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90화 (90/165)

설주희의 집을 빠져나온 후.

미뤄뒀던 침입 계획을 떠올리며 인근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선 나는, 잠시 난간에 앉아 화려하게 빛나는 도시의 야경을 바라보았다.

손 끝에 서늘한 새벽 공기가 살갗을 간지럽히듯 몸을 타고 올라왔고,

뜨겁게 녹아내렸던 이성을 조금씩 차분하게 식혀주었다.

“…….”

문득 그런 의문이 든다.

설주희를 포기하고 나와버린 게, 정말 괜찮은 행동인지.

지금이라도 다시 쳐들어가서, 정신을 차리도록 도와줘야 하는 게 아닌지.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좋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아….”

솔직히 그녀에게 크게 실망한 건 사실이다.

블랙 로즈와의 승부 이후, 나는 그녀가 단순한 휴식기에 들어갔을 거라고 믿어왔다.

그래서 임아린에게도 일부러 소식을 묻지 않았고, 이따금 들려오는 소식만 귀담아들었을 뿐이었는데….

그동안 이렇게까지 처참하게 망가져 있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무슨 이유로 마약에 손을 댄 걸까.

아니, 왜 마약에 손을 댈 정도로 망가져 버리게 된 걸까.

설마 블랙 로즈와의 승부에서 패배해서?

고작 그런 이유로 그렇게 변해버린 거라면, 더더욱 실망할 것 같았다.

‘어렵구나….’

물론 사람 마음을 쉽게 단정 지을 순 없다.

분명 내가 모르는 일련의 사건이 숨겨져 있겠지.

전말을 알아보면, 그녀가 그렇게 망가지는 게 당연할 정도로 충격적인 사건이 얽혀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걸 따져가며 그녀의 편을 들어주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한때, 나는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했다.

치기 어린 감정이었을지 몰라도, 그땐 정말로 사랑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랬던 나는 이미 그녀에게 실망한 지 오래.

우리는 그저 오래된 동료일 뿐, 더 이상 아무런 관계도 아니게 돼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그녀를 위해 일일이 자초지종을 따져보는 게 맞을까?

“…….”

난간에서 몸을 일으킨 나는, 시선을 옮겨 건물 아래를 바라보았다.

환하게 빛나던 야경과는 달리 드문드문 설치된 가로등만이 겨우 어둠을 밝히고 있었다.

몇 시간 후면 여명이 떠오르겠지.

슬슬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스윽……

나는 넣어뒀던 변장 도구들을 하나씩 착용하였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내쉰 뒤.

타앗-!

어두운 도시 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복수라는 명분으로, 화를 풀어내기 위해서.

*

시민 사랑 복지단 본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도지혁은 외부를 지키는 경비원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아, 개 같은 년. 존나 재네….”

그는 무언가 메시지를 나누고 있는지 건물 외벽에 기대어 휴대폰을 매만지고 있었는데….

자신이 경비 임무를 맡고 있다는 걸 잊어버린 모양인지, 담배를 입에 문 채로 휴대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당분간 저러고 있겠네.’

외부 경비로부터 시선을 거둔 도지혁은, 이번엔 주차장 입구를 지키는 경비원의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의자에 깊숙이 기대어있는 경비원.

계속 같은 자세로 움직이지 않는 게, 아무래도 깊게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지금이다.’

마력을 끌어올린 도지혁은 ‘기척 차단’을 사용하여 스스로의 인기척을 지워냈다.

학창 시절, 같은 반에 있던 학생으로부터 훔쳐온 기술이었다.

스으윽……

그렇게 도지혁은 그림자를 타고 움직이며 천장에 매달렸고,

스으윽… 스으윽…

어두운 주차장 내부로 천천히 들어서려는 찰나.

“크흠, 음….”

갑자기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키는 경비원.

“!”

살짝 놀랐던 도지혁은 재빨리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며 관리인의 눈치를 살펴보았고,

“…으음….”

경비실 내부의 CCTV를 흘끔 쳐다본 경비원은, 주섬주섬 자세를 고치곤 아예 모자로 얼굴을 덮어버렸다.

‘…휴우….’

도지혁은 다시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주차장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천장 한구석에 달린 CCTV를 발견한 후, 사각에 몸을 숨긴 뒤에 이번엔 ‘탐지술’을 사용하였다.

언젠가, 임아린에게서 훔쳐온 탐지 마법을 개량한 만든 기술이었다.

웅웅웅웅……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작은 알갱이로 이루어진 마력구들이 퍼져 나간다.

이곳저곳에 부딪힌 마력구들은 주차장 안쪽으로 점차 파고들었고,

자연스레 주차장 내부를 3D지도로 만들어낸 도지혁은, CCTV를 피해 가며 주차장 안쪽으로 침입했다.

‘…여긴 거 같은데….’

이윽고 지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를 찾아낸 도지혁.

[ 관리자 외 출입금지 ]

도지혁은 엘리베이터로 통하는 문을 앞에 두고 잠시 고민에 빠졌다.

원작에선 처음부터 소란을 일으키고 들어간 덕분에 엘리베이터가 아닌 비상계단을 이용하여 지하로 쳐들어갔다.

당연히 지하엔 침입을 알아챈 흑사회 조직원들이 깔려있었고, 설주희는 시원하게 길을 뚫어버리며 윤재덕을 잡으러 갔는데….

