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85화 (85/165)

곱게 땋은 황금색 머리카락과 살짝 달라붙는 단색 티셔츠.

그리고 배꼽까지 올라오는 청바지까지.

여느 대학생과 다름없는 청순한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압도적인 몸매 덕분인지, 묘하게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너, 여기 다녔어…?”

“네!”

나는 당당한 대답과 함께 미소를 지어오는 방한나의 모습에 살짝 당황하고 말았다.

이 학교에 다니는 건 그렇다 치더라도, 이 넓은 학교에서 하필 여기로 찾아왔단 말인가?

“앗!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백일 길드 소속 하진성입니다!”

“안녕하세요…!”

방한나를 알아보곤 눈치 빠르게 명함을 들이미는 하진성.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고 있던 나는, 틈을 엿보며 그녀가 찾아온 이유를 슬쩍 물어보았는데….

“아. 지금 2학기 신청하는 기간이라, 담당 교수님 좀 뵈러 왔어요…!”

알고 보니, 평일에 시간이 없어서 주말에 찾아왔다가, 우연히 내가 수업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사하러 온 거라고 한다.

‘난 또….’

잠깐이지만 그녀가 일부러 찾아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멋대로 착각해버린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내심 마음을 놓았다.

“볼일은 다 봤어?”

“어…. 그, 아직 이야기가 다 안 끝나서, 오후에 계속하기로 했어요…!”

꽤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는 걸까?

아직 담당 교수와의 면담이 남은 모양이었다.

“점심은 먹었고?”

“이제 먹을까 하는데…. 혹시 프로듀서님은 식사하셨어요…?”

“아니, 나도 이제 먹으려는 참이었어.”

“어! 그럼, 두 분이서 식사하고 오시죠?”

그때, 하진성이 슬쩍 끼어들며 자연스레 방한나와의 식사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괘, 괜찮아요…! 저 때문에 괜히….”

“아닙니다. 사실 요즘 배가 나와서, 식단을 좀 하고 있거든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근방의 맛집을 모두 꿰어두었다고 자랑하더니, 금세 말을 바꾸는 하진성.

왠지 눈치껏 자리를 피해 주는 느낌이 강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굳이 거절할 필요는 없겠지.’

“그럼, 한나랑 먹고 와도 괜찮을까요?”

“그렇게 하시죠! 편하게 식사하시고, 오후에 강의실에서 뵙겠습니다.”

“어, 어어….”

“한나야. 나, 안에서 지갑 좀 가지고 올게.”

“아, 넵…!”

그렇게 하진성의 호의를 받은 나는 방한나와 함께 점심을 해결하기로 했고,

얼떨결에 합류해버린 방한나는, 살짝 당황스러운 반응을 보이면서도 묘하게 기뻐 보이는 얼굴로 하진성과 조용히 눈인사를 나누었다.

*

도지혁이 한창 방한나와 함께 식사하러 갈 무렵.

“흐흥….”

집에 있던 임아린은, 콧노래를 부르며 인터넷에 올라온 기사들을 읽고 있었다.

[ 블랙 로즈의 독주. 새로운 시대 열리나? ]

[ 퀸즈 활동 중단… 그녀들은 어디에? ]

[ 단독) 퀸즈는 휴식 중. 오랫동안 달려와…… ]

[ 훌쩍 다가온 시즌 말. 순위 예측 이벤트… ]

현재 헌터 팀 랭킹 1위는 세진의 블랙 로즈.

굵직한 토벌들로 압도적으로 포인트를 벌어둔 퀸즈가 아직 2등을 유지하고 있긴 하지만, 언제 3위로 밀려날지 모르는 상황이다.

블랙 로즈와의 맞대결 이후 내부적으로 리빌딩 중이라고 대응했던 천화 길드는 결국, 퀸즈의 잠정 휴식을 알리며 사실상 시즌 종료를 선언해버렸고,

사건의 전말을 모르는 팬들과 언론은 그저 옥좌에서 내려온 퀸즈를 물어뜯기 바빴는데….

“히히….”

이를 지켜보던 임아린은 매우 만족스러워하고 있었다.

모든 게 자기 뜻대로 흘러가는데,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아….”

