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91화 (91/165)

국정원이 알아서 처리하리라 생각하며 윤재덕을 잡아 경찰에 넘긴 후.

나는 다시 원래의 삶으로 돌아와, 여느 때와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래야. 마력 좀 아끼지 마. 너 마력 많이 남았는데, 왜 자꾸 아끼는 거야? 이번 게이트는 위험하니까, 아끼지 말자고 했잖아.”

“아, 죄송합니다….”

“한나도. 무조건 버티려고 하니까, 오히려 자세도 망가지고 충격만 쌓이잖아. 흘릴 수 있는 건 좀 흘려. 너 쓰러지면 진짜 토벌 끝이야.”

“…죄, 죄송합니다….”

“그리고 서원아. 너는 제발 기력 좀 아껴. 강한 건 좋은데, 한방 한방 다 쏟으니까, 계속 뒤가 없잖아. 충격은 누적이야. 적당히 두 번 때리나, 강하게 한번 치나 똑같다고. 알았어?”

“…응.”

“…그래. 일단 좀 쉬고, 다시 해보자.”

짧은 피드백을 마치고 멤버들을 뒤로한 나는, 취합된 데이터를 확인하기 위해 곧장 한규리에게로 향했다.

“데이터 나왔어요?”

“아, 네…!”

그러자 한규리가 어딘가 딱딱한 모습으로 다급히 태블릿을 건네왔는데….

“…저어…. 프로듀서님.”

옆에서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던 그녀가, 묘하게 조심스러운 말투로 슬쩍 말을 꺼내왔다.

“그…. 혹시…, 무슨 일 있으세요…?”

“…네?”

“그냥, 뭐….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다거나….”

뜬금없이 안부를 물어오는 그녀.

“아니, 그게….”

이내 괜히 말을 꺼냈다는 듯 허둥거리는 그녀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때.

“누구랑 싸웠나 보죠.”

잠시 자리를 비웠던 김준형이 슬쩍 다가와 끼어들었다.

“항상 누구랑 싸우고 나면 항상 이랬거든요.”

“싸, 싸워요?”

정곡을 찔리고만 나는, 김준형을 찌릿 노려보며 반박했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그러자 김준형이 나를 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으며 넌지시 말해왔다.

“너 지금 엄청 예민하다고.”

‘…내가 예민해?’

오랜만에 듣는 한 마디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든 나는, 시선을 옮겨 한규리를 슬쩍 바라보았다.

“…….”

입을 꾹 다문 채로 어딘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게, 아무래도 김준형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커피나 한잔할까?”

자리를 옮겨, 훈련장 라운지.

“옜다.”

“…고맙다.”

김준형이 뽑아온 자판기 커피를 받아 든 나는, 손끝에 느껴지는 뜨뜻함에 난색을 보였다.

“이 날씨에 뜨거운 걸 뽑아왔냐?”

이제 8월 1일 시즌 종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아무리 덜 덥다고 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인데, 분명 일부러 뜨거운 걸 뽑아온 게 틀림없었다.

“급하게 마시지 말라고, 일부러 뜨거운 걸로 뽑아왔지.”

김준형은 능청스럽게 말을 돌리며 내 옆에 자리를 잡았고, 내 것과는 다르게 시원한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홀짝이며 넌지시 말을 꺼내왔다.

“그래서, 누구랑 싸웠는데?”

“…싸우긴 뭘 싸워.”

“설주희야?”

정확하게 상대를 예측해낸 김준형.

‘어떻게 알았지?’

화들짝 놀라 고개를 휙- 돌리자, 눈을 흘기던 그가 뻔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그럼 그렇지. 이번엔 무슨 일인데?”

“그냥…. 이런저런 일이 좀 있었어.”

“뭐, 큰 거야?”

“…많이.”

“으으음….”

김준형은 무언가 생각에 빠진 듯 팔짱을 꼬며 고개를 까닥거리기 시작했고,

나는 살짝 김이 가신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멍하니 휴게실 내부를 바라보았다.

에어컨이 빵빵해서 그런가.

오히려 차갑게 식어있던 속을 따뜻하게 풀어 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지혁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어울리지 않게 무게를 잡으며 말을 꺼내오는 김준형.

“친구라는 게, 사실 막역한 만큼 더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나는 커피를 홀짝이며 잠자코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너랑 설주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너나 걔나 서로 둘도 없는 친구잖아. 이번 일이 관계를 뒤엎을 정도가 아니면…. 다시 생각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는 마치 설주희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야기해왔다.

물론 내 반응을 보고 추측한 것이었겠지만….

‘…친구라….’

그 진지한 말이 내게 다시금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푸후….”

이내 얼음이 가득 든 커피를 단숨에 들이켠 김준형은, 내게 혹시 얼음이 필요하냐며 자신의 빈 컵을 들이밀어 왔다.

“필요없어.”

“그래?”

그리고는 얼음 하나를 입안에 털어 넣곤 몸을 일으키며 한마디를 더 붙여왔다.

“아무튼, 천천히 커피 좀 마시면서 생각해봐. 내가 들어가서 시간 좀 끌고 있을 테니까.”

“…금방 갈 거야.”

“또 애들한테 괜히 지랄하려고?”

