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윽…. 나쁜…. 끅….”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방한나의 모습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지…? 아니, 내가 꼬리를 쳤다고…?’
임아린과의 교제를 들켰다는 당황스러움.
그리고 방한나가 보여온 반응에 황당함.
온갖 감정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게,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미치겠네.’
혼란스러운 와중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는, 일단 이 개판인 상황부터 수습하기 위해 방한나를 달래주려고 했다.
“그, 한나야. 일단…, 일단 진정하고….”
그러나.
“나쁜노옴…. 또, 나 꼬시려고 그러지…!?”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해버린 그녀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런다고 내가 또 좋아할 거 같아…?! 이…, 이잇…! 바람둥이!!”
철푸덕─!
어림도 없다는 듯, 아예 방바닥에 널브러지며 시위를 하기 시작했다.
“나도 연애 할래애…!”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방한나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깊게 마음을 품고 있는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걸 어떡하지….’
상황을 보아하니, 혼자 마음을 키우고 있던 방한나가 내 연애 소식에 상심하여 술을 마신 것 같은데….
당장 어찌어찌 수습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활동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후우….”
답답한 마음에 괜히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며 방한나를 바라보던 나는, 일단 그녀를 들여보내고 보자는 생각으로 진서원에게 도움을 청했다.
“서원아. 일단, 한나 좀 들여보내게, 좀 도와줄래?”
그런데.
왠지 모르게 진서원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얘는 또 왜 이래…?’
덩달아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살짝 걱정이 된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방한나를 뒤로하곤 그녀에게 조심스레 다가갔다.
“…서원아?”
무표정한 얼굴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가만히 응시해오는 그녀.
마치 인형 같은 정갈한 외모로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으니, 어딘가 섬뜩한 느낌마저 들었다.
꿀꺽─
괜히 긴장하여 침을 삼킨 나는,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서원….”
그 순간.
“…오빠.”
그녀가 내 말을 툭 끊으며 나지막이 물어왔다.
“…임아린이랑, 사귀어?”
“…어?”
그녀는 여러 번 물어오지 않았다.
그저, 마지막으로 진실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담담히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설마….’
나는 명백히 이상한 그녀의 반응에, 그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녀가 뜬금없이 내게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이유를.
또래 아이들이 즐기는 데이트 코스에 굳이 나를 끌고 간 이유를.
그리고….
오늘 따라 묘하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던 이유를.
진서원도 내게 마음을 품고 있던 것이다.
“서원아. 그게….”
나는 다급히 그녀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솔직히 뭐라 할 말은 없었지만, 무슨 말이든 해야 했기에.
하지만.
“…….”
진서원은 이미 대답을 이해한 듯 시선을 툭─ 떨구었고,
파직─! 파지직───!
이내 그녀의 몸에서 새카만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능력을 사용한 것이다.
“서원…!”
머릿속을 울려대는 경고 신호에 화들짝 놀라, 다급히 그녀를 말리려는 순간.
쿠웅─!
시야가 뒤집혀버렸다.
*
“으읏….”
진서원은 자신의 밑에 깔린 도지혁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양 손목을 붙잡힌 채, 옴짝달싹 못하는 애처로운 모습.
“서, 서원아…. 일단, 일단 이것부터 좀 놓고 이야기하자…! 응?”
필사적으로 침착함을 끌어안으며 말을 걸어오는 그의 눈빛엔 희미한 공포심이 깔려있었고,
진서원은 처음 보는 그의 모습에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원아…!”
그 누구보다 강하고 듬직해 보였던 그가, 자신의 엉덩이 아래에 깔린 것이다.
꽈악──
“윽….”
손목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면 아파하고,
꼬오오옥─
“…자, 잠깐…!”
몸을 감싼 다리를 조이면, 그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희미한 그림자가 드리운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우월감에 젖어버린 진서원은 도지혁을 마음껏 주무를 생각에 침을 꼴깍─ 삼켰는데….
욕망으로 가득했던 진서원의 가슴속에, 자그마한 걱정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괜찮을까?’
