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82화 (82/165)

쪼개진 벽면 사이로 홀연히 드러난 섬세한 황금색 회중시계.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이게 진짜였다고…?’

나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두 눈으로 보고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다니.

아무리 초능력과 마력이 존재하는 세계라고 하지만, 도무지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오빠, 뭐해?”

그때, 적막을 뚫고 들려오는 진서원의 목소리.

“아, 응. 꺼내야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곤 조심스레 손을 뻗어 황금시계를 꺼내보았다.

스윽─

그 순간.

“!”

미약한 현기증과 함께 알 수 없는 다량의 정보가 머릿속으로 마구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불완전한 회중시계. Ex급. 기억. 10년……

다름 아닌 황금 시계에 관한 정보였는데….

‘…어?’

곰곰이 정보를 되새기던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낯선 단어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회귀.

한때는 너무나 익숙했지만, 이제는 너무나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였다.

‘이 세계에…. 회귀가 존재한다고?’

황금 시계의 정식 명칭은 ‘불완전한 회중시계’.

사용자의 기억을 그대로 보존하여 세계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아이템으로,

불완전한 성능 탓에, 반드시 10년 이상을 되돌려야 한다는 제약이 걸린 Ex급 아이템이었다.

‘…말도 안 돼….’

이 세계에 떨어져서 이렇게 큰 충격을 받은 날이 또 있을까.

분명 내 기억 속엔 ‘회중시계’라는 아이템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회중시계는 애초에 원작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는, 그야말로 미지의 아이템이라는 뜻이다.

‘이건 대체….’

마치 지금까지 믿고 있던 상식을 통째로 부정당하는 느낌.

이 아이템이 원작 소설에 등장했다면, 원작 소설이 그리 허무하게 끝을 맺지도 않았으리라.

마왕의 침공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여 지구가 멸망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절망에 빠져버린 설주희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비극적인 끝을 맞이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왜 그래?”

진서원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며 시계를 꽉─ 움켜쥔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냐. 그냥…. 뭐 좀 생각하느라.”

“…그게 뭔데?”

무심히 손에 쥔 시계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어오는 그녀.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슬쩍 빼며 적당히 얼버무리고 말았다.

“내가 찾던 아이템인데…. 네 덕분에 찾았어. 정말 고맙다.”

그러자.

“…응.”

진서원은 그저 칭찬을 받은 게 좋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거두었다.

아무래도 이게 무슨 아이템인지 별로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이제 볼일 다 봤으니까, 슬슬 돌아가자.”

“…다 끝난 거야?”

“일단은?”

무언가 할 말이 있는지 입술을 오물거리는 진서원.

그녀는 이내 무언가 생각난 듯, 금세 입을 꾹─ 다물며 잠자코 발길을 돌렸다.

“…….”

그렇게 진서원을 앞세우며 굴 바깥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회중시계의 존재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작품 내에 존재하는, 그러니까 이 세계의 기반인 원작 소설 ‘최강고수’에 등장한 모든 아이템은 저마다 어떠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원작의 설주희를 위해 만들어졌거나,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강함을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같은 의미로 이 회중시계도 분명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

하필 회귀라는 치트급 성능을 가지고 있어서 더더욱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이걸 누가 사용할 예정이었다는 거지? 왜 내 꿈속에 나온 거고?’

그렇게 여러 가지 의문을 품으며 멍하니 진서원의 뒤를 따라가던 그때.

진서원이 슬쩍 멈춰 서며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오빠. 장막.”

폭포수에 젖지 않게, 챙겨온 아이템을 미리 꺼내달라는 이야기였다.

“아, 잠시만.”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매고 있던 가방을 뒤지려는 그때.

‘…어라?’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왜 이런 사기급 아이템에 반드시 10년 이상을 되돌려야 한다는 조건을 덧붙였을까?

‘10년이면…. 소설이 시작하기도 전이잖아.’

