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81화 (81/165)

어느덧 다가온 출장 당일.

“…다녀올게.”

“뭐, 안 챙긴 건 없지?”

일부러 일찍 깨어난 방한나는 진서원을 배웅해주고 있었다.

“…없을걸?”

“파우치는 확인했고…. 휴대폰이랑 지갑은?”

메고 있던 가방을 툭툭 건드리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진서원.

방한나는 내심 걱정스러움을 감추지 못한 채,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또다시 당부해주었다.

“프로듀서님 말씀 잘 듣고. 진짜 이상한 짓 하면 안 돼?”

“…안 해.”

“설마 ‘장난감’ 같은 거 챙기진 않았지?”

“……응.”

묘하게 반 박자 늦은 대답.

살짝 놀란 방한나는 그녀의 가방을 다시 검사할까 고민했지만, 곧 도지혁이 데리러 올 시간이라는 걸 깨닫곤 일단 내보내기로 했다.

“서원아. 프로듀서님은 네가 지키는 거야. 잘 알고 있지?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응. 나, 다녀올게.”

“그래, 조심히 다녀와…!”

쿵─! 삐리릭─

그렇게 겨우겨우 진서원을 배웅한 후.

“…하아….”

홀로 남은 방한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생각했다.

‘…부럽다….’

도지혁의 출장길에 따라가는 진서원이 너무나 부럽다고.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냥 부러운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얼마 전, 우연히 도지혁의 출장 소식을 알게 된 방한나는 자신이 동행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도지혁과 말도 잘 통하고, 나름 스스럼없는 사이에 힘도 꽤 센 편이니, 동행 역할로는 멤버들 중에서 가장 낫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서원이랑 같이 출장 가기로 했어.”

여느 때와 같이 저녁을 차리러 온 도지혁의 한마디에 그대로 격침되고 말았다.

이유는 진서원의 성장.

한마디 반박조차 할 수 없는 완벽한 명분이었다.

“으으….”

치밀어 오르는 부러움에 한참 몸부림치던 방한나는, 소파에 굴러다니던 쿠션을 꼬옥 껴안으며 냉큼 휴대폰을 집었다.

역시 정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건 휴대폰이 최고.

‘오늘은 온종일 늘어져야지….’

방한나는 최근 가입한 대학생용 커뮤니티에 접속하여 쌓인 글들을 읽기 시작했는데….

[ 제목 : 남친이 바람피우는거 같은데….  ]

내가 직접 본 거라 100%임 이새끼 어떻게 혼냄?

익명1 : 아빠 만들어서 바람 못 피우게 만들기 ㄱㄱ

익명2 : 뭘 어떻게 혼내 존나 패야지

익명3 : 지금도 딴년이랑 물고빨고 있을텐데 어떻게 감금 참음? 바로 각목 ㄱ

……

……

익명의 탈을 쓴 커뮤니티엔 온갖 자극적인 글들이 난무했고,

‘이렇게까지 한다고…?’

방한나는 어느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커뮤니티의 글들을 섭렵해나갔다.

그러던 도중….

“?”

유독 댓글이 많이 달린 글 하나가 방한나의 눈에 띄었다.

[ 요즘 퀸즈 활동 안 한다 했더니ㅋㅋ +99 ]

바로 퀸즈에 관한 글이었다

‘퀸즈…?’

유명인에 관한 소식은 항상 인기를 끄는 법.

방한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손가락을 옮겨 해당 글을 확인해보았다.

[ 전에 제주도에서 임아린이 어떤 남자랑 다녔다는 글 기억남? 그냥 찌라시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올린 글 보니까 거의 결혼에 가까운 수준인 듯? ]

사실 글 내용 자체는 딱히 특별한 게 없었다.

속칭 ‘카더라 통신’이라 부르는 인터넷 소문과 임아린의 최신 SNS 게시물을 합친 흔한 추측 글이었다.

[ 익명1 : 임아린이 결혼하는거랑 퀸즈가 쉬는거랑 무슨 상관인데ㅋㅋ ]

[ 익명2 : 이딴 것도 추게에 올라오네ㅋ 진짜 알바 관리 안 하냐? ]

[ 익명3 : 이게 결혼 암시글이면 나는 100번도 더 결혼함 씨발아ㅋㅋ ]

[ 익명4 : 진짜 개 역하네… 그렇게 추게가 오고 싶었음? ]

확실한 증거가 없는 만큼 당연히 사람들의 반응은 좋지 않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려 작성자를 욕하며 임아린의 염문설을 부정했다.

하지만.

“제주도…?”

방한나의 눈엔 전혀 다르게 보였다.

