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97화 (97/165)

모두의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갔다.

누군가는 숨을 죽인 채 복수의 칼날을 갈며 역전의 때가 오기만 기다렸고,

누군가는 마지막 쐐기를 박아 넣기 위한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으며,

누군가는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예견치 못한 채, 희망찬 미래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길 희망하고 있었다.

“얘들아. 잠깐 모여볼래?”

“아, 네!”

7월 31일.

시즌 종료까지 앞으로 하루도 남지 않은 시간, 마지막 게이트 토벌에 앞서 도지혁은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다들 준비됐어?”

“네!”

“언제든지 들어갈 수 있어요!”

힘차게 대답하는 김나래와 해맑게 웃으며 주먹을 불끈 쥐는 방한나.

“…….”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진서원까지.

세 사람 모두, 어느덧 처음 게이트에 도전했던 모습과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감개무량하네.’

도지혁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에 새삼스레 감동이 밀려오는 걸 느꼈다.

물론 팀 서울시청의 성과를 퀸즈의 데뷔 시즌과는 비교할 수도 없지만….

확실한 건, 그에 준할 만큼 뿌듯하며 만족스러웠다.

퀸즈는 애초에 미친 재능을 타고난, 누가 프로듀싱을 맡더라도 성공할 수밖에 없던 팀이었다.

한 명 한 명이 다른 팀의 에이스를 맡아도 모자란 수준이었으니, 성공은 이미 떼놓은 당상.

사실상 첫 시즌부터 얼마나 대단한 업적을 세우는지가 중요했던 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팀 서울시청은 어떤가?

애초부터 성공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적당히 이용하다 버려질 용도로 만들어진 팀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멤버들은 헌터라고 불릴 수 있는 마지노선인 하위급들뿐이었다.

처음부터 대형 길드의 빵빵한 지원을 받으며 엘리트 코스를 밟은 퀸즈와는 근본부터 다른 팀인 것이다.

제아무리 역사에 남을 수많은 업적을 이룩했던 도지혁이라도 팀 서울시청의 성공엔 가슴이 뜨거워질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한 걸음까지 더욱 더 성공적으로 내딛기 위해, 필사적으로 흥분을 가라앉히며 차분히 말을 꺼냈다.

“데뷔전 치른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시즌 마지막 날이네.”

그동안 멤버들과 지내왔던 시간들이 눈앞에 스쳐 지나간다.

할 말은 많았지만, 일부러 길게 말하지 않았다.

시즌이 끝난다고 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영영 안 볼 것도 아니기에.

“다들 지금까지 잘 따라와 줘서 고맙고…. 앞으로 더 열심히 해 보자.”

그런 도지혁의 마음은 멤버들에게도 확실히 전해졌다.

“오늘 토벌 끝나고, 뒤풀이 있는 거 다들 알고 있지? 엄청 좋은 곳으로 예약해뒀으니까, 한껏 힘쓰고 나와서 맛있게 먹자.”

“회식…!”

“알겠습니다!”

그렇게 각자가 준비를 마치는 사이, 훌쩍 다가온 게이트 입장 시간.

“입장 1분 전!”

도지혁은 미리 지휘석으로 옮겨 자리를 잡았고,

“입장하겠습니다!”

팀 서울시청의 마지막 토벌이 시작되었다.

*

“…눅눅해.”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나지막이 불만을 토로하는 진서원.

게이트로 들어선 서울시청 멤버들은, 한창 목표를 향해 억센 풀숲을 헤쳐나가고 있었다.

“으…. 이상한 벌레들이 너무 많아요…!”

“조금만 가면 돼. 힘내!”

그녀들이 이번에 도전한 곳은 성남에 위치한 B급 게이트.

일명 ‘정글짐 게이트’라는 이명까지 붙은 곳이었는데….

그 이름처럼 높은 습도와 보기 드문 식물들, 그리고 온갖 날벌레들이 가득한 정글 지형의 게이트였다.

도지혁은 이번 게이트에서도 여느 때와 같이 전투를 최소한으로 줄인 상태에서 게이트 보스를 상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하필 이 게이트는 지형 특성상 자잘한 전투들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일반적인 길을 이용했을 때, 괴수들이 튀어나오는 포인트를 반드시 지나치기 때문이다.

결국, 도지혁은 조금 번거로워도 괴수가 나타나지 않는 풀숲을 헤쳐나가는 방식으로 바꾸었고,

방패를 앞세운 방한나를 선두로 길을 뚫고 있었다.