임아린은 복에 겨운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아랫배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최근 그녀의 근황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행복 그 자체.

사랑하는 그이와 알콩달콩 연애를 시작하고, 하루가 멀게 서로의 집을 오가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가증스러운 설주희와 홍유라 그리고 천화 길드에게 제대로 된 복수까지 치르고 있으니, 그녀의 삶에서 이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었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조금만 더 있으면…. 이제 모두 다 끝이야.’

임아린은 모니터 옆에 놓인 작은 달력을 흘끔 바라보며 더더욱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8월 1일.

공식적으로 시즌이 끝나는 날.

15년을 기다려온 계획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다.

배신자 설주희와 박쥐 같은 홍유라는 나락으로 떨어질 테고,

도지혁과의 사랑은 더더욱 견고해질 것이며,

더 이상 자신의 앞길을 막는 장애물은 없으리라.

물론 그 이후로 마왕의 침공이 예정돼있지만….

적어도, 도지혁이 마왕과 동귀어진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어떠세요?”

“맛있는데? 자주 오는 이유가 있어.”

“헤헷.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이에요…!”

방한나와 나는 정문 근처의 오래된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부대찌개가 대표 메뉴인 이곳은 그녀가 한창 등교하던 시절에 자주 오던 곳이라고 하는데, 오래된 곳이라 그런지 일반 식당과 다르게 은근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면담 다 끝나고, 바로 숙소로 가는 거야?”

“으음…. 아직 잘 모르겠어요. 프로듀서님은 언제쯤 끝나세요?”

“나는 수업이 4시 반까지라, 아마 그쯤 끝날 거 같아.”

“4시면….”

방한나가 무언갈 계산하는 듯 나지막이 시간을 되새기는 사이.

나는 별생각 없이 시선을 거두곤 다시 젓가락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학생 둘이 보기 좋구먼.”

주인 할머니가 다가와 슬쩍 말을 걸어오더니,

스윽─

우리 테이블에 웬 접시 하나를 무심히 올려주었다.

“내가 주는 서비스니까, 사이 좋게 갈라 먹어.”

바로 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준 것이었는데….

“안 주셔도 괜찮은데….”

“아유. 애인 굶기지 말고, 든든히 먹여. 여자는 배가 불러야 짜증을 안 내는 법이야.”

아무래도 방한나와 나를 커플로 착각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애, 애인이라니….”

“으응? 아직이야?”

부끄러워하는 방한나의 반응에 살짝 멋쩍어하는 주인 할머님.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짜증 안 내도록 든든히 먹일게요.”

눈치껏 재빨리 감사의 말을 전하자, 주인 할머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한 마디를 덧붙여왔다.

“어어, 그려. 밥 많이 있으니까, 많이 먹어! 둘 다 많이 먹어야 또 힘을 쓰지!”

“저 여편네, 또 저러네. 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서 일이나 해!”

결국, 주방에 있던 할아버지에게 잔소리를 산 할머님은 마치 응원을 하듯 주먹을 흔들어 보이며 그대로 자리를 떠버렸고,

“…….”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에 휩쓸려버린 우리는, 남은 식사와 서비스로 나온 계란말이를 해치우고 빠르게 식당을 빠져나왔다.

“…자, 잘 먹었습니닷….”

“나도. 덕분에 잘 먹었어.”

그렇게 겨우겨우 어색함을 벗어내고 다시 학교로 되돌아가던 길.

“응? 무슨 이벤트를 하네?”

사람이 몰리는 주말 오후의 대학가라 그런지, 평소엔 볼 수 없었던 온갖 행사를 마주할 수 있었는데….

“어, 저거…!”

그중에 방한나가 아는 게 있었는지, 살짝 흥미로워하는 반응을 보여왔다.

“뭔지 알아?”

“네…! 사진 찍을 때 쓰는 필터 어플인데, 요즘 엄청 유행이에요…!”

“그래? 좀 보고 갈까?”

아직 시간 여유도 있겠다. 우리는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행사장을 확인해보았고,

[ 이벤트 필터로 찍은 사진을 SNS에 올려서 보여주시면, 여러 가지 사은품을 드립니다. 예쁜 추억도 남기시고, 선물도 챙겨 가세요! ]

“프로듀서님…! 저희 이거 해요…!”

