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86화 (86/165)

여느 때처럼 임아린과 뜨거운 밤을 보낸 직후.

‘잠들었나?’

임아린이 잠들었음을 확인하곤 이불을 덮어주며 조용히 거실로 빠져나온 나는, 시원한 물을 들이켜며 거실 소파에 자리를 잡았다.

[ 01 : 57 am ]

분명 11시쯤 시작한 거 같은데, 벌써 새벽 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하아….”

나도 모르게 무거운 한숨이 튀어나온다.

임아린과 시간을 보내는 건 좋았다.

그녀와 함께하면 할수록 지금껏 즐기지 못했던 시간을 보상받는 기분이었고,

뇌가 저릿할 때까지 사랑을 나누다 보면, 묘한 안정감과 포근함에 마음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행복한 걸로만 치면, 이미 천국에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그녀와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가슴 한쪽에 자라난 알 수 없는 불안함이 점점 몸집을 키워나갔다.

마치, 지금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

‘…이대로 괜찮을까….’

사실 말 그대로 근거 없는 불안감이긴 하다.

이보다 좋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운 상황이기에.

일단 첫 번째 목표인 마왕군 침공 방어 계획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

원작 소설 ‘최강고수’에서 마왕군을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주된 원인은 정부의 우유부단하고 안일한 대처 때문.

요컨대, 마왕군의 침공 자체를 너무 하찮게 여긴 탓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나에겐 마왕군의 위험성을 주장할 수 있는 영향력이 있으며, 세진과 백일이라는 든든한 지원군까지 등에 업고 있다.

막말로 정부가 나서지 않더라도 세 번째 침공 정도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인데,

큰 변수 중의 하나인 ‘천마’를 아예 아군으로 편입시켜버렸다.

사실상 세 번째 사건이 전세를 기울게 하는 주요 분기점이니….

이것만 잘 막아내면 마왕의 침략도 훨씬 순조롭게 막아낼 수 있을 테고, 퀸즈만 제때 활약해준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마왕군을 격퇴할 수 있으리라.

그럼 두 번째 목표는 어떤가?

내 두 번째 목표는 진정으로 하고 싶은 걸 하며 사는 것.

프로듀서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목표는 사실상 이미 떼놓은 당상이라고 볼 수 있다.

리더인 방한나와 에이스 진서원의 선전으로 팀 서울시청의 주가는 나날이 높아져 가고 있으며, 다재다능한 전략 요소인 김나래의 중요성도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한 상황이기에.

당연히 팀 서울시청의 가치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시장에서의 내 입지도 넓어질 테니, 마왕의 침공만 잘 막아내면 자연스레 두 번째 목표도 이룰 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언가 놓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정말로 내가 놓친 게 존재할지도 모른다.

풀썩-

소파에 깊숙이 몸을 기댄 나는,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혹시 고려하지 못한 맹점을 찾기 위하여 곰곰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분명 큰 변수는 모두 막았어….’

이 세계에 떨어진 이후, 나는 원작에 등장했던 여러 가지 변수들을 컨트롤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기본적으로 원작인 ‘최강고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눈덩이 효과의 논리로 스토리가 진행됐다.

독자의 입장에선 재밌을지 몰라도, 직접 겪게 될 사람의 입장에선 정말 쓸데없는 전개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애초에 눈덩이가 굴러가지 않도록 ‘퀸즈’라는 팀을 만들어버렸으며,

걸리적거리는 변수들을 모두 사전에 차단하거나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만약 내가 눈덩이를 굴리지 않아서 놓친 변수가 생겼다면?

애초부터 원작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은 탓에,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변수가 생겨버렸다면?

‘그럴듯한데….’

원작 소설의 설주희는 막 능력을 각성하여 헌터로 활동하게 되고, 그 사이에 벌어진 수많은 사건들을 헤쳐나가며 성장해나갔다.

하지만.

지금의 설주희는 그렇지 않다.

다르게 말하면, 설주희가 간섭하지 않은 탓에 결과가 달라진 사건들도 존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

나는 오래된 기억을 거슬러 오르며 원작 속 설주희의 행적을 떠올려보았다.

시즌 종료까지 한 달 정도 남았으니….

국가정보원, 통칭 ‘국정원’의 산하 조직으로부터 의뢰를 받아 한창 사건을 해결하고 있을 즈음이었다.

‘국정원이라….’

희귀 아이템을 받는 조건으로 국정원과 결탁한 설주희는, 뒷세계에 암약하던 ‘흑사회’를 직접 소탕하고 다녔다.

그러다 나중엔 범죄 조직의 뒤를 봐주던 서울시장 이상흠을 응징하고 세상에 정체를 드러냈는데,

외려 정부에 관한 시민들의 신뢰도가 떨어지는 사건으로 이어지며, 뒤이은 마왕군의 세 번째 침공을 막는데 큰 장애가 따르고 말았다.