그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배운 도덕적 저항감이 작동한 것이다.
‘…이건, 나쁜 짓인데….’
물론 도지혁이 자신을 속였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홧김에 저지른 짓이다.
그러나 아무리 우발적이었어도 폭력은 폭력.
진서원은 순간 자신의 행동이 나쁘다는 걸 인지하며 무심코 손에 힘을 풀어버렸고,
“…!”
그녀가 잠시 머뭇거린 걸 눈치챈 도지혁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진서원을 살살 회유하기 시작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오빠랑, 같이 침착하게 이야기해보자. 응? 일단 좀 일어나서….”
바로 그때.
“야.”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방한나가 나타났다.
“진서원 너어, 지금 뭐하냐…?”
“…한나야?”
“너이씨, 미쳤어!?”
이미 임아린의 소식으로 눈이 돌아가 있던 방한나는, 자신이 뻔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묘한 자세를 취한 두 사람의 모습에 더더욱 분노하고 말았다.
“진서원! 너, 언니가 말했지! 어?! 너는 위아래도 없어!?”
“한나야, 잠시만 조용…. 윽.”
방한나를 말리려다 다시 손목이 붙잡혀버린 도지혁.
“대답도 하기 싫다 이거지!?”
진서원과 잠시 눈싸움을 벌이던 방한나는, 그대로 도지혁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너어…. 그대로 꽉 붙잡고 있어!”
“한나야…?”
그리고 도지혁의 얼굴을 콱 붙잡은 그녀는….
“우웁…!”
그대로 입술을 훔쳐버렸다.
“쪽…쪼옵…쪽….”
집안에 울려 퍼지는 선명한 입맞춤 소리.
눈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진서원은 그 어이없는 광경에 순간 욱하고 말았고,
스윽─
이내 도지혁의 손을 놓아주더니….
그대로 방한나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휘둘러버렸다.
빡─!
쿠당탕─!
“푸핫…!”
가까스로 풀려난 도지혁과 머리를 부여잡고 바닥을 뒹구는 방한나.
‘…기, 기회다…!’
자신의 한쪽 손이 풀려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챈 도지혁은, 다급히 진서원을 밀쳐내려 했는데….
덥석─
“…어?”
금세 다시 붙잡혀버린 손목.
“…자, 잠깐만…!”
도지혁의 얼굴에 두려움이 엄습한 찰나.
“우붑…!”
이번엔 진서원이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쪽…쪼옵….”
“웁, 우부웁…!”
입맞춤을 해본 경험이 없던 진서원은, 동영상에서 보았던 것처럼 혀를 이용하여 꽉 닫힌 도지혁의 입술을 집요하게 공략하기 시작했다.
“우웁…! 우붑…!”
그러나 기를 쓰고 힘을 주는 도지혁의 입을 열기란 쉽지 않은 일.
“…….”
마음껏 혀를 섞고 싶었던 진서원은 묘한 답답함을 느끼며 결국, 손을 쓰기 위해 그의 손목을 놓아주고 말았고,
“…웁! 우우웁…!”
얼굴을 붙잡힌 도지혁의 입술이 마침내 열리려는 그때.
“야!!!”
어느새 정신을 차린 방한나가 씩씩거리며 진서원에게 달려들었다.
쿠당탕─!
“너이씨, 어디서 언니 머리를 때려!?”
“…언니가, 먼저…!”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의 머리채를 콱 붙들고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려는 찰나.
“둘 다 그만해!!!”
드디어 자유를 되찾은 도지혁이 벌떡 일어나, 두 사람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방한나! 진서원! 너희 둘 다 이게 뭐하는 짓이야! 지금 장난해? 진짜 팀 해체하고 싶어?”
“읏….”
“…….”
방한나와 진서원의 공통적인 약점은 팀 서울시청.
두 사람이 누구보다 팀을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도지혁은, 팀과 팀워크를 들먹이며 두 사람을 혼내기 시작했다.
