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89화 (89/165)

반짝거리는 간판들.

라이트를 켜고 줄줄이 기어 다니는 차들.

화려하게 꾸민 채로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젊은이들.

술집 앞에 앉아, 가방을 끌어안고 곤히 잠든 취객들까지.

도시의 밤은 꺼지지 않는다고 하던가.

깊은 새벽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강남의 길거리는 여전히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

도지혁에게 붙들려 끌려가고 있던 설주희는 매우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나타나 말없이 자신을 끌고 가는 도지혁의 행동도 그렇고,

불법 약물을 사기 위해 쓰지도 않던 현금을 일부러 챙겨온 자신의 행동도 그렇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짜증 나….’

설주희는 꽉 붙잡힌 자신의 팔을 잡아당기며 저항했다.

“…이거 놔.”

그러자 도지혁이 슬쩍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더니….

“…….”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내 묵묵히 팔을 잡아당기며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프다고…!”

손목이 아프다는 핑계로 손을 뿌리치려는 설주희.

사실 그녀는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고작 손에 붙잡혀서 아파할 정도로 연약하진 않았으니까.

이는 도지혁도 굉장히 잘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스륵-

문득 도지혁이 걸음을 멈추며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고,

“…….”

설주희는 희미한 해방감과 동시에 이유 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슬쩍 팔을 빼내려고 했다.

바로 그때.

덥석-

도지혁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

설주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감각에 눈을 크게 뜨곤 도지혁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됐지?”

일방적으로 확인을 받아낸 도지혁은, 다시 설주희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

설주희는 그런 도지혁의 행동이 매우 불쾌했다.

그런 암시에 걸려있었으니까.

다른 여성을 어루만졌던 손으로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역겹고,

여태껏 모르는 체해놓고 이제 와서 자신에게 간섭해오는 그의 행동에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왠지 모르게 저항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얼마든지 뿌리칠 수 있었지만,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

혹시 놓칠까 싶어, 꽉 붙잡아오는 그의 커다란 손이, 마치 방황하던 자신을 바로잡아주는 듯한 기분이 들었기에.

얌전히 그를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

택시를 타고 도착한 설주희의 집.

대체 이 동네에 얼마 만에 오는 건지 모를 정도로 오래된 기분이었지만, 마치 고향에 찾아온 것처럼 묘한 익숙함도 느껴졌다.

“…어디까지 가는 건데.”

“네 집.”

그렇게 설주희의 물음에 단호히 대답하며 현관으로 다가간 나는, 비어있던 손으로 비밀번호를 눌러보았다.

삐리릭- 철컥-

혹시 했는데, 여전히 비밀번호는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들어와.”

“…….”

은근히 들어가길 거부하는 설주희를 강제로 이끌며 집안으로 들어선 나는, 어두운 거실 불을 밝히곤 그녀를 소파에 앉혔다.

“하아….”

순순히 소파에 앉은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푹 눌러썼던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기 시작했고,

이내 마스크까지 모두 벗어내곤 사뭇 날카로운 눈빛을 띠며 눈을 마주쳐왔다.

마치 ‘이제 어쩔 건데?’라고 묻는 듯한 사나운 눈빛.

아무래도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내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놀랐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너….”

순간 터져 나오려던 욕지거리를 가까스로 붙잡은 나는, 크게 심호흡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화를 잠재웠다.

나는 설주희가 그딴 쓰레기 같은 걸 돈 주고 사는 인간이 아니기를 기도했다.

그저 내가 잘못 본 거라고.

내 능력이 잠깐 고장 나서, 설주희의 상태창이 잘못 표시된 거라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그녀가 맞다는 걸 확인한 뒤에도 곧장 끼어들지 않았다.

정말 우연히 골목을 지나가는 길이고, 내가 엄한 오해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뒷일을 모두 내팽개치곤 그녀의 행동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어두운 사각에서 걸음을 멈추고.

갈라진 벽 틈새에 끼워져 있던 하얀 가루가 그녀의 주머니 속으로 사라진 찰나.

내 믿음이 산산조각 내버리고 말았다.

“…내놔.”

나는 필사적으로 화를 억누르며 설주희에게 손을 뻗었다.

일단 약부터 뺏고 난 뒤에 뭐든 조처를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뭘?”

그녀가 시선을 휙- 돌리며 발뺌을 하기 시작했다.

‘…침착하자….’

잠시 욱했던 나는, 일단 약부터 받아내자는 생각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아까 주머니에 넣었잖아. 다 봤어.”

“…안 넣었는데?”

“설주희. 좋은 말로 할 때 줘.”

“지금 나 협박해?”

“어.”

내 강압적인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내가 왜 줘야 하는데?”

설주희가 표정을 구기며 내게 반항하기 시작했고,

“네가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 나는 뭐, 네가 하라면 하고, 하지 말라면 안 해야 해?”