회중시계라는 EX급 아이템을 만들었다는 건, 어쨌든 이 아이템을 작품에 등장시키기 위해서 만들었다는 뜻.

그런데 스토리에 근간을 뒤흔들 ‘회귀’라는 설정에….

굳이 ‘10년 이상’이라는 미묘한 조건을 덧붙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오빠?”

뒤늦게 무언갈 깨달은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진서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서원.

극악무도한 사이코패스 살인귀, 천마.

가족 같았던 윤인경을 잃고 인생에 비관하여 ‘천마’가 될 운명이었던 그녀는, 팀 서울시청의 에이스가 되어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다.

“…설마….”

온몸을 타고 흐르는 소름 끼치는 감각.

외려 지금껏 의심하지 않은 스스로에게 의문이 든다.

갑작스러운 결말로 실망감을 안긴 작가가 왜 시간을 되돌리는 아이템을, 그것도 10년이라는 구체적인 조건을 붙여가며 만들었겠는가?

아마도 ‘누군가’를 과거로 돌려보내기 위해서.

즉….

내가 모르는 외전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

“피곤하면 좀 자도 돼.”

“…괜찮아.”

게이트를 빠져나와, 근처의 바비큐 전문점에서 식사까지 마친 후.

볼일을 다 본 도지혁은 곧장 서울을 향해 차를 몰고 있었는데….

‘…왜 이야기가 없지?’

중대한 이벤트를 기다리고 있던 진서원은, 밥을 먹고 난 뒤에도 아무런 액션을 보이지 않는 도지혁의 행동에 크나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물어볼까?’

의문을 해소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바로 당사자에게 묻는 것.

하지만.

연애 전문가인 윤인경으로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지시를 들었던 진서원은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 신청곡 듣고 갈게요. 이지연의 죄 많은 남자. ]

그렇게 한창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고속도로를 달리길 얼마나 지났을까.

“…오빠.”

결국, 참지 못한 진서원이 슬쩍 눈치를 주기 시작했다.

“…계속 가면, 서울인데?”

“응?”

“…우리, 서울 가?”

“어…. 그렇지…?”

그러나….

‘왜 이러지…?’

진서원의 노력에도 도지혁은 그녀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애당초 그녀를 귀여운 동생 정도로 여기고 있었기에, 그런 쪽으론 상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알았어.”

“……?”

끝내 다시 입을 다물고만 진서원.

그녀는 도지혁에게도 다 계획이 있으리라 생각하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모텔로 데려가는 건가?’

첫 관계 장소로 모텔만큼 무난한 장소가 또 있을까.

더군다나 아직 모텔을 경험해보지 못한 진서원은, 모텔 자체에 은근한 환상을 품고 있었기에 더더욱 기대할 수밖에 없었다.

‘…집도 좋은데.’

물론 진서원에게 있어서 최고의 장소는 도지혁의 집.

여러모로 낯가림이 심한 그녀였기에, 익숙한 향기로 가득한 도지혁의 집은 최고의 첫 경험 장소였다.

‘…숙소….’

숙소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현재 진서원이 사는 숙소엔 방한나가 함께 살고 있다.

나름 방음도 잘 돼 있고, 방 사이에 거리도 꽤 있으니….

입만 잘 막으면 어찌어찌 안 들킬 수도 있으리라.

‘…어디로 갈까…?’

그렇게 진서원이 통통한 허벅지를 비비적거리며 달아오르는 몸을 달래길 얼마나 지났을까.

[ 목적지까지 약 500미터 ]

어느새 집 근처까지 다다르고 말았고,

“…오빠.”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한 진서원은 조심스레 다시 눈치를 주기 시작했는데….

“…우리, 어디 가?”

“응? 집 가야지.”

도지혁이 청천벽력 같은 발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다행이야. 일단 집 가서 쉬고, 한나랑 같이 저녁 먹자. 아, 오랜만에 다 같이 영화나 한 편 볼까?”

데이트는커녕 각자 휴식에 제3자를 동반하기까지.

