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94화 (94/165)

[ 미안하다. ]

홍유라는 휴대폰에 떠오른 메시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쉬우면서도, 불만스러우면서도, 언뜻 보면 담담해 보이기까지.

그녀의 눈빛에 여러 가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

얼마 전, 임아린에 관한 모종의 소식을 입수한 직후.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눈치챈 홍유라는 집중적으로 그녀의 뒤를 캐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정보가 방대한 탓에, 이렇다 할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았는데….

그러던 도중.

홍유라는 천화 그룹 내부의 오래된 연구 자료에서 의미심장한 문서를 찾아내고 말았다.

[ 환영 마법을 이용한 가상 미디어 제작 ]

다름 아닌, 환영 마법으로 영상물을 제작하는 걸 연구했던 문서였다.

환영 마법은 기본적으로 상당한 실력이 요구되는 고등 마법.

모든 마법이 그렇지만, 환영 마법도 단순히 사용할 수 있다고 끝인 게 아니라, 그 디테일을 얼마나 잘 살리는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몇 년 전부터 천화 그룹 내부에선 환영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높은 수준의 환영 마법을 이용한다면, 실사에 가까운 촬영물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말았다.

문제는….

이 연구가 아는 사람이 얼마 없을 정도로 비밀리에 진행됐다는 것.

그리고 연구 결과를 내자마자 폐기됐다는 것.

기껏 예산을 들여 연구를 진행했는데, 결과물이 나올 시점에서 갑자기 폐기해버린 것이다.

홍유라는 문서를 본 순간, 무언가를 번뜩 떠올리고 말았다.

현재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돼버린 그 불미스러운 ‘동영상’ 말이다.

만약 천화 길드에서 환영 마법을 이용하여 도지혁을 쳐냈다고 가정한다면, 그동안 의문스러웠던 점들이 대충 들어맞긴 한다.

팀을 제한적으로 운영하는 도지혁을 마땅찮게 여기던 천화 그룹은 ‘퀸즈’라는 IP를 활용하여 큰돈을 벌어들이기 위해 도지혁을 축출하기로 결정.

하지만 도지혁을 잘라내기 위해선 팀원들의 끈끈한 유대감을 끊어낼 필요가 있었고,

민감한 소재인 ‘여성 관계’를 이용하여 이간질했다.

이는 갑작스레 운영 방향을 바꾼 천화 길드의 방침까지 모두 한번에 설명이 되는, 꽤 그럴듯한 추측이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묘하게 아귀가 맞지 않는 부분도 많다.

일단 퀸즈의 멤버들에게 걸려있던 ‘암시’가 설명되지 않고,

무엇보다 실사에 가까울 정도로 고도의 환영 마법을 다룰 수 있는 실력자는 전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정도로 소수에 속한다.

국내에선 기껏해야 9서클 대마법사라 불리는 임아린 정도이니, 사실상 실현 불가능한 계획으로 판별되어 폐기됐다면 할 말이 없어져 버린다.

그래서 홍유라는 이것에 대해 논의하고자, 큰맘 먹고 도지혁을 만나려고 했었지만….

도지혁은 홍유라의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고,

크게 실망한 그녀는 약속을 취소해버렸다.

물론 ‘암시’ 때문에 솟아난 일방적인 분노와 혐오에서 비롯된 실망이라는 걸 그녀도 알고 있었으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생각한 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하아….”

무거운 한숨을 내쉰 홍유라는 휴대폰을 밀어두곤 의자에 깊숙이 기대며 이마를 짚었다.

유독 고민할 게 많아서 그런지, 미약한 두통마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이걸 어쩌면 좋지….’

도지혁이 빠져나간 퀸즈는 완전히 망가진 상태.

그마저도 임아린과 설주희의 관계가 바닥으로 치달으며 사실상 공중분해를 코앞에 둔 상황인데,

설주희는 정신과 약에 찌들어 하루하루 피폐한 삶을 보내고 있으며,

임아린은 팀원들을 나 몰라라 하며 홀로 행복한 시간을 즐기고 있고,

설상가상 임아린에게 뭔가 수상쩍은 부분이 있다는 것까지 밝혀졌다.