부스럭…… 부스럭……

그렇게 한참 풀숲을 헤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길.

“…….”

방한나는 방패 아래로 미처 꺾이지 않은 풀들을 묵묵히 밟아가며 다짐했다.

이번 토벌이 끝나면, 반드시 지금껏 모아온 ‘참 잘했어요’ 도장을 사용하리라고.

사실 첫 게이트 토벌 당시, 도지혁이 제시했던 소원권의 조건은 이미 달성한 지 오래.

하지만 방한나는 일부러 소원권을 사용하지 않고, 시즌이 끝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도지혁이 다른 말을 꺼내지 못하도록 한가한 때를 노리기 위함이었다.

‘이번엔 진짜 다르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경험이 많은 친구들에게 조언을 받아, 어떻게 도지혁과 잘지 작전을 세우기도 했는데….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손가락을 핥거나, 자주 사용하는 ‘자세’의 동작을 연습하는 둥, 철저한 대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슬슬 다 온 거 같아.”

어느덧 끝이 보이는 우거진 풀숲.

“드디어…!”

가까스로 풀숲을 빠져나온 방한나는 방패로 바닥을 짚으며 홀가분히 한숨을 내쉬었다.

“후아….”

“고생했어.”

뒤이어 풀숲을 빠져나와, 음료를 건네는 김나래.

방한나는 그녀가 건네온 음료를 조금 홀짝이며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희, 돌아갈 때는 그냥 싸우면서 갈까요…?”

그 순간.

[ 안 돼. ]

게이트 밖에서 팀을 지휘하던 도지혁이 단호하게 퇴짜를 놓아버렸다.

“그렇다는데?”

“힝….”

“…나 왔어.”

곧이어 진서원까지 모두 풀숲을 빠져나온 후.

[ 고생했어. 일단 안전지대인 거 확인됐으니까, 딱 10분만 쉬었다가 가자. ]

“넵…!”

도지혁의 통신을 받은 세 사람은, 막간을 이용해 짧은 휴식과 함께 재정비 시간을 가졌다.

“알이 있으면 좋겠는데….”

“아, 맞아. 알이 얼마라고 했었죠?”

“한 알에 1억 정도?”

“우와…. 1억이요?”

“…비싼 거야?”

“엄청 비싸지!”

이번에 세 사람이 상대할 괴수는 B급 익룡 괴수 프테로돈.

거대한 몸집으로 날아다니며 헌터들을 낚아채는, B랭크로 평가받는 괴수 중에선 꽤 상위급으로 평가되는 괴수인데,

사실 프테로돈 토벌보단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알 쪽이 더 주목받는 경향이 있어서, 아예 이것만 노리고 도전하는 헌터들도 종종 있다.

“읏차…. 그럼, 슬슬 출발할까요?”

그렇게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토벌에 나선 세 사람.

이번엔 정령을 앞세운 김나래가 선두에 나서며 프테로돈에게 향하기 위한 길을 찾기 시작했는데….

“이 근처인 거 같은데…?”

그 사이, 초점 없는 눈으로 천천히 뒤따르던 진서원은, 슬슬 몰려오기 시작한 초조함과 피나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

그녀는 얼마 전부터 새로운 수련법을 시도해왔다.

그 이름하여 ‘금욕 수련법’.

위로 행위를 의도적으로 그만두어 일의 능률을 높이고, 신체적으로 증진 효과를 노리는, 흔히 인터넷에서 많이 유행하는 수련법이다.

최근 일주일간 ‘장난감’에 손을 대지 않았던 그녀는 슬슬 아랫배가 근질거리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시도때도 없이 솟아오르는 욕구를 제어하며, 시즌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즌이 모두 끝나고, ‘일본의 교육용 동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도지혁에게 ‘정중히’ 해소를 도와달라고 할 생각이었다.

물론 도지혁이 안다면 경기를 일으키며 등짝을 내려칠 만한 계획이었으나….

지금까지 진서원도 참아온 게 있기에, 나름의 명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진서원이 그렇게 들끓는 욕구를 억누르며 발걸음을 내딛길 얼마나 지났을까.

“찾았다…!”

드디어 서식처 입구를 찾아낸 김나래.

[ 좋아. 작전 체크하고, 바로 들어가자. ]

“알겠습니다!”

도지혁에게 지시를 받은 방한나는 연습했던 대로 두 사람과 거리를 벌리며 홀로 입구로 들어섰고,

“서원아. 바로 준비해야 해. 알았지?”