“뭐, 보고 싶은 영화 있어?”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럴 마음이 보이질 않았다.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순간 고장이 나버린 진서원.

‘왜 이러지?’

정작 도지혁은 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채로 계속 차를 몰았고,

결국, 진서원의 욕망은 오늘도 해소되지 못하고 말았다.

*

집으로 올라가는 길.

“…….”

나는 묘하게 가라앉은 진서원의 모습에 살짝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게 있었나…?’

마치 삐진 듯한 느낌이 무언가 바라는 게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갑자기 입을 다물어버린 탓에 영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뭐…, 천천히 달래주면 되겠지.’

진서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조금 시간이 필요하다.

외전의 가능성을 알아챈 이상 생각해야 할 게 너무나 많았기에.

만약 내 추측대로 작가가 ‘회귀’라는 소재를 넣고 외전을 연재했다면, 분명히 망쳐버린 완결을 수습하기 위한 내용을 구상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설주희를 미리 성장시킨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10년의 제약도 설명된다.

마왕과의 전투로부터 10년이면 내가 퀸즈를 만들었던 시기와 비슷한데,

내 계산에 따르면 미래를 준비하기 가장 적절한 시기가 딱 10년이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작가도 회중시계에 10년 이상이라는 조건을 붙였겠지.

문제는 그 외전의 주인공이 누구냐는 것이다.

회중시계는 사용자의 기억을 고스란히 전송한다.

그렇다면 분명 회중시계를 사용한 인물이 지금 시대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인데….

미래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원작과 다른 방향성을 보이는 인물은 아직 본적이 없다.

‘아직 회중시계를 사용한 사람이 없는 건가…?’

띵──

그렇게 의문을 품은 채로 도착한 팀 서울시청의 합숙소.

“한나한테 미리 말 좀하고 가야겠다.”

“…….”

겸사겸사 방한나에게 미리 귀띔을 해두기로 한 나는, 진서원과 함께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아. 서원아. 먼저 들어가서, 한나한테 나 왔다고 좀 말해 줄래?”

“…….”

그리고는 혹시 싶은 마음에, 진서원을 먼저 집안으로 들여보냈는데….

쿠당탕─

머지않아 안쪽에서 큰소리가 들려왔다.

“!”

현관에서 기다리던 나는, 화들짝 놀라 다급히 집안으로 들어섰고,

“얘들아! 무슨 일이…! 윽….”

거실에 다다른 순간, 코를 찌르는 알싸한 알코올 향기에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어라아…. 푸로두서님이다…!”

술이라도 퍼마신 건지, 온몸을 붉게 물들인 채로 거실엔 발라당 엎어진 방한나.

“…….”

그 옆에서 서 있던 진서원은 묘하게 한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뭐야, 이게…?’

놀란 가슴을 잠재우고 애써 침착함을 되찾은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자 방한나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보았다.

“한나야, 술 마셨어…?”

그러자.

“아니이…, 안 마셨는데요오…!”

누가 봐도 취한 모습의 그녀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근데, 제가 취한 것처럼 보이세요오? 에?!”

“어어, 넘어진다…!”

나는 아슬아슬한 그녀의 모습에 깜짝 놀라, 다급히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일단 앉아서….”

바로 그때.

“야.”

“…나?”

방한나가 대뜸 내게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 너. 도지혁 너어…!”

아무래도 나에게 쌓인 게 많은 모양이었다.

“너어, 도지혁…! 이잇…!”

뭔가 분이 풀리지 않는 듯 발버둥을 치는 그녀.

“한나야. 일단 알았으니까…. 서원아! 나 좀 도와줘!”

“…….”

그렇게 진서원을 동원해가며 만취한 방한나를 달래려는 찰나.

“도지혁, 너어…. 임아린이랑 사귀는 주제에…! 또 나한테 꼬리를 쳐어?!”

“…어?”

“……?”

방한나가 돌연 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너어…. 여자친구 있다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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