아….”

그녀가 무언갈 깨달은 듯 조그맣게 탄식을 내뱉더니, 의미 모를 혼잣말을 조그맣게 뇌까렸다.

“당했구나.”

“…뭐?”

그리고는 내 얼굴을 덥석─ 붙잡으며 알 수 없는 말을 미친 듯이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고쳐야 해…. 빨리…. 빨리 고쳐야 해…!”

손끝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떨림.

‘큰일 났다.’

설주희의 발작이 시작됐음을 눈치챈 나는, 다급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손을 강제로 풀어내려 했다.

꾸우욱─

바로 그때.

“안 돼!!!”

찰싹─!

고성에 이어 눈앞이 번쩍이며, 날카로운 충격과 함께 고개가 돌아가 버렸다.

‘…어?’

뺨을 맞은 것이다.

“……!”

자신이 때리고도 깜짝 놀란 듯, 다급히 내 뺨을 매만지며 괜히 다그치는 그녀

“그, 그러니까….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나는 분노하기보단 황당함에 휩싸여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고,

아예 반쯤 나를 깔고 앉아버린 그녀는, 돌연 내공을 끌어올리며 검지를 스윽─ 치켜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끝에 맺히는 얇고 뾰족한 형상.

점혈을 찔러 마력을 얼려버릴 셈이었다.

“!”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기를 감지한 나는 다급히 마력을 폭발시켰다.

콰지직─!

손목이 묶여있던 침대 머리가 산산조각 나며 양팔이 자유롭게 풀려났고,

나는 설주희를 떨쳐내기 위해 황급히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덥석─!

내 손이 그녀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가만있으라고.”

제압과 동시에 싸늘히 울려 퍼지는 차가운 목소리.

“읏…!”

내가 키워낸 그녀는 이미 규격 외.

고작 능력을 훔쳐내는 게 전부인 내가, 이겨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스윽─

점점 다가오는 그녀의 손가락.

“아, 안 돼…!”

애석하게도 그녀의 손가락은 여지없이 내 명치를 찔러버렸고,

“끄윽….”

마력이 얼어붙는 감각에 고통스러워하자, 그제야 붙잡고 있던 내 손을 놓아주었다.

“…너, 너어…!”

그리고는….

텁─

갑자기 내 상의를 붙잡아 당기며 조그맣게 속삭여왔다.

“고쳐 줄게.”

등골을 훑어 내리는 오싹한 감각.

분명 그녀는 ‘고친다’라고 표현하고 있었으나,

나는 그녀가 정반대의 행동을 하리라는 걸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 안 돼! 멈춰!”

“고쳐야 해.”

“서, 설주희! 이런다고 내가 좋아할 거 같아!?”

나는 감정을 이용한 협박을 동원해가며 어떻게든 그녀를 저지하려고 했다.

언젠가, 방한나와 진서원에게 그랬던 것처럼.

“내가 고쳐 줄게.”

하지만 설주희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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