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지혁 씨? 무슨 일이에요? ]
나는 귓속에 꽂히는 박해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눈앞에 서 있는 진서원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휴대폰 라이트를 켠 채로 가만히 응시해오는 그녀.
가슴팍이 깊게 파인 검은색 민소매와 짧은 반바지에 슬리퍼까지 신고 있는 게, 아무래도 잠옷 차림으로 막 나온 것 같았다.
‘…이걸 어떡하지.’
마치 잘못을 저지르다 걸린 아이처럼 살짝 긴장하여 침을 꼴깍 삼킨 나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정신을 가다듬으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현재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비로 꽁꽁 싸맨 상태.
마침 신분을 가리기 위해 전투용 헬멧까지 쓰고 있는 참이니, 입을 열지만 않으면 어떻게 잘 얼버무릴 수 있을지 모른다.
“…….”
그렇게 진서원으로부터 조용히 고개를 돌린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척 다시 난간 아래로 몸을 내던지려고 했다.
그 순간.
“…오빠.”
다시 한번 나를 붙잡는 진서원.
폴짝─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움직여 건물 난간에 올라섰고,
한 점 흔들림도 없는 시선으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왜 나 무시해?”
이미 내 정체를 확신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눈치챈 건가…? 아니, 어떻게…?’
뭔가 알 수 없는 감이라도 있는 걸까.
말 그대로 빼지도 박지도 못하는 상황에 잠시 굳어있던 그때.
[ 도지혁 씨. 지금 분명 오빠라고 했죠? 설마 들킨 겁니까? ]
박해린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다급히 말을 걸어왔고,
나는 평소 진서원의 성격과 행동 방식을 곰곰이 떠올려보았다.
그리고는 주변에 CCTV 같은 게 없었다는 걸 떠올리곤 얌전히 난간 아래로 내려선 뒤….
“…후우….”
헬멧을 벗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난간에 올라선 진서원과 시선을 마주쳤다.
“내려와.”
*
“…….”
난간에서 내려온 진서원은 뒤늦게 정체를 밝혀온 도지혁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약 그가 말을 무시하고 난간 아래로 뛰어내렸다면, 그녀도 분명 망설임 없이 뒤를 따랐으리라.
도지혁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고, 귓속에서 떠들어대는 박해린의 말을 무시한 채로 나지막이 말을 꺼냈는데….
“안 잤어?”
그 말을 듣게 된 진서원은 순간 어이가 없었다.
그건 자기가 물어볼 말이었다.
“…오빠는?”
“나는 볼일이 좀 있어서.”
무슨 볼일이길래 이 야밤에 수상한 복장을 하고 다니는 걸까.
도지혁의 옷차림을 쓱─ 훑어보던 진서원은, 일단 순순히 그의 말을 믿어주며 나지막이 되물어보았다.
“…무슨, 볼일?”
“그냥.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러자 말해주기 조금 곤란하다는 듯 은근히 이야기를 피하는 도지혁.
진서원은 그의 ‘할 일’이라는 게, 절대 평범한 일은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평범한 일을 처리하는데 흉흉한 무기를 챙길 필요는 없으니까.
“아무튼 늦었으니까, 어서 들어가서 자. 다른 사람한테 나 봤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고.”
도지혁은 자연스럽게 진서원을 설득하며 상황을 넘기려고 했다.
입이 가벼운 스타일은 아니니, 제대로 당부하기만 한다면 괜찮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하지만.
“…싫어.”
그냥 곱게 넘어갈 진서원이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가 옥상까지 올라온 건 우연이 아니다.
남들과는 다르게 예리한 감을 지닌 그녀는 최근 도지혁에게서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기 시작했고,
오직 그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기운을 따라 곧바로 옥상까지 올라온 것이다.
그랬던 그녀가 얌전히 물러설 가능성은 사실상 0%.
“…나도 따라갈래.”
“…어?”
진서원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동행을 요구했다.
‘미치겠네.’
도지혁은 내심 한숨을 내쉬며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서원아. 이건 네가 따라갈 만한 일이 아니야. 그리고 무슨 일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널 데려가.”
이미 모든 게 정해진 일에 끼어드는 건 어불성설.
한 마디 반박도 할 수 없는 정론이었다.
그러나….
이미 진서원은 눈이 멀어버린 상태.
“…위험한 일이잖아.”
분명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심한 눈빛을 띠고 있었지만, 도지혁이 홀로 위험한 일을 벌인다는 생각에 회까닥 돌아가 있었다.
“…그럼, 나도 데려가.”
“아니, 서원아. 위험한 일이 아니라….”
“…안 데려가면, 팀원들한테 다 이를 거야.”
“뭐…?”
진서원은 보란 듯이 들고 있던 휴대폰을 조작하며 메신저를 켜며 팀원들이 모여있는 채팅방을 화면을 띄웠고,
‘아니, 얘가 진짜….’
말도 제대로 못 하던 그녀가 어느새 협박하는 법까지 배웠다는 사실에 깜짝 놀란 도지혁은, 재빨리 머리를 굴리며 차분히 말을 꺼내보았다.
“서원아. 날 생각해 주는 네 마음은 잘 알겠어. 그런데 지금 이건 나를 방해하는 행동밖에 안 돼. 이럼 내가 널 어떻게 생각하겠어?”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협박에는 협박이다.
“…….”