“지랄이 아니라, 피드백이다.”

“어련하시겠지…. 난 먼저 들어간다.”

그렇게 김준형이 훈련장으로 되돌아간 후.

텅 빈 라운지에 홀로 남은 나는, 손안에 들린 자판기 커피를 무심히 내려다보았다.

김이 폴폴 날리던 커피는, 어느새 차분히 식어버려 미지근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

“어때? 괜찮아?”

“맛있는데? 어디, 맛집에서 시켰어?”

“헤헷…. 이것도 먹어봐!”

훈련을 마치고 임아린의 집으로 향한 나는, 그녀가 손수 차린 저녁을 먹고 있었다.

맛있다는 대답에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반찬을 챙겨 주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갓 결혼한 새댁을 보는 듯했다.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나도 모르게 결혼을 생각할 정도이니, 더 말해 뭐할까.

“잘 먹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식사를 마친 뒤.

“거실에서 이거 먹고 있어.”

“응? 너는?”

“나는 이거 치우고 갈게!”

“같이 치우자. 도우면 빠르잖아.”

“아냐,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마…!”

“아니, 나도….”

“스읍!”

임아린이 홀로 뒷정리를 하는 사이 거실로 쫓겨난 나는, 얌전히 과일을 집어 먹으며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렸다.

‘버릇 들면 안 되는데….’

그리고 잠시 후.

“다 했어?”

“응! 조금 이따 꺼내기만 하면 돼.”

뒷정리를 마치고 돌아온 임아린.

“읏차….”

그녀는 자연스럽게 소파가 아닌 내 위에 자리를 잡았다.

솔직히 그녀를 안는 자세가 썩 편하진 않았지만….

받아먹은 게 있기에, 얌전히 끌어안으며 어리광을 받아주었다.

“고생했어. 팔 좀 주물러 줄까?”

“앗, 좋아!”

나는 마사지를 핑계로 그녀의 몸을 천천히 주물러주었다.

그녀를 위한, 일종의 봉사 같은 느낌이었다.

“이쪽이 많이 뭉치셨네. 너무 고생한 거 아냐?”

“…으응…. 그런 거 같은…. 아….”

그렇게 한창 임아린의 몸을 주물러가며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길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점점 들뜨기 시작한 숨소리를 감상하던 도중,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과연, 임아린은 설주희의 상태에 대해 눈치채지 못했는지.

‘…아린이는 모르는 건가…?’

임아린과 사귀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설주희에 대한 화제를 잘 꺼내오지 않았다.

아니, 화제가 흘러가며 자연스레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니면, 사실상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물론 이건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이긴 하다.

설주희와 내 사이가 최악에 가깝기에, 임아린이 나를 배려해서 의도적으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니까.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약에 손을 대기 시작한 걸 내게 숨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저기, 아린아.”

“응…?”

“요즘 애들이랑 연락해?”

“애, 애들…? 갑자기 왜…?”

몸을 움찔거리며 살짝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는 그녀.

나는 무심히 그녀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 그냥. 소식이 없어서.”

그러자.

“아마 잘 지내고 있을 걸…?”

어딘가 불확실한 대답을 꺼내왔다.

“연락 잘 안 해?”

“으응…. 그냥 가끔 안부만 하고 있어….”

임아린은 연락을 잘 안 한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내 손목을 덥석- 붙잡더니, 은근슬쩍 제 속옷 속으로 쑤욱- 밀어 넣어 버렸다.

“흐으응….”

손 끝에 선명히 느껴지는 뜨끈한 습기.

그녀는 이미 준비를 마치다 못해 흘러넘친 상황이었다.

“슬슬 해주면 안 돼…?”

임아린은 더 이상 참기 힘들다는 듯 몸을 배배 꼬며 신호를 보내왔다.

기분 탓인지, 묘하게 그녀가 내 이야기를 얼버무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는데….

‘…착각이겠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말았고,

“조금만 더.”

“…으응….”

나는 평소처럼 그녀를 한계까지 몰아붙인 뒤에, 비로소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

다시 정신없는 며칠이 흐르고.

게이트 토벌을 앞둔 어느 날.

“…….”

나는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메시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 ㄱ유라 : 오늘 좀 만나. ]

[ 나 : 갑자기 무슨 일인데? ]

[ ㄱ유라 : 중요한 일이야. ]

[ 나 : 일정 보고 연락 줄게 ]

조금 전, 홍유라와 주고받은 메시지였다.

‘무슨 일일까….’

처음엔 나는 그녀가 설주희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오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설주희에 관한 이야기라면, 굳이 내게 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무엇보다 임아린이 지금껏 설주희의 상태에 관해 언급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설주희에 관한 이야기는 아닐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설주희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라는 것인데….

‘설마, 아린이 때문인가?’

최근 두 사람과 연락이 뜸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나름 그럴듯한 추측이었다.

“…….”

그렇게 잠시 고민에 빠져있을 무렵.

“프, 프로듀서님…! 프로듀서니임!!”

웬일인지, 한규리가 다급히 나를 찾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데 급하게….”

“겨, 경찰!”

“…네?”

“경찰이 프로듀서님을 찾고 있어요!”

“!”

무려 경찰이 나를 찾는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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