지난 10년 동안 함께해온 팀을 지켜야 할지,

아니면 팀을 부수고 새로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지.

당장은 눈앞에 놓인 문제에 정신을 팔며 애써 눈을 돌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분명 선택해야 할 때가 다가올 터.

홍유라는 그 어느 쪽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저, 리더라는 이름으로 선택을 내리기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

그렇게 홍유라가 미간을 꾹꾹 누르며 차분히 생각을 정리할 즈음.

그녀는 문득 언젠가 도지혁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모든 일에는 인과가 있다.’

인과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원인과 결과.

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한몸이라는 이야기였다.

‘…원인…. 결과….’

무언가 번뜩 떠올린 홍유라는 자신이 추측했던 내용들과 사실을 정리하며, 이 일로 인해 이득을 본 사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계획으로 자신들이 피해를 본 만큼, 분명 이득을 본 쪽도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었다.

‘…천화는…. 돈을 벌었어.’

천화 길드는 안정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도지혁을 잘라냈고, 퀸즈를 위험 부담이 큰 게이트 대신 방송 활동 등으로 돌리며 큰돈을 벌게 됐다.

덕분에 퀸즈는 큰 슬럼프를 겪게 되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망가진 멤버들 중에, 유일하게 이득을 본 건 오직 한 사람.

임아린 뿐이다.

“!”

홍유라는 순간 자신이 떠올린 추측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분명 모든 걸 눈치채고 있음에도, 교묘하게 가려져 있어서 알아채기가 어려웠기에.

거꾸로 돌아가 생각해보자.

천화 길드는 퀸즈에서 도지혁을 내보내기 위해 ‘동영상’을 제작했다.

정황을 따져보았을 때, 그 동영상은 환영 마법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그 정도로 환영 마법을 다룰 수 있는 마법사 자체가 몇 명 없으며,

천화 그룹과 협력할 정도로 연관이 있는,

특히 비밀리에 진행된 연구에 참여할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지녔을 만한 마법사는….

바로 임아린 뿐이다.

*

어두컴컴한 방.

임아린은 도지혁의 집안에 설치된 CCTV를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

모니터 속 도지혁은 정체불명의 장비를 늘어놓은 채로 하나씩 점검하고 있었는데….

마치 전투용으로 제작된 듯한 장비들의 모습에, 임아린은 무심코 손톱 끝을 깨물며 표정을 굳히고 말았다.

‘…저것 때문이었구나….’

최근 도지혁이 일을 핑계로 잘 찾아오지 않아서 다시 감시를 시작하였는데, 아무래도 그동안 몰래 앙큼한 짓을 벌이고 다닌 모양이었다.

‘막아야 할까?’

임아린은 도지혁을 제지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의 비밀스러운 활동을 막아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CCTV로 다 봤다는 걸 밝히지 않아도, 늦은 새벽에 돌아다니는 걸 GPS 마법으로 확인했다고 말하면 충분하기에.

사실상 무적이나 다름없는 정신병을 핑계로 들며, 불안함 때문에 감시하기 시작했다고 얼버무릴 수 있다.

하지만.

최근 꿈에 그리던 행복한 삶을 보내기 시작한 임아린은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도지혁이 비밀에 부치며 활동한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뜻인데,

억지로 막아섰다간 자신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건 절대로 안 돼….’

원래 잃을 게 없는 사람보다, 잃을 게 많은 사람이 더 조심스러운 법.

임아린은 차마 지금의 행복한 시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빨리 임신만 하면….’

최근 가임기에 맞춰 꼬박꼬박 관계를 가진 덕분에 임신에 강한 확신을 품은 임아린은, 이내 얌전히 도지혁의 행적만 추적하기로 했다.

이번 시즌이 끝날 즈음이면 임신이 확인될 테니, 그때부터 도지혁을 옴짝달싹 못하게 옭아매도 괜찮다는 판단이었다.

‘…조금만 기다려…. 내가 지켜 줄게…!’

물론 도지혁은 임아린과 시간을 보낼 때마다 항상 백일 제약의 베스트 셀러인 남성용 피임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알 길이 없던 임아린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모니터를 바라보며 텅 빈 자신의 아랫배를 무심히 쓰다듬었다.

