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87화 (87/165)
  • 오전 훈련이 끝난 이후, 어느덧 찾아온 점심시간.

    멤버들과 식사를 마친 나는, 막간을 이용하여 진서원에게 스카우트를 시도했던 ‘행복 길드’에 대해 간단히 조사를 해보았는데….

    ‘이 녀석들…. 사업을 얼마나 크게 키운 거야?’

    그 결과, 나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흑사회의 덩치가 크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흑사회의 하위 조직인 ‘시민 사랑 복지단’에서 마땅한 성과도 없던 무명 길드인 행복 길드와 엮인 이유는 십중팔구 자금 융통일 터.

    통계에 따르면 등록 이후 활동 없이 사라지는 길드가 연간 약 300개정도 된다고 하니….

    그동안 이런 식으로 얼마나 자금을 돌려댔을지, 그 규모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러니 국정원에서 털려고 기를 쓰지.’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흑사회가 예상치 못한 변수를 창출한다는 걸 알아차린 순간부터, 흑사회를 소탕할 명분은 충분히 갖춰졌다.

    이제 필요한 건 내가 흑사회를 건들만한 명분.

    바로 도지혁이라는 인물이 직접 나설 명분이 필요했다.

    ‘이 새끼들을 어떻게 조질까….’

    원작 속 설주희는 뜬금없이 국정원에게 의뢰를 받으며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즉, 국정원에서 설주희를 간택했다는 뜻하며,

    반대로 나는 국정원과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걸 뜻하기도 한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먼저 국정원에게 접근하는 건 그야말로 무리수.

    아무리 공인에 가까운 사람이라고 해도, 다짜고짜 국정원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건 말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나에겐 흑사회에 앙심을 품고 직접 나설만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뭐가 좋을까….’

    가장 빠르고 확실한 건 역시 흑사회가 내 사람들을 건드는 것이다.

    복수는 그 어느 명분보다 설득력 있고 확실했기에.

    그러나 정말로 내 주변 사람들이 무언가 피해를 받는 건 곤란하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계기이지, 정말로 누군가 다치는 게 아니다.

    ‘마땅한 방법이 없네.’

    그렇게 한참 머리를 굴리며 내가 나설 방법을 떠올리던 도중.

    “…!”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내가 나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프로듀서 도지혁’은 공인에 가깝다.

    신분도 신분이고, 지금까지 계속 무시해왔던 덕분에 얼굴이 팔린 상태로 흑사회와 맞설만한 명분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프로듀서가 아니라면?

    흑사회와 맞서는 게 ‘도지혁’이 아니라….

    ‘익명의 인물’이라면?

    *

    흑사회 소탕을 결심한 직후.

    나는 원작의 정보를 떠올리며 사전 조사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첫 번째 목표는 시민 사랑 복지단.

    흑사회의 대외 사업이 모여드는 곳으로, 일종의 중간 관리직에 해당하는 하부 조직이다.

    원작에선 설주희가 이곳에 위장취업하여 정보를 캐고, 흑사회 간부를 때려잡아 흑사회 소탕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열혈 독자로서 대체적인 정보를 모두 기억하고 있던 나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할 계획이었다.

    “우와….”

    세련된 건물에 깜짝 놀란 듯한 반응을 보이는 방한나.

    오늘의 정보 수집을 도와줄 일일 파트너다.

    “건물이 엄청 예뻐요…!”

    그녀는 평소와 다르게 깔끔하고 얇은 셔츠에 긴 바지를 입으며 성숙한 느낌을 내고 있었는데,

    워낙 장신이라 그런지, 평소의 발랄한 느낌보다 훨씬 더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찾아보니까, 식당 하려고 건물을 다시 세웠대.”

    “진짜요? 그럼 이게 다 식당인 건가…?”

    시민 사랑 복지단의 건물은 정감 넘치는 이름과 다르게 상당한 부촌에 위치해있다.

    원작 정보에 따르면, 복지단의 대표이자 흑사회의 간부인 윤재덕은 창고로 표시된 건물 지하 깊숙한 곳에 상주한다고 한다.

    일단 윤재덕을 잡기 위해선 전반적인 건물의 구조를 알아야 하는 법.