호감도를 인질로 잡힌 진서원은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이전이었다면 몰라도, 한창 도지혁에게 잘 보이기 위해 노력해왔던 그녀였기에 더더욱 고민될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여기서 순순히 물러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억지를 부리더라도 무조건 따라가는 게 맞을까.
당연히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곱게 물러나는 편이 옳다.
아무리 도지혁의 성격이 좋다고 해도, 억지를 부리는 것까지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녀로선 그를 혼자 보내는 게 훨씬 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서원아?”
선택의 갈림길이 다가온다.
진서원은 손에 들린 휴대폰과 눈앞에 선 도지혁을 천천히 번갈아 보았고,
“…알았어.”
이내 순순히 마음을 접고 말았다.
미움을 받느니, 차라리 불안에 떠는 게 낫다는 생각이었다.
“잘 생각했어.”
얌전히 꼬리를 내린 진서원의 모습에 내심 안심한 도지혁은 슬쩍 미소를 지었다.
“다녀와서 인증샷 남겨둘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응.”
“자, 약속.”
장갑을 벗고 슬쩍 새끼손가락을 들이미는 도지혁.
그런 그의 손가락을 가만히 바라보던 진서원은 이내 손가락을 얽으며 약속을 받아들였고,
“…약속.”
“좋아. 그럼…. 난 이만 다녀올게. 너도 어서 들어가서 자.”
“…응. …조심히 다녀와.”
어찌어찌 상황을 잘 넘긴 도지혁은 홀로 임무에 나섰다.
*
세진 그룹 사옥.
“아가씨.”
사무실에 앉아 도지혁의 최근 동향을 살피고 있던 이혜리는, 비서의 목소리에 슬쩍 고개를 들었다.
“준비 끝났습니다.”
그녀가 지시해뒀던 것들이 모두 준비됐다는 이야기였다.
“실수 없이 처리했죠?”
“예. 저희 쪽이 피해를 입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혜리가 지시했던 것은 바로 천화 그룹과 천화 길드의 비리를 폭로하는 것.
요컨대, 라이벌인 천화 그룹을 뒤흔들기 위한 작전이었다.
천화 길드와 그룹을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이혜리는 비로소 세진을 1등 길드로 만들기 위한 초석을 갈고닦기 시작했는데….
때마침 거슬렸던 퀸즈까지 한 번에 쓸어버리기 위해, 지금껏 온갖 자료들을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앞으로 딱 한 걸음.’
첩보에 따르면 설주희는 큰 슬럼프에 빠져 정신과를 다니고 있으며, 홍유라는 활동 전면 중단. 임아린은 신혼 놀이에 빠져 아예 팀을 등한시하고 있다.
소수 정예를 표방하는 천화 길드엔 퀸즈의 후속 팀도 준비돼있지 않으니, 천화는 말 그대로 벼랑 끄트머리에서 외발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
직접 등을 밀지 않아도, 바람만 세게 불어버리면 그대로 나락에 떨어질지 모르는 아슬아슬한 상태였다.
“언제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이혜리는 비서의 물음에 시선을 옮겨 탁상에 놓인 달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앞으로 시즌이 끝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곤, 슬쩍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지시를 내렸다.
“바로 시작하세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대작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
[ 흑사회. 강도로부터 습격당해, 경찰 신고… ]
막 잠자리에서 일어난 설주희는 거실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었다.
“…….”
조금 있으면 아침 약을 먹어야 할 시간.
정신과 약이 독한 탓에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챙겨 줄 사람이 없으니, 먹을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 지난 21일 새벽 2시. 정체불명의 강도가 단신으로 흑사회를 습격했습니다. ]
[ CCTV에 찍힌 강도는 새카만 장비들로 온몸을 꽁꽁 싸매어 신분을 숨기고 있었고, 마치 처음부터 범죄를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순차적으로 조직원들을 공격했습니다. ]
[ “동생들이랑 같이 야식을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들이닥쳐서 무차별적으로 공격했습니다. 마땅히 죄를 저지른 것도 없는데, 공격을 당해서 너무 억울하고….” ]
TV에선 한창 흑사회를 습격한 인물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범죄 조직이 경찰에 신고를 하고, 뉴스에 나와 인터뷰를 한다니.
이보다 웃긴 코미디가 있을까 싶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피해자라고 호소하며 강력한 수사를 요청하고 있었다.
“…….”
그렇게 설주희가 멍하니 TV를 바라보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무렵.
우우웅─ 우우웅─
소파에 놓여있던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
개인 번호를 아는 사람은 몇 명 없는데, 누가 아침부터 전화한 걸까.
설주희는 의문을 품으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고,
[ 유라 ]
이내 홍유라로부터 걸려온 전화라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유라….’
별생각 없이 휴대폰을 집어 든 설주희는 홍유라의 전화를 받기 위해 슬쩍 손가락을 옮겼는데….
스윽-
바로 그 순간.
[ 다음 소식입니다. 국내 유명 길드인 천화 길드가, 모 그룹인 천화 그룹의 자금 세탁을 도왔다는 의혹입니다. ]
TV에서 익숙한 이름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몇 년 전, 천화 그룹은 흔히 노른자 땅이라고 부르는 강남의 어느 한 부지에 큰 투자를 했습니다. 국내 최대 높이를 자랑하는 이 빌딩은…. ]
바로 천화 길드가 커다란 비리에 얽혔다는 소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