*

[ 식사는 하셨나요. ]

귓속의 작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박해린의 목소리.

거실에 앉아있던 나는, 장비를 하나씩 점검하며 적당히 대답했다.

“든든하게 먹었죠. 해린 씨는 식사라도 하고 일하십니까?”

[ 저는 오늘도 배달로 때웠어요. ]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그렇게 먹다 골병들어요. 나랏님들은 해린 씨가 그렇게 고생하는 걸 알긴 할까요?”

스피커 너머로 작은 웃음 소리가 들려온다.

[ 그 사람들이 알면 큰일 나죠. ]

처음엔 그렇게 딱딱하게 굴던 박해린이었는데, 요 며칠 연락을 나눴다고 그새 친근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이것도 작전이려나.’

얼마 전, 국정원 소속 요원 박해린과 접선하게 된 이후.

나는 국정원과 협동하며 본격적으로 흑사회를 소탕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섰다.

그 과정에서 국정원의 대표로 나온 박해린과 꽤 많은 대화를 나누었는데….

이제는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과 싫어하는 음식, 그리고 쉬는 날엔 무엇을 하는지까지 알게 될 정도로 가까워지게 됐다.

물론 그녀의 말을 100% 믿지는 않지만 말이다.

[ 전에도 말했지만, 복지단 습격 이후로 흑사회 놈들이 몸을 엄청 사리고 있어요. 이번 작전은 특히 위험할 수 있으니까, 진짜 조심해야 해요. ]

이번 작전은 흑사회 거점으로 쳐들어가, 행동대장으로 불리는 박표성을 잡아들이는 것.

은밀히 복지단에 잠입했던 저번과는 다르게, 대놓고 쳐들어가서 박표성을 불러내는 무식한 작전이다.

솔직히 최대한 리스크를 줄여서 작전을 짜는 내 취향과는 맞지 않았으나, 최근 여러모로 일이 많은 덕분에 얌전히 국정원의 작전을 따르기로 했다.

“저야 항상 조심하고 있으니, 일 잘못됐다고 손절하지나 마세요.”

[ 저희는 절대 지혁 씨를 버리지 않아요. ]

박해린의 단호한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장비 점검을 마친 나는, 곧바로 출동을 위해 장비를 착용하였다.

‘비싼 게 괜찮네.’

이번 작전에서 사용할 장비들은 저번에 사용한 싸구려와는 다른, 상당한 고급품들.

기성 제품과는 약간 다른 게, 아무래도 국정원 요원들이 사용하는 첩보 장비인 것 같았다.

“준비됐습니다.”

그렇게 장비까지 착용하며 모든 준비를 마친 후.

[ 바로 출발하세요. ]

곧바로 내려진 작전 신호.

‘가보자.’

전투용 헬멧까지 단단하게 착용한 나는 이전처럼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벽을 타며 옥상으로 올라갔는데….

“후우….”

원작 소설 속에 등장하던 국정원과의 협력 에피소드에 직접 참여해서 그런 걸까?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 같은 묘한 감각에 가슴이 두근두근 설레기 시작했다.

“길 안내 해주십시오.”

[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업로드 중이에요. ]

나는 박해린이 내게 정보를 보내는 사이, 난간 근처로 다가가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예쁘네.’

어두운 건물 옥상에서 바라본 도시의 야경은 여느 때와 같이 화려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분명 수없이 봐왔던 평범한 야경이었으나,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더더욱 특별하게 느껴졌다.

[ 됐어요. ]

그때, 업로드 완료를 알려오는 박해린의 목소리.

슬쩍 시선을 거두며 손목시계를 확인해보니, 작은 액정에 흑사회 거점으로 향하는 길이 표시돼 있었다.

이제 출발할 시간이었다.

“슬슬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가벼이 몸을 풀고 난간으로 뛰어올라, 작전을 시작하려는 찰나.

스윽-

갑자기 바로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

접근하는 걸 인지하지도 못한 나는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고,

‘얘, 얘가 왜 여기 있어?’

캄캄한 어둠 속에서 휴대폰 라이트를 비추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오빠?”

진서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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