    물론 직접 발로 뛰며 건물 주변을 확인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만, 뜬금없이 ‘도지혁’이란 인물이 시민 사랑 복지단의 건물을 염탐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서 내가 택한 방법이 바로 간접 염탐.

    멤버 별 식사 면담을 핑계로, 복지단 건물 바로 맞은편 식당을 연달아 예약한 것이다.

    “저, 이렇게 비싸 보이는 곳은 처음이라 그런가, 살짝 떨려요….”

    “비싸봤자 한 끼 때우는 식당이야. 적당히 학식 먹는다고 생각해.”

    “하, 학식은 비싸봤자 6천원인걸요….”

    살짝 기가 죽은 와중에도 재빠르게 휴대폰을 꺼내어 인증샷을 찍어대는 방한나.

    그 모습이 묘하게 귀여워 보여서, 나도 모르게 살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데려오길 잘했네.’

    원래는 임아린과 함께 식사를 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치가 워낙 빠르기도 하고, 얼굴이 많이 알려진 유명인인 탓에 일부러 방한나를 데려온 것이다.

    “…….”

    그렇게 방한나를 뒤로하고 자연스레 시선을 돌린 나는, 맞은편에 세워진 복지단의 건물을 유심히 훔쳐보았다.

    시민 사랑 복지단의 건물은 꽤 오래전에 지어진 듯 평범한 외형을 하고 있었는데, 창마다 빽빽이 블라인드가 쳐져 있는 게, 사뭇 폐쇄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경비는 세 명….’

    외부에서 확인된 경비 인력은 총 세 명.

    마치 순찰을 돌 듯 건물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두 명과 지하 주차장 입구를 관리하는 한 사람이 눈에 띄었다.

    묘하게 험악한 인상과 미처 숨기지 못하고 살짝 드러난 문신 그리고 D급 이상의 능력자인 걸 보니, 흑사회 소속이 맞는 것 같다.

    ‘지하 주차장으로 뚫는 게 낫겠네.’

    원작에선 설주희가 막무가내로 정문을 부수고 들어서며 달려드는 흑사회 조직원들과 정면으로 돌파했다.

    독자로선 그 시원시원한 전투 장면이 매우 마음에 들었지만, 그 덕분에 윤재덕이 도망칠 뻔했다는 걸 생각해보면, 지하 주차장으로 침입해서 윤재덕만 처리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프로듀서님!”

    그때, 사진을 찍던 방한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시간 다 됐어요!”

    슬슬 식당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

    “우와…. 여기 인테리어가 엄청 예뻐요…!”

    식당으로 들어선 방한나와 도지혁은, 예약했던 대로 맞은편 건물이 잘 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곳에 앉아 답답하지 않게 식사하고 싶다는 이유였지만, 실상은 도지혁이 맞은편 건물을 편하게 염탐하기 위함이었다.

    “와인 페어링도 할까?”

    “와인 페어링이요…?”

    “코스에 맞춰서 와인 한 잔 씩 나오는 거야.”

    “아, 좋아요…!”

    그렇게 도지혁이 익숙한 모습으로 음식을 주문하는 사이.

    “…….”

    방한나는 맞은편에 앉은 도지혁을 새삼스레 감상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넘기지 않고 가볍게 정리한 머리카락.

    깔끔히 걷어 올린 셔츠 아래로 드러난 탄탄한 팔뚝까지.

    아예 처음 보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새삼스레 느껴지는 어른스러움에 살짝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저 손으로….’

    방한나가 고인 군침을 삼키며 내심 음험한 생각을 품고 있던 그때.

    스윽─

    문득 도지혁이 시선을 옮기며 눈을 마주쳐왔다.

    “…!”

    마치 부끄러운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살짝 놀란 방한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고 말았고,

    도지혁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한 듯,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서원이랑 연락 해봤어?”

    무슨 말인가 했더니, 하필 다른 여자의 이야기였다.

    ‘…서원이 이야기구나….’

    방한나는 자리에 없는 진서원의 이야기에 살짝 민감히 반응하고 말았다.

    진서원은 자신의 연적이나 다름없는 인물이었기에.

    물론 자신이 리더라는 이유로 먼저 식사 자리에 불리는 혜택을 받긴 했지만, 자리에 없는 진서원에 대한 언급은 살짝 거슬리게 느껴졌다.