지금은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갔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다.

‘위험 부담은 줄이는 게 맞겠지.’

도지혁은 그대로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곤 비상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끼이이익……

그리고는 최대한 소음을 줄인 채로 계단 너머로 다시 한번 탐지술을 사용해보았는데….

“……?”

이번엔 계단 아래쪽에서 알 수 없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그것도 무려 두 명의 움직임이었다.

‘CCTV는 없으니까….’

도지혁은 재빨리 두 사람을 처리하기로 하며 인기척을 지운 채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자, 자기야…!”

“야, 조용히 해…!”

비상계단에 숨어, 몰래 뜨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던 한 쌍의 남녀를 발견하고 말았다.

‘으휴….’

못 볼 꼴을 봤다며 조용히 고갤 내젓던 도지혁은, 미리 챙겨두었던 기절환을 가루로 만들어 계단 아래쪽으로 흩뿌렸다.

그러자….

“어라아….”

“머리가….”

털썩- 털썩-

두 남녀는 서로를 끌어안으며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쯧.”

도지혁은 쓰러져버린 두 사람을 뒤로하곤 계속해서 계단을 내려갔다.

이렇게 과감히 비상구에서 관계를 맺는다는 건, 다른 사람이 계단을 이용할 가능성이 적었다는 뜻.

아무래도 늦은 새벽이라, 깨어있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윤재덕만 찾으면 되겠다.’

그렇게 비상구 끝에 다다른 도지혁.

문이 달리지 않은 걸 확인한 도지혁은, 복도가 잠잠한 걸 확인하곤 탐지술을 사용하여 비상구 너머의 구조를 조심스레 살펴보았다.

“…….”

비상구 너머의 복도에서 확인된 방은 총 다섯 개.

윤재덕의 방으로 추정되는 복도 끝의 넓은 방은 주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듯 살짝 열려있는 상태였고, 예상대로 다른 방의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는지 쥐죽은 듯 고요했는데….

쏴아아아아--

복도 끝쪽 방에서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안쪽에서 누군가 샤워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윤재덕이구나.’

*

“흐흐흥….”

윤재덕은 한창 기분 좋게 샤워를 즐기고 있었다.

몇 시간 전에 치러진 흑사회의 정기 보고회에서 크게 칭찬을 받아, 자신의 입지를 단단히 굳혔기 때문이었다.

‘이대로만 가면, 이 좆 같은 건물에서 금방 탈출할 수 있겠어.’

모든 흑사회의 조직들이 그러하지만, 대외 활동을 펼치는 시민 사랑 복지단은 특히 주목을 많이 받는 곳.

사실상 언제 꼬리가 잘려도 문제가 없는 조직원을 보내는 곳이나 다름없었는데….

최근 약물 관리 문제로 실수를 저지른 윤재덕은 반성의 의미로 복지단을 맡게 되었고,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여, 아예 지하에 몸을 숨긴 채로 조직을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후우….”

이윽고 샤워를 마친 윤재덕은 대충 가운을 걸치곤 입에 담배를 꼬나문 채로 욕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방구석에 갖춰진 화장대에 서서, 담배를 비벼 끄곤 로션을 얼굴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흐흐흥….”

그 순간.

오싹-

목덜미를 스치는 정체 모를 살기.

“!”

화들짝 놀란 윤재덕은 황급히 마력을 끌어올리며 뒤를 돌아보았고,

싸아아악---!

눈앞에서 번뜩이는 칼날에 놀라, 반사적으로 몸을 내던졌다.

쿠당탕-!

“너, 너 뭐야 이 새끼야!”

가까스로 공격을 피한 윤재덕은 다급히 침대맡에 놓아둔 단도를 챙기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브랜드를 알 수 없는 새카만 전투복에 흔히 구할 수 있는 전투용 헬멧.

그리고 아카데미 학생들이나 사용할법한 싸구려 검까지.

키가 크고 체격이 건장한 걸로 겨우 남성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을 뿐, 도저히 정체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씹새끼들이, 겨우 이런 놈 하나 안 막고 대체 뭐하는 거야…!”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단도를 움켜쥐는 윤재덕.

싸움 하나로 간부까지 올라왔던 그는, 흑사회 간부 중에서도 대인전에 강한 편이었다.

‘이 새끼만 잡아서 넘기면…!’

윤재덕은 이 일을 계기로 복지단에서 탈출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군지 몰라도, 너 잘 걸렸다!”

그의 능력은 ‘초고속’.

먼저 선수를 잡고 단숨에 숨통을 끊는 것이 장기인 윤재덕은, 혼란을 일으킬 목적으로 잔상을 남겨가며 순식간에 뒤쪽으로 접근했다.

사실상 필살기나 다름없는 기술이었다.

‘뒤져라…!’

윤재덕은 자신의 접근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멀뚱멀뚱 서있는 상대의 모습에 승리를 확신하며 칼날을 힘껏 찔러넣었는데….

후욱-

“…어?”

칼날은 힘없이 허공을 가르고 말았고,

“꽤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네.”

이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뭐, 뭣…!”

그새 도지혁이 능력을 훔쳐가버린 것이다.

“고맙다.”

“…자, 잠깐…!”

곧이어 방안에 울려 퍼지는 충격음.

털썩-

윤재덕은 눈앞이 번쩍거리는 감각과 함께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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