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다가온 당일 날.
“…….”
살짝 긴장된 마음으로 부랴부랴 준비를 마친 나는, 창고 속에 고이 잠들어있던 오래된 장갑 하나를 꺼내어 보았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작은 브랜드의 전투용 장갑.
당시 출시된 장비 중의서 나름 가장 좋은 모델로, 무려 A급 괴수의 소재가 들어간 장갑이었는데….
얼마나 험하게 사용했는지, 군데군데 헤진 것이 꽤나 낡아 보였다.
‘벌써 10년이 지났구나.’
오래전, 설주희가 처음으로 돈을 모아 선물해주었던 장갑이다.
스윽-
나는 조용히 장갑을 매만지며 낡은 기억들을 천천히 되새겨보았다.
아카데미 시험 전날, 유난히 틱틱거리던 설주희가 뜬금없이 선물을 내밀어 왔던 기억.
작은 브랜드라 그런지, 영 착용감이 좋지 않다며 괜히 불평했던 기억.
이 장갑을 끼고 대련에서 승리를 따냈던 기억.
끝내 아카데미 종합 2등을 달성하며, 1등이었던 설주희와 나란히 사진을 찍었던 기억.
그리고….
훈련 도중 불의의 사고를 당했던 끔찍한 기억까지.
돌이켜보니, 꽤 많은 추억이 담겨 있었다.
“…오래도 썼네.”
지금까지 이 낡은 장갑을 버리지 못 한 건, 일종의 미련이 아니었을까.
결국, 조연은 주인공이 될 수 없다는 알량한 미련.
지금까지 이사를 몇 번이나 다녔는데도 온갖 의미를 부여해가며 꼬박꼬박 챙긴 걸 보면, 내심 미련을 버리지 못 한 게 확실하다.
“…이제 버릴 때가 됐지.”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아니, 달라져야 한다.
주인공이 될 수 없다면, 그 누구보다 빛나는 조연이 되면 되니까.
그래서 백유진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슬슬 가야겠다.’
장갑을 곱게 포개며 몸을 일으킨 나는, 챙겨두었던 짐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현관 근처에 놓인 쓰레기통 앞에 서서….
툭-
낡은 장갑을 버려버렸다.
솔직히 장갑 자체에 깃든 추억이 많기에, 아쉬움이 남은 건 사실이지만….
고작 미련 따위에 발목을 잡히기엔, 내 앞날이 너무 창창하다.
*
“긴장되진 않아요?”
“지금 엄청 떨고 있는데, 티 안 나요?”
“어머, 진짜요?”
외계인을 고문한다는 소문이 돌던 백일 제약의 연구실에선 아쉽게도 외계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대신 용도를 알 수 없는 고가의 장비들과 퀭한 눈의 연구자들이 즐비한 게, 그동안 어떤 식으로 기상천외한 신약들을 개발했는지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쪽은 이번 신약 개발을 총괄하신 공 팀장님이세요.”
“반갑습니다. 공현식입니다.”
“도지혁입니다. 오늘 잘 부탁하겠습니다.”
깔끔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두꺼운 안경이 인상적인 그는 외모에 비해 꽤 중후한 느낌이 드는 사내였는데….
알고 보니 50대를 넘긴 중년이라는 게 밝혀져, 상당한 놀라움을 샀다.
‘이게 약의 힘인가…?’
이번 시술은 책임자인 공현식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이번 신약은 게이트에서 발견한 ‘리미트리스’라는 괴수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리미트리스는 흔치 않게 변이를 일으키는 괴수로….”
연구소 한편에 마련된 장소에서 간단하게 약에 관한 설명을 들은 뒤.
……
[ 3. 최근 복용한 약물이 있으신가요? Yes ( ) No (*) ]
[ 4. 최근 잠자리를 가진 적이 있으신가요? Yes (*) No( ) ]
……
조금 더 상세한 체크리스트를 작성.
“이제 진행할까 하는데, 혹시 괜찮으신가요?”
“바로 진행하시죠.”
“그럼, 일단 유도제 도포부터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리고는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은 후, 한편에 마련된 부스의 특이한 의자에 앉아 왼쪽 다리 전체에 끈적끈적한 흰색 약물을 도포했다.
설명에 따르면, 번데기의 겉껍질에 해당하는 약이라고 한다.
“준비되셨으면, 바로 섭취하시면 됩니다.”
이윽고 전달된 캡슐 알약.
이 약을 먹으면, 다리에 바른 약과 반응하며 다리 자체가 재구성된다고 한다.
솔직히 말만 들었을 땐 썩 믿기가 어려웠지만….
어쨌든 검증된 약이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꿀꺽-
그렇게 물과 같이 약을 삼킨 직후.
“마취하겠습니다.”
곧바로 주입되는 마취약.
주입이 끝나자마자 안전을 위해 푹신한 기계들이 온몸을 고정하였고,
철컥- 철컥-
마취가 돌길 기다리며 가만히 하얀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내 별의별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아린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애들은 잘 쉬고 있나…?’
그렇게 여러 가지 생각을 떠올리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길 얼마나 지났을까.
‘강의 자료는 어떻…….’
순간 의식이 사라져버렸다.
*
서울 모처의 어느 작은 빌라.
다섯 평 남짓 작은 방에서, 홍유라는 한껏 진지한 얼굴로 태블릿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
그리고 그녀의 맞은편엔 작은 체구의 여성이 앉아있었는데….