    “아, 아직 안 해봤어요…!”

    방한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그러자….

    “밥은 먹었는지 모르겠네. 한번 연락 해볼래?”

    설상가상 식사 여부를 물어보라며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내왔다.

    ‘어련히 배고프면 먹을 텐데….’

    방한나는 도지혁이 진서원을 마치 애처럼 대하는 것이 불만이었다.

    물론 진서원은 애가 맞긴 하지만….

    유독 진서원을 특별하게 취급하는 것 같아서, 이해가 되는 한편 살짝 불만스럽기도 했다.

    “잠시만요….”

    휴대폰을 꺼내어 진서원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방한나.

    [ 나: 밥 먹었어? ]

    [ 서원이 : 아직 ]

    이윽고 진서원으로부터 안 먹었다는 답장이 돌아왔는데….

    “또 밥 거르려고….”

    도지혁은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어 진서원에게 저녁 식사 인증샷을 요구했고,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방한나는, 외려 도지혁의 유난스러운 모습에 다시 마음이 놓였다.

    ‘그래…. 서원이 같은 애한테 그런 마음이 들 리가 없지.’

    진서원은 도지혁의 관심과 애정을 한 몸에 받는 요주의 인물.

    동시에 도지혁의 이상형과는 거리가 먼 타입이나 마찬가지인데,

    오히려 진서원 덕분에 도지혁이 방한나에게 의지하는 일도 많아졌으니,

    방한나에게 있어서 진서원은 말 그대로 애증에 가까운 존재라고 볼 수 있다.

    “실례합니다. 첫 번째 아뮤즈 부쉬와 함께 와인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 다른 생각을 품은 채로 시간을 보내길 잠시, 드디어 나오기 시작한 음식들.

    “와…. 예쁘다….”

    금세 눈길을 빼앗겨버린 방한나는 일단 눈앞의 식사부터 즐기기로 결심했고,

    “…….”

    도지혁은 창밖에 우뚝 솟아난 복지단 건물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

    “…….”

    홍유라가 집을 비워 오랜만에 홀로 남은 설주희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SNS를 염탐하고 있었다.

    그녀는 최근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버린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도지혁에 대해 떠올리면 떠올릴 수록 증오심은 깊어져 갔고,

    그런 도지혁과 붙어먹은 임아린에 대해 배신감은 점점 몸집을 불려갔다.

    그래서 매일같이 꼬박꼬박 약을 먹어 강제로 뇌를 비우곤 SNS만 바라보았는데….

    하루하루 흘러갈 수록, 아릿한 공허함이 그녀의 가슴속을 가득 메워가고 있었다.

    정말, 죽지 못해서 산다는 느낌이었다.

    “…….”

    그렇게 설주희가 멍하니 휴대폰만 매만지던 도중.

    띠링─

    익명의 SNS 계정으로부터 메시지가 날아왔다.

    [ 신용 안전 거래! 1g 15.0…… ]

    종종 날아오는 불법 약물에 관한 광고였다.

    “…….”

    설주희는 평소 불법 약물을 즐기던 사람들이 참 멍청하다고 생각했었다.

    파멸로 이끄는 독극물을 스스로 섭취하는 건 말 그대로 자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에.

    대체 어떤 정신으로 손을 대는 건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분명 그랬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라도 분 건지, 광고 메시지에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톡─ 톡톡─

    무감각함 일상에 변화를 주고자 살짝 장난을 친다는 감각이었다.

    ‘…어차피 진짜로 사는 건 아니니까….’

    설주희는 속으로 합리화를 해가며 손가락을 옮기면서도, 참 어이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장난이라도, 이런 사회의 쓰레기들과 대화를 나눌 필요는 없었으니까.

    [ 자세한 건 메신저로 연락 주세요 @iceking7272 ]

    하지만.

    두근두근─ 두근두근─

    설주희는 오랜만에 심장이 크게 뛰는 걸 느끼고 말았다.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걸 저지를 때 느껴지는 배덕감이었다.

    “…….”

    설주희는 메신저를 켜서 상대의 계정을 찾아 말을 걸어보았고,

    [ 구매 원하시면 서울시 강남구… ]

    ‘…진짜로 하는 건 아니니까….’

    무언가에 홀린 듯이, 구매 의사를 밝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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