“설주희.”

“그리고. 너는 거기 왜 있었던 건데? 혹시 너도 거기서….”

“설주희!!!”

결국, 비아냥거림에 화를 참지 못 한 나는 무심코 목소리를 높이고 말았다.

“너, 지금 네가 잘했다고 생각해? 내 앞에서 그런 짓을 해놓고, 감히 그딴 말을 지껄여!!”

그리고 잠시 후.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내가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았다.

상대는 설주희.

그 누구보다 욱하는 성격이 강한 그녀였다.

‘…젠장….’

나는 분명 그녀가 불같이 화를 내며 맞받아쳐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

무슨 일인지 순간 나를 바라보던 설주희의 눈빛이 살짝 풀어지더니….

“…어쩌라고.”

전혀 예상치 못 한 반응을 보여오기 시작했다.

“내가 그렇게 말하면 어쩔 건데.”

나는 처음 보는 그녀의 반응에 외려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화를 내면 화를 냈지, 큰 소리를 듣고도 이런 반응을 보여온 적은 없었기에.

“어쩔 거냐고. 왜 말을 못해?”

설주희는 마치 나를 비웃듯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리며 내 화를 살살 긁어왔다.

마치 내가 화내는 걸 기대하는 것처럼.

“너 때문에 약값도 못 주고 왔어. 이러다 블랙리스트 오르면 네가 책임질 거야?”

듣다 못 한 나는, 우선 그녀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적당히….”

바로 그 순간.

“적당히 안 하면, 때리기라도 할 거야?”

설주희가 내 말을 툭- 잘라버렸다.

“…뭐?”

침을 꿀꺽- 삼키곤 묘하게 눈을 번뜩이며 은근히 시선을 보내오는 설주희.

고운 얼굴을 살짝 앞으로 빼고 있는 게, 팔을 휘두르면 그대로 손바닥에 맞닿을 것만 같았다.

“…….”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짧게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기분이 이상했다.

그 누구보다 밝게 빛나던 설주희가 마약에 손을 댄 것도 이상하고,

그런 그녀를 위해 진심으로 화를 내고 있는 것도 이상했다.

정말…. 모든 게 다 실망스러운 기분이었다.

“후우….”

크게 심호흡을 내쉬며 다시 설주희와 눈을 마주친 나는, 그녀를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그냥, 너 알아서 해. 약을 하던, 뭘 하던…. 그냥 하고 싶은 거 다 해.”

그러자.

“…어?”

외려 예상치 못했다는 듯 살짝 당황스러워하는 그녀.

나는 사무치는 회의감에 한숨을 내쉬며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미안하다. 괜히 아는 척해서. 나 같은 건 꼴도 보기 싫을 텐데, 괜히 붙잡고 잔소리해서 정말 미안하다.”

“…….”

설주희는 어쩔 줄 모르는 듯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나를 바라보았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떠오른 한 가지 부탁을 남겼다.

“…혹시 하는 말이지만…. 제발 아린이한테는 권하지 마라. 제발 너만 해.”

그녀가 임아린마저 타락시킬까 두려웠다.

“…잘 지내라.”

나는 그렇게 인사를 끝으로 설주희를 뒤로하며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더 이상….

그녀와 얼굴을 마주 보고 싶지 않았다.

*

홀로 남은 집안.

“…….”

설주희는 멍하니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약을 꺼내보았다.

얼마나 밀봉이 잘 돼 있는지, 험하게 굴었음에도 여전히 잘 포장돼 있었다.

툭-

새하얀 가루가 든 봉지가 바닥을 뒹군다.

설주희는 아직 약을 하지도 않았음에도, 끔찍한 감정의 늪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차라리 약이라도 했으면 잠깐이나마 행복했을 텐데.

이제는 그럴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흑….”

눈물이 앞을 가린다.

도지혁이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이 좋아서, 그를 자극했다.

“…흐윽….”

약 없인 혼자 잠들지도 못하고.

“…끅….”

끝내 마약이나 찾아다닌 한심한 자신에게도 자상히 대해주는 그의 행동에 잠시 행복을 느끼고 말았다.

“…흐읏….”

하지만….

결국, 제 손으로 모든 걸 망치고 말았다.

“…흐으….”

도지혁은 크게 실망하여 떠나버렸고,

이젠 정말로 혼자가 돼버리고 말았다.

“…흑, 흐읏….”

비참하다는 기분이 이렇게도 고통스럽던가.

그냥 조금만 더 관심을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조금만….

아주 조금만 텅 빈 마음을 채워주길 원했을 뿐인데.

풀썩-

“끄윽…. 흑….”

소파에 쓰러진 설주희는 서럽게 눈물을 터트렸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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