‘그 녀석들…. 꽤 덩치가 큰 놈들이었지.’

흑사회는 사회 전반적으로 적잖은 영향을 끼치던 거대 조직으로 나름 원작에선 비중을 지닌 빌런 조직이었으나,

갑자기 돌아버린 작가가 막장 전개를 이어나가기 시작하며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버렸다.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국정원이나 흑사회 같은 원작 속 조직들에 큰 눈길을 주지 않은 건, 그놈들을 상대할 시간에 퀸즈를 성장시키는 편이 훨씬 효율이 좋았기 때문.

하지만 통제하지 못한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는 걸 인지한 이상, 이전처럼 마냥 무시하기가 어려웠다.

‘으음….’

그렇게 혹시 놓친 변수가 없나 고민하고 있길 얼마나 지났을까.

“머해…?”

졸음기 가득한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아무래도 임아린이 깬 모양이었다.

“깼어?”

“웅…. 뭐 하고 있었어?”

“그냥, 이것저것 생각 좀 하느라….”

자연스레 소파로 다가와 품 안에 풀썩 안겨오는 그녀.

“안 자?”

“자야지.”

그녀는 귀엽게 몸을 꼼지락거리며 하품을 내뱉더니, 내 손을 잡고 자신의 잠옷 안으로 쑥- 집어넣곤 사랑스럽게 애교를 부려왔다.

“다시 재워줘.”

“그럴까?”

그렇게 나는 순순히 고민을 접곤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소파에 풀썩- 누워버렸고,

‘…내일 다시 생각해봐야겠다.’

말랑거리는 임아린의 몸을 주무르며 내심 다음을 기약했다.

*

“흐아암….”

다음날.

여느 때와 같이 훈련장으로 출근한 나는, 늘어지게 하품을 내뱉으며 원작에 등장했던 사건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보았다.

‘흑사회…, 흑사회…. 여기도 흑사회…. 생각보다 비중이 꽤 크네?’

그렇게 새삼 깨닫게 된 사실은 흑사회가 의외로 많은 에피소드에 연관이 돼 있었다는 것.

마치 작가가 마왕군 침공 사이의 에피소드를 채우기 위해 만든 집단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걸 어쩌면 좋을까….’

솔직히 흑사회 자체는 나에게 있어서 그리 문제가 되는 집단은 아니다.

막말로 내게 칼을 들이밀었다면 몰라도, 자기들끼리 해먹는 느낌이 강해서 별로 걸리적거리는 조직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왕 침공을 막는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거의 절반 이상의 에피소드가 흑사회와 연관이 돼 있는 상황.

흑사회를 미리 터트려버린다면 연관된 변수를 모두 차단할 수 있게 된다.

‘스읍…. 진짜 해버려야 하나?’

그렇게 한창 머리를 굴리며 멤버들이 탈의실에서 나오기만 기다리는 사이.

“…오…. …프로듀서님.”

“아. 나왔어?”

진서원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자. 네 거 챙기고, 다른 애들 나올 동안 먼저 몸이라도 풀고 있어.”

나는 별생각 없이 말을 꺼내며 미리 챙겨둔 음료를 건네주었다.

그런데.

“…….”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건지, 음료를 받아 든 진서원이 우두커니 서서 지그시 시선을 보내왔다.

‘뭐지?’

그런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품은 나는, 넌지시 말을 던져보았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그러자.

진서원이 묵묵히 주머니를 뒤지더니, 작은 명함을 꺼내어 내게 슬쩍 건네왔다.

“…나, 어제 이거 받았어.”

“이게 뭐야?”

[ 행복 길드 ]

신생 길드인지, 아예 처음 들어보는 길드의 명함이었다.

“이걸 누가 줬다고?”

“…응.”

진서원은 명함과 함께 돈을 많이 줄 테니, 관심 있으면 연락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덧붙여왔는데….

‘아주 전형적인 멘트네.’

종종 있는 양아치 길드의 스카우트 방식이라는 걸 눈치챈 나는, 알려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음부턴 무시해버리라는 조언을 들려주었다.

“걔네 다 사기꾼들이니까, 말도 섞지 마.”

“…사기꾼?”

“돈 많이 준다고 거짓말해서, 못된 짓만 저지르는 놈들이야.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냥 무시해버려.”

“…응.”

그렇게 진서원을 제보를 받은 나는, 다른 멤버들이 나오는 동안 ‘행복 길드’라는 곳에 대해 간단히 조사를 해보았다.

그런데.

“…응?”

행복 길드에 관련된 정보를 뒤지던 도중.

[ 행복 길드, 시민 사랑 복지단으로부터 투자… ]

정말 뜻밖에 이름을 발견하고 말았다.

‘시민 사랑 복지단?’

시민 사랑 복지단은 원작의 설주희가 위장 취업을 하는 에피소드에서 등장했던 조직으로….

이후에 등장하는 흑사회의 하위 조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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