“…응?”

행사 내용을 살피던 방한나가 갑자기 열의를 보이며 참여 의사를 밝혀왔다.

“5만원짜리 프리미엄 필터를 한 달 동안 공짜로 쓸 수 있대요…!”

“좋은 거야?”

“엄청 좋은 거예요! 구독형 서비스로 해도 3만 원씩 받아가거든요…! 꼭 해야 해요!”

절대 놓칠 수 없다는 듯 드물게 눈을 번뜩이는 그녀.

솔직히 사진이나 SNS를 즐기지 않는 나로선 이해하기 힘든 감성이었지만….

“프로듀서님…!”

이렇게까지 하고 싶어 하는데, 굳이 거절하기도 뭐했다.

“어떻게 하는 건데?”

“잠시만요…!”

방한나는 내 마음이 바뀔세라 재빨리 행사 참여 방법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곧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이벤트 참여 방법을 내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보니까, 사진만 찍어서 올리고, 저기에 보여주기만 하면 된대요…!”

하필 함께 사진을 찍어서 SNS에 올리는 방식이었다.

“아…. 사진을 올려야 해?”

“…아.”

떨떠름한 내 반응을 확인하곤 뒤늦게 눈치를 살펴오는 방한나.

“그, 인터넷에 올리는 건…, 역시 조금 그렇겠죠…?”

그녀는 내심 아쉬운 듯 나를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애써 괜찮다는 말과 함께 휴대폰을 스윽─ 숨겨버렸다.

“새, 생각해보니까…, 굳이 없어도 괜찮을 거 같아요…! 나중에 필요할 때 사면 되니까….”

그럼에도 눈은 자꾸 행사장 쪽으로 향하는 게, 매우 아쉬운 눈치였다.

‘…사진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런 방한나의 모습은 내 마음을 흔들기에 매우 충분했다.

따지고 보면 겨우 같이 사진을 찍는 것뿐인데, 이런 거 가지고 유세를 떠는 것도 참 꼴불견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냐. 해보자.”

“…네?”

“사진이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 네 걸로 찍을까?”

잠시 멍하니 나를 바라보던 방한나는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왔고,

“자, 잠시만요…!”

내심 벅차오르는 기쁨을 참을 수 없다는 듯 입꼬리를 꿈틀거리며 휴대폰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내가 찍을까?”

“부탁드릴게요…!”

이윽고 방한나의 휴대폰을 건네받은 나는, 그녀와 나란히 서서 행사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얼굴이 잘 안 나오는데…, 조금만 더 뒤로 올래?”

“아…. 넵…!”

내가 사진을 찍는 기술이 없어서 그런지, 거의 찰싹 달라붙다시피 붙어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찰칵─

그렇게 총 3장의 사진을 찍어 SNS에 업로드한 후.

“화면 보여주시겠어요?”

“여기요!”

“네. 확인되셨고, 이쪽에서 상품 받아가세요.”

“감사합니다!”

마침내 원하던 사은품을 받아낸 방한나.

“프로듀서님은 진짜 안 쓰셔도 괜찮으세요?”

“나는 사진 잘 안 찍잖아.”

“헤헷…. 감사합니다…! 잘 쓸게요…!”

그녀는 재빠르게 SNS에 올려둔 게시글을 지우곤 다시 한번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왔고,

나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그녀의 반응에 내심 참여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그날 오후.

도지혁이 오후 강의에 들어간 사이.

담당 교수와 면담이 있다던 방한나는, 텅 빈 도서관에 앉아 휴대폰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실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헤헷….”

작은 액정 속에 띄워져 있는 건….

다름 아닌 도지혁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기다리길 잘했어…!’

사실 담당 교수와의 면담은 이미 오전에 끝난 지 오래.

그저 도지혁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내일은 또 뭐라고 둘러대지…?’

방한나는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다리를 흔들며 휴대폰 속 사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혹시 누가 볼까 싶어 목을 쭉 빼고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쪽─

휴대폰 속 도지혁에게 입을 맞추곤, 홀로 부끄러워하며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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