“방한나! 아무리 마음이 상해서 잔뜩 취했다고 해도 그렇지. 함부로 남의 입술에 키스나 하고, 동생 머리채나 붙잡고! 이게 지금 리더로서 잘하는 짓이야?!”
“…….”
“대답 안 해? 진짜 은퇴할래?”
“그, 그건 아닌데요오….”
잔뜩 풀이 죽은 채로 슬며시 머리카락을 놓아주는 방한나.
“…….”
그런 그녀의 행동에 진서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을 흘기자,
“진서원.”
이번엔 타겟을 바꿔 그녀를 혼내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지. 차분하게 이야기하자고. 내가 다 설명할 테니까, 같이 이야기하자고! 근데 왜 그랬어?”
“…….”
“대답 안 하지? 짐 싸서 춘천으로 돌아가고 싶어?”
“야, 빨리 대답해….”
“…했어요.”
등쌀에 밀려 마지못해 대답한 진서원과 혼자 사고를 친 게 아니어서 내심 마음을 놓은 방한나.
무게를 잡고 그녀들을 바라보던 도지혁은, 이참에 기강을 다지기로 결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할게. 나, 아린이랑 사귀고 있어.”
“!”
“딱히 너희에게 숨기려는 건 아니었어. 어쨌든…. 이렇게라도 너희가 날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니까, 사과할게.”
도지혁은 보란 듯이 깊게 허리를 숙였다.
“미안하다.”
두 사람의 반박을 틀어막기 위한, 일종의 입막음이었다.
물론 이 사과가 먹히는 건 지금 당장뿐.
이미 한차례 폭주를 겪으며 정조의 위험을 느낀 도지혁은 중요 자원인 두 사람을 제어할 방법을 떠올리며 은근슬쩍 떡밥을 뿌렸고,
“…그래도 오늘 일은 분명히 선을 넘었어. …너희도 그렇게 생각하지?”
“…네….”
“…응.”
“후우…. 그래. 그럼…. …오늘 일은, 내가 없었던 걸로 할게.”
“저, 정말로요…?”
“…진짜?”
분위기에 밀려 자연스레 꼬리를 내린 두 사람은, 무언가에 홀린 듯 잘못을 시인하며 미끼를 물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너희가 한 짓을 용서한다는 건 아니야. 사람을 강제로 덮치고 함부로 입을 맞추는 건 엄연한 범죄야. 여기가 집이라 다행이지, 밖이었으면 아마 우리 팀은 공중분해 됐을 거야.”
“그, 그쵸….”
“그래도…. 다르게 생각해보면, 너희가 날 덮칠 정도로 좋아했다는 뜻이잖아?”
“…응.”
“원래 사랑이란 게 그렇지. 받아주지 않으면 밉고…. 괜히 착각하게 되고…. 그럴 수 있지.”
채찍에 이은 당근.
“어쨌든, 나는 너희 마음을 받아 줄 수 없어. 여자친구를 떠나서, 아직 너희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내가 연애 중이 아니어도 대답은 분명 똑같았을 거야.”
다시 채찍.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좋으면…. 내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더 노력하도록 해.”
그리고 다시 당근.
“어, 어떻게요…?”
눈 앞에서 흔들리는 당근을 덥석 물어 재낀 방한나는 적극적으로 공략법을 물었고,
도지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상형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자기 일을 열심히 하는 여자가 좋아.”
“…여, 열심히….”
“기본적으로 착한 사람이 좋고.”
“…착한 사람….”
방한나와 진서원은 그의 이상형을 확실히 머릿속에 새겼고,
그녀들에게 완전히 목줄을 채워버린 도지혁은, 그제야 겨우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앞으로 피곤해지겠네….’
대놓고 꼬시라고 말하긴 했지만, 주기적으로 만족을 채워주지 못하면 금세 폭주할 게 뻔하다.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두 사람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도지혁은 벌써부터 몰려오는 피로에 눈가를 꾸욱 누르며 마음을 다잡았고,
“…….”
그 사실을 모르는 방한나와 진서원은, 자신에게도 기회가 있다는 사실에 조용히 새로운 희망을 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