“…응.”

김나래와 진서원은 선두와의 거리를 유지해가며 천천히 뒤를 따라갔다.

스으윽……

방패를 치켜들고 먼저 서식처로 들어선 방한나.

주변을 경계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거대한 나무 아래로 봉긋 솟아오른 흙더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프테로돈의 둥지였다.

‘알은 없구나.’

빈 둥지에 내심 아쉬움을 삼킨 방한나는, 멀찍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기척을 인지하며 천천히 둥지로 다가섰다.

“…….”

그 순간.

후우웅── 후우웅──

어디선가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바람 소리.

“!”

화들짝 놀란 방한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소리가 들려오는 쪽을 바라보았고,

우지끈─

거대한 나뭇가지에 올라선 한 괴수를 발견하고 말았다.

보랏빛을 띄는 거대한 익룡의 형태를 한 괴수.

프테로돈이다.

카아아아아아악───!!!!

땅을 뒤흔드는 거대한 경고에 꼴깍 침을 삼킨 방한나는, 작전대로 방패를 들어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하아앗…!”

빈 둥지를 겨눈 채, 방패를 힘껏 내리쳤다.

쿵─! 콰가가가가각───! 파삭─!

방패로부터 뿜어져 나온 충격파에 직경 당해 흩어져 버린 흙더미.

얼떨결에 둥지를 잃어버린 프테로돈은, 볏을 커다랗게 부풀리며 분노하기 시작했다.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거대한 날개를 위협적으로 펄럭이며 내리꽂는 프테로돈.

후우웅─! 후우웅─!

방패를 꽉 움켜쥔 방한나는 프테로돈의 발끝을 똑바로 노려보며 방어를 준비했고,

“가랏…!”

몸을 숨긴 채로 지켜보던 김나래가 미리 소환해둔 땅의 정령에게 지시를 내려, 방한나의 발밑을 솟아나게 했다.

콰드드득────!!!

솟아난 땅덩어리가 방한나의 하반신을 통째로 집어삼킨다.

“으읏….”

그녀는 자신의 몸을 콱 죄어오는 압박감에 살짝 미간을 좁혔으나,

까드득─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방패를 붙잡으며 프테로돈의 공격에 대비했다.

후우우웅────

곧이어 순식간에 바닥으로 접근한 프테로돈.

쐐애애애애액────

평평한 바닥과 평행하게 접근한 프테로돈은, 방한나를 낚아채기 위해 거대한 부리를 들이밀었다.

그리고.

콰아악───!

프테로돈의 부리가 방한나의 방패를 물며 그대로 날아오르려는 찰나.

“하아앗────!!!”

방한나는 아껴왔던 마력을 전부 쏟아내며 방패를 반대로 잡아챘다.

꽈아아아아악─────!!!!!!!

자신을 미끼로 하여, 거대한 익룡을 상대로 낚시를 시도한 것이다.

카아아아아악─────!!!!

생각보다 강한 저항에 당황한 프테로돈은 곧바로 방패를 뱉어냄과 동시에 반동을 받아 바닥을 뒹굴었고,

쿠우웅───! 쿠궁───!

카아아아아아아악─────!!

프테로돈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거대한 몸을 바둥거리며 다시 일어서려는 그때.

“서원아!!!”

방한나의 신호에 맞춰, 진서원이 하늘 높이 뛰어올랐다.

타아앗──!

지금까지 방한나가 제 몸을 희생해가며 프테로돈을 바닥으로 끌어 내린 건, 모두 진서원에게 완벽한 기회를 벌어주기 위함.

“끝내버려!!!!”

진서원은 아껴왔던 내공을 터트리며, 겨우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프테로돈을 노려보았다.

‘이것만 죽이면.’

능력은 감정에 비례하여 강해진다.

애정에 대한 갈망은 욕구의 억제를 불러왔고,

욕구의 억제는 뜨거운 분노를 일으켰으며,

뜨거운 분노는 더 강한 갈망을 만들어낸다.

파직──! 파지직──!

감정의 악순환과 힘의 선순환.

불길한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새카만 내공이 진서원의 몸을 휘감는다.

“!”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방한나와 김나래는 몸을 흠칫 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진서원을 경계하기 시작했고,

“죽어.”

진서원은 처음으로 진득한 살의를 담아, 거대한 괴수에게 가벼이 주먹을 내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