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홍유라에게 걸려온 전화를 내팽개친 설주희는, 다급히 리모컨을 들어 TV 소리를 높여보았고,
숨을 죽인 채로 조용히 뉴스를 응시했다.
[ 천화 길드와 모기업 사이에 얽힌 것으로 추정된 금액은 약 800억 원대. 기타 부대 비용을 포함하면, 800억을 훌쩍 넘는 금액입니다. ]
뉴스에선 직접적으로 천화 길드와 천화 그룹을 언급해가며 공격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 내부 비리를 폭로한 A씨의 증언을 따르면, 천화 길드는 세탁 명목으로 받아낸 자금을 길드 운영 비용으로 돌렸으나, 실제로는… ]
마치 모든 사실이 확인된 듯, 거침없이 비리에 관한 정황을 늘어놓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주희의 표정은 점점 더 딱딱하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 정기 보고서에 첨부된 운영 비용은 약 130억 원. 사실상 10배 가까이 차이 나는…. ]
천화 길드에 관한 내용이 나올 때마다, 모자이크 처리된 퀸즈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
물론 천화 길드의 간판은 퀸즈나 다름없으니,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가장 유명한 만큼 가장 만만한 게 퀸즈였으니까.
다행히 지금껏 온갖 시기와 질투를 수없이 겪어온 설주희는, 외부에서 공격 받는 것엔 별다른 타격을 입지는 않았다.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자리에 올라서며, 자연스레 맷집이 늘어난 것이다.
그러나….
“씨발….”
그녀도 사람이기에,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우웅── 우우웅──
이윽고 다시 울리기 시작한 휴대폰.
설주희는 뒤늦게 홍유라로부터 전화가 왔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확인해보았다.
[ 구 단장 ]
이번에는 천화 길드의 단장 구석일로부터 걸려온 전화였다.
그동안 연락조차 없던 구석일이 무려 개인 휴대폰으로 전화를 건 걸 보면, 아마 뉴스에 보도되고 있는 내용 때문에 전화가 온 것 같은데….
“…쯧.”
괜히 욕먹을 생각에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버린 설주희는, 손가락을 옮겨 전화를 뚝─ 끊어버리고 말았다.
“하아….”
설주희는 신경질 섞인 한숨을 뱉어냈다.
안 그래도 매우 심란한 상태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런 불상사까지 벌어지니, 묵직한 두통과 함께 괜한 분노가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약 먹어야지….’
자신의 심리 상태가 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인지한 설주희는 곧바로 몸을 일으켜 약이 놓인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또 이상한 짓을 벌여 상황을 악화시키기 전에, 차라리 약으로 절여버리자는 생각이었다.
‘아침 약이….’
설주희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안정제는 굉장한 효과를 자랑한다.
무언가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해도, 마치 머리에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해져서 아무런 잡념이 들지 않게 되는 느낌이었다.
솔직히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지만, 설주희는 전처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정신이 오락가락한 것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부스럭─ 부스럭─
그렇게 부엌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약부터 챙겨 먹고 홍유라에게 전화를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아침 약’이라 적힌 봉투를 뜯으며 정수기에 컵을 내려놓았다.
띵─
그리고는 급수 버튼을 눌러, 쪼르륵 컵 안을 채우는 투명한 물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는데….
삑─ 삑─ 삑─ 삑─
갑자기 집안에 울려 퍼지는 도어락 소리.
결국, 홍유라가 집으로 찾아오고 만 것이다.
“설주희!”
자신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것에 놀란 홍유라는 현관에서부터 다급히 설주희를 부르며 집안으로 들어섰다.
“…왔어.”
다행히 설주희는 썩 멀쩡한 모습으로 주방에서 나와 그녀를 맞이해주었고,
“너…!”
홍유라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심되는 한편, 살짝 화가 나고 말았다.
“너 왜 전화를 안 받아…!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미안.”
설주희는 아마 홍유라가 천화 길드에 관한 소식 때문에 급히 자신을 찾아왔으리라 생각했다.
아침 뉴스에서 보도됐다는 건 이미 인터넷에도 기사가 올라오기 시작했다는 말이니, 분명 그녀도 그걸 봤을 가능성이 컸다.
“뉴스 때문에 그래?”
그런데.
“무슨 뉴스?”
마치 홍유라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반응을 보여왔고,
설주희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나지막이 질문을 건네보았다.
“뉴스…. 안 봤어?”
그러자….
정말로 모른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되물어오는 홍유라.
“무슨 뉴스를 말하는 거야…?”
그런 그녀의 반응에 살짝 놀란 설주희는, 길드와 그룹에 관한 비리가 밝혀졌다는 이야기를 횡설수설 늘어놓았다.
“…지금 뉴스에 나오잖아. 그거 때문에 그런 거 아냐?”
“뭐?”
자초지종을 알게 된 홍유라는 그제야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표정을 구기며 손으로 이마를 붙잡았다.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그 인간들….”
“뭐 때문에 그러는데?”
설주희는 슬쩍 팔짱을 꼬며 자신을 급하게 찾았던 이유를 물어보았고,
“…그게….”
홍유라는 묘하게 조심스러운 눈치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린이 때문에.”
임아린.
그녀의 이름이 튀어나온 순간, 설주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년이 왜.”
임아린이 도지혁과 결혼 선언을 해버리며 싸운 이후, 설주희는 임아린을 ‘그년’이라 칭하며 까칠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홍유라가 너무 거칠게 말하지 마라며 주의를 주곤 했는데….
이번에는 차마 홍유라도 임아린을 옹호할 수가 없었다.