“제가 팬이라서 특별히 해드린 거 아시죠? 원래 이쪽 업계가 큰 기업들은 안 건드는 게 원칙이거든요.”
머리카락과 후드티의 색깔을 보라색으로 통일한 그녀는, 떡볶이를 찔러 먹던 작은 꼬챙이를 까딱거리며 으스대기 시작했다.
“하여간…. 천화 그룹 정도 되는 대기업도 결국엔 다 나쁜 놈들밖에 없다니까요? 그러니까, 어서 그런 곳에서 나오셔서….”
바로 그때.
“저기.”
듣다 못 한 홍유라가 슬쩍 고개를 들며 그녀의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미안한데, 조금만 조용히 해줄래요?”
“아, 넵.”
다시 시선을 거두곤 유심히 태블릿을 살피는 홍유라.
천화 그룹과 구석일의 뒤를 캐던 그녀는 무언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뭔가 이상해….’
보라색으로 도배한 여인, 김노아가 찾아온 자료는 틀림없는 진짜.
펜타곤을 해킹한 천재 해커라고 불리던 그녀의 이명은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홍유라는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방대한 자료에 더더욱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보고 있던 자료는 천화 길드와 천화 그룹을 운영하는 주요 경영진에 대한 것.
그들이 저질러온 자잘한 비리들은 물론, 전산상에 찍혔던 모든 자료가 담겨져 있었고,
경영진들이 직접 추진하여 성과를 이루거나, 몰래 비리를 저질러 모은 돈의 일정 부분을 ‘정체불명의 인물’에게 지속해서 돈을 송금하는 정황이 포착됐는데….
문제는 그 정체불명의 인물이 내린 지시들이 죄다 수상쩍었다.
……
[ 팀 퀸즈의 방향성 재고 ]
[ 팀 퀸즈의 프로듀서 교체 방안 ]
……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지, 유독 퀸즈에 관한 내용을 지속적으로 강조해온 것들뿐.
‘…이건 대체….’
정체불명의 인물은 경영진들에게 획기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한편, 꾸준히 도지혁을 퀸즈에서 내보내기 위한 ‘작업’을 지시했다.
그게 부정적인 내용이든 긍정적인 내용이든, 마치 도지혁이 퀸즈 자체와 거리를 두길 바라는 느낌이었다.
‘도지혁을 밀어내서 어쩌려는 속셈이지?’
홍유라는 그 정체불명의 인물이 얻을 수 있는 ‘이득’에 초점을 둔 채로 곰곰이 머리를 굴려보았다.
도지혁이 팀을 나가면, 단기적으로 팀의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팀의 성적이 떨어지면 매출이 떨어지고, 매출이 떨어지면 팀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손해.
이는 절대적인 이득과는 거리가 매우 멀었다.
‘도지혁이 팀을 나가서 좋은 사람은…. 다른 길드밖에 없어.’
홍유라는 살짝 생각을 바꿔보았다.
퀸즈의 성적이 떨어지면서 유능한 프로듀서인 도지혁이 풀려난다면 누가 이득이겠는가?
당장 세진이 도지혁을 삼키며 크나큰 이득을 보았기에, 정체불명의 인물이 세진과 관련된 가능성이 있었다.
‘도지혁만 빼가면 된다는 건가…?’
세진을 용의자로 지목한 채로 추측을 이어가던 홍유라는 이내 고개를 내젓고 말았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내줬던 정보 중엔, 깜짝 놀랄 정도로 꽤 알짜배기인 정보들이 많았기에.
비단 세진이 아니더라도, 다른 단체일 가능성이 확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누구지…?’
정체불명의 인물은 천화가 이득을 보는 쪽이 스스로에게도 이득인 인물.
즉, 천화와 관련된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우리를 휘두르려는 건가?’
홍유라는 언젠가 자신들에게 엄한 마음을 품었던 사람들을 생각해보았다.
데이트라도 해보고자 접근했던 수많은 남성을 도지혁이 몰래 차단해온 경력이 있기에.
그러나.
‘…아니야….’
이번에도 금방 추측을 접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 타산이 안 맞을뿐더러, 도지혁을 뛰어넘고 접근해올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당장 SNS의 메시지를 이용하면 얼마든지 접근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럼….’
그렇게 홍유라가 한창 추리에 빠져있을 무렵.
“어, 뭐야.”
조용히 자료를 뒤적이던 김노아가 말을 꺼냈다.
“이 사람 죽었어요?”
“…누구요?”
“박정석 이사라는 사람. 몇 년 전에 죽은 사람이었네요?”
“박정석…?”
홍유라는 그에 대해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기억이 날 수밖에 없었다.
박정석은 유독 길드 운영을 하찮게 여기며 이것저것 간섭을 했던 인물.
그 성격 탓에 도지혁과 크게 말싸움이 붙어서, 중간에 낀 구석일이 진땀을 뺐던 일이 있었는데….
바로 며칠 뒤에 급성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해버렸다.
“그 사람은 왜요?”
박정석도 정체불명의 인물로부터 지시를 받았던 임원 중의 한 명.
홍유라는 뜬금없는 그의 언급에 슬쩍 질문을 건넸고,
김노아는 무심히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대답했다.
“아니, 그 사람이랑 임아린님이 만났다는 자료가 있어서요. 근데 죽은 사람이었구나….”
그 순간.
“…뭐요?”
홍유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말았다.
“아린이가…. 박정석을 만나요?”
“네. 보여 드릴까요?”
김노아는