임아린과 도지혁의 사이가 심상치 않다는 건 방한나도 익히 아는 사실.

‘…임아린이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하필 ‘임아린’이 ‘제주도’에서 ‘남자’와 다녔다는 소문에 묘한 꺼림칙함을 느낀 방한나는, 황급히 SNS를 켜고 임아린의 계정을 뒤지기 시작했다.

‘…제주도…제주도….’

그리고.

[ @Im아린  제주도 도착! ]

머지않아, 임아린이 제주도에 갔었던 날을 찾아내고 말았다.

‘…어, 어라…?’

하필 도지혁이 제주도에 갔던 날과 같은 날이었다.

꿀꺽─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에 무심코 침을 꼴깍 삼킨 방한나는, 자신이 잘못 봤으리라 생각하며 조심스레 도지혁과 나눈 메시지를 뒤져보았는데….

“…….”

아니나 다를까, 임아린과 같은 날짜에 출발하여 같은 날짜에 돌아온다는 내용이 고스란히 적혀있었다.

집까지 찾아올 정도로 가까운 두 사람이 같은 기간에 같은 장소로 놀러 가서, 따로 놀았을 확률이 몇이나 될까.

아마 0%에 수렴하리라.

‘…아, 아니겠지….’

방한나는 멋대로 떠오르는 추측들을 억지로 부정하며 임아린의 SNS를 꼼꼼히 확인해보았다.

‘아닐 거야….’

하지만.

[ @Im아린  ♥正正正正♥    ]

[ @Im아린 ♥맛있는 점심♥  ]

[ @Im아린 ♥대낮부터 호캉스…?♥   ]

[ @Im아린 ♥미리 신부수업 중♥

정확히 제주도 여행을 기점으로, 한창 연애 중임을 과시하는 게시물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고,

“…….”

이쯤 되니, 방한나도 슬슬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지혁이….

임아린과 사귈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

“여기서부터는 걸어가야겠네.”

“…여길?”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넌지시 되물어오는 진서원.

여전히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엔 선명한 귀찮음이 깔려 있었다.

“차는 여기에 둘 거니까, 혹시 챙길 거 있으면 미리 챙겨.”

“……응.”

점심 전에 지리산 게이트 근처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우리는, 등산로를 오르기 위해 짐을 챙겨 걷기 시작했다.

“이렇게 산 타는 건 또 오랜만이네. 어때, 기분 좋지 않아?”

“…아니.”

진서원은 산을 타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드물게 틱틱거리며 못마땅함을 내비쳐왔는데,

‘귀엽네.’

그 모습이 또 귀여워서 무심코 웃음이 흘러나왔다.

나중에 딸을 낳는다면, 진서원 같은 딸도 괜찮으리라.

“오늘 진짜 맛있는 거 사줄 테니까, 조금만 힘내자.”

“…맛있는 거?”

“가는 길에 엄청 괜찮은 바비큐집이 있거든. 바비큐 괜찮지?”

“…응.”

먹을 거에 혹한 듯, 다시 눈을 빛내기 시작한 진서원과 함께 산을 오르길 얼마나 지났을까.

“저기다.”

우리는 드디어 산 중턱에 마련된 게이트 관리소를 발견할 수 있었다.

‘무슨 산장처럼 생겼네.’

게이트 관리소는 보통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모던한 느낌의 직사각형 건물이 설치되곤 하는데,

이곳은 워낙 작은 곳이라 그런지, 마치 등산객들을 위한 쉼터 같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준비됐어?”

“…응.”

그렇게 간단한 수속을 마친 뒤.

우리는 지체하지 않고 바로 게이트 내부로 들어섰다.

‘오…. 꽤 멋있는데?’

게이트를 지나자마자 드리워지는 광활한 풍경.

첩첩산중으로 쌓인 거대한 산맥과 게이트 특유의 이국적인 느낌의 식물들이 섞인 게, 비현실적인 그림을 보는 듯했다.

“…산이네.”

물론 진서원의 눈엔 아니었다.

아마 산행을 싫어하는 그녀의 눈엔 마치 거대한 스텝밀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자, 어서 출발하자.”

“…응.”

우리는 미리 조사해온 심마니들의 약도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세 갈래 폭포’라고 불리는 포인트.

심마니들의 정보에 따르면, 세 갈래 폭포로 가는 길이 워낙 험해서 잘 다니지 않는 길이라고 한다.

꿈속에서도 꽤 헤맸던 걸 생각해보면, 생각보다 고된 길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산길 자체는 지구의 산과 크게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이름 모를 식물들이 많은 정도?

“바닥이 훅훅 꺼지네…. 밑에 조심해. 서원아.”