밝혀진 정황만 따져보면, 더 심한 멸칭을 사용하더라도 아깝지 않았으니까.
“…놀라지 말고 들어. 절대 흥분하면 안 돼. 알았지?”
“……?”
설주희는 묘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행동에 더더욱 의아함을 품었고,
홍유라는 자신이 들고 온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더니, 설주희를 식탁에 앉히며 차분하게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임아린이 자신들 몰래 어떤 짓을 저질러왔는지.
천화 그룹에선 어떤 움직임이 있었는지.
지금껏 천화 길드가 보여온 행보부터,
결과적으로 어떤 구도가 그려졌는지.
그리고….
유일하게 이득을 사람이 누구인지.
“이, 이게 무슨….”
설주희는 눈앞에 속속들이 등장하는 증거들을 바라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분노보다 당황스러움이 더 앞서는 기분.
그동안 둘도 없는 친구처럼 지내왔던 임아린이 벌였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차분하게 생각해야 해.”
홍유라는 설주희의 반응을 살피며 비장하게 말을 꺼냈다.
“모든 증거가 우리 손안에 있어.”
그녀는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대로 멍청하게 가만히 있을 수는 없잖아…!”
“…아.”
그때, 설주희가 무언가 떠올랐는지, 조그맣게 무어라 중얼거렸다.
“다리….”
“어?”
“…아냐.”
그리고는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슬쩍 얼버무리더니, 눈을 번뜩이며 나지막이 말을 꺼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데?”
정신이 번쩍 든 덕택인지, 오랫동안 볼 수 없었던 총기가 그녀의 눈빛에 깃들어 있었다.
“일단….”
홍유라는 차분한 설주희의 반응에 내심 안도하며 천천히 계획을 설명했고,
임아린을 상대할….
마침내 더러운 배신자를 토벌할 계획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
흑사회의 중요 거점을 습격하여 행동대장 박표성을 잡아넣은 직후.
흑사회는 나를 경찰에 신고하는 둥, 범죄 조직답지 않게 이상한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모습을 보며, 분명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 그놈이 도망쳤다고요?”
[ 어…. 저희도 좀 당황스러운 게, 너무 빨리 도망쳐 버려서 미처 추적하지도 못했어요…. ]
흑사회 두목 김동헌이 밤새 도망을 쳐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무려 해외로.
‘아니, 분명 원작에선 안 그랬는데….’
원작 소설 속 김동헌은 나름 위용 있는 모습을 보이며 독자들에게 적잖은 기대감을 심어주었다.
물론 작가가 급발진을 거듭하며 흑사회 존재 자체가 맥거핀으로 승화돼버리긴 했으나….
조직을 차근차근 부숴오는 설주희의 행보에 재미있어하는 둥, 꽤 멋있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갑자기 줄행랑을 칠 정도로 멋없는 등장인물이 아니었단 말이다.
‘너무 빠르게 접근했나….’
은근히 김동헌과의 승부를 기대했던 나는, 살짝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휴대폰 너머로 박해린에게 말을 건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작전은 계속 이어 갑니까?”
그런데.
[ 으음…. 그게, 저희도 한창 회의 중인데…. 일단 당분간 동태를 좀 살펴야 할 거 같아요. ]
기대와는 다른 소식이 들려오고 말았다.
“작전…. 중단입니까?”
[ 일단은…. 그렇게 될 거 같아요…. ]
설마 했던 작전 중단이었다.
‘결국, 그렇게 됐구나….’
사실 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다.
근본적인 목표가 변수 차단이었으니, 흑사회가 몸을 사리게 하며 어느 정도 목표에 다다랐다고 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아쉽네.’
솔직히 ‘의문의 복면강도’로서 활동하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쉽긴 하다.
훔쳐온 능력을 활용하여 적을 쓰러뜨린다.
내가 그토록 상상하고 꿈꿔왔던 일을 직접 이룬 거나 다름없었기에, 솔직히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뭐, 어쩔 수 없죠. …그럼, 저는 당분간 대기하면 됩니까?”
[ …넵. 혹시 뭔가 결정되면 바로 알려 드릴게요. ]
박해린은 살짝 아쉬움이 묻어나는 말투로 대답해왔고,
나는 그동안 고생했다는 인사와 함께 언젠가 한번 식사라도 하자는 인사치레를 나누곤 자연스레 통화를 끊었다.
“…좋은 게 좋은 거겠지.”
그렇게 박해린과의 전화를 끝낸 뒤.
옥상에서 내려간 나는, 곧장 팀원들이 모여있을 훈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프로듀서님이다!”
“…늦었네.”
“프로듀서님! 저희 준비 다 끝났어요…!”
얼굴을 보자마자 반갑게 맞이해 주는 김나래와 진서원. 그리고 방한나.
보기만 해도 배가 든든해지는 세 사람의 모습에 무심코 입꼬리를 끌어올린 나는, 내 본업이 무엇인지 다시금 깨우칠 수 있었다.
‘그래…, 이게 내 일이지.’
아무리 다리가 다 나았다고 하더라도….
내가 프로듀서인 건 달라지지 않는다.
“미안, 통화가 좀 길어져서…. 다들 준비됐어?”
““네!””
힘차게 대답해오는 팀원들의 모습에 흐뭇한 웃음을 흘린 나는, 슬쩍 팔짱을 꼬며 멤버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오늘 진행될 훈련은, 시즌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토벌의 훈련.
“그럼…. 슬슬 시작해볼까?”
팀 서울시청의 성공적인 첫 번째 시즌을 화려하게 마무리하기 위한, 마지막 훈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