“…응. 오빠도.”

그렇게 몇 번이나 방향을 확인해가며 폭포를 찾아다니길 얼마나 지났을까.

파삭──!

“!”

살짝 앞에서 걷고 있던 진서원 쪽의 바닥이 무너지고 말았다.

“서원아!”

잠시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던 그녀는 곧바로 허공을 내디디며 아예 아래쪽으로 뛰어내렸고,

타앗─!

날랜 동작으로 나무들을 뛰어넘더니, 이내 평평한 바위에 착지해버렸다.

“서원아! 괜찮아!?”

목소리를 높여 상태를 묻자, 언제 그랬냐는 듯 태평하게 손을 흔들어오는 그녀.

분명 깜짝 놀랄법한 상황이었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한 강심장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여기…!”

바로 그때.

“…물…!”

바위에 서 있던 진서원이 더 아래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소리치기 시작했다.

“잘 안 들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워낙 작은 탓에 내용이 잘 들리지 않았고,

몇 번의 고성을 주고받은 끝에, 아예 내가 내려가기로 했다.

“잠깐 기다려! 내가 내려갈게!”

그렇게 튼튼해 보이는 나무들을 밟아가며 진서원에게 다다르자….

“괜찮아? 다친 곳은 없어?”

“…응.”

그녀가 다시 아래쪽을 가리키더니, 뜻밖에 이야기를 꺼내왔다.

“…저기서 물소리 들려.”

“…뭐?”

뭔가 했더니, 물소리가 들린다는 이야기였다.

“…오빠는, 안 들려?”

“나는 잘 모르겠는데…?”

“…그럼, 오빠가 나 따라와.”

“어?”

진서원은 내가 듣지 못한 걸 들었다는 사실에 어깨가 올라간 듯 은근히 우쭐거리는 얼굴로 나를 이끌었고,

쏴아아아아아아아──────

“…맞지?”

“진짜였네…?”

그렇게 찾아 헤매던 세 갈래 폭포를 단번에 찾아내고 말았다.

*

‘…내가 해냈어.’

진서원은 자신이 폭포를 찾아낸 것에 굉장히 뿌듯해했다.

물론 단순한 우연으로 찾아냈긴 했지만, 어쨌든 미약한 물소리를 듣고 길을 이끈 건 자신이었기에 충분히 칭찬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나, 잘했어?”

“물론이지!”

다행히 도지혁은 진서원의 공을 높게 쳐주었는데….

“정말 잘했어. 너 아니었으면, 아마 밤새 헤맸을 거야!”

칭찬의 말만 건넬 뿐, 이렇다 할 포상은 내려주지 않았다.

‘…이게 다야?’

물론 칭찬이 싫다는 건 아니다.

칭찬은 긍정적인 의미이고, 자신을 좋게 봐주고 있다는 뜻이었기에.

다만, ‘사랑하는 사이’로서 조금 더 긴밀하게 표현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들었다.

‘…조금 이따 해주겠지.’

다행히 진서원은 참을 줄 아는 여자였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차곡차곡 모아서 확실하게 터트려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게 짧은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슬슬 들어가 보자.”

진서원은 도지혁을 따라 폭포 너머에 파인 작은 굴로 들어섰다.

“좀 어둡네…. 넘어지지 않게 발 조심해.”

“…응.”

그리고 조금 더 안쪽으로 걷자, 이내 막다른 길목이 나타났는데….

“…찾았다…!”

도지혁은 굴 안쪽의 평평한 벽을 발견하곤 살짝 흥분한 듯한 모습으로 다가가 벽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이게 진짜 있다니….”

마치 꿈을 이룬 사람처럼 묘한 반응을 보이는 도지혁.

그 모습을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진서원은, 자신을 칭찬할 때보다 더 기쁜 듯한 그의 모습에 살짝 질투심을 느끼고 말았다.

‘…그렇게 좋은가?’

“분명…. 이렇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지혁은 진서원을 뒤로한 채 매끄러운 벽면에 어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화아아아악……

손길이 닿는 곳을 따라 밝은 빛이 나더니,

“…됐다.”

이윽고 매끈한 벽면에 어떠한 그림을 그려냈다.

‘…해?’

옆에서 그림을 유심히 살피던 진서원이 의문을 품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그 순간.

쿠구구구구궁……

매끄러운 벽면이 크게 진동하며 좌우로 쪼개지기 시작했다.

“!”

쪼개진 벽면은 마치 코인 라커처럼 안쪽에 작은 공간을 내보였고,

그 속엔 라이트에 반짝거리는 황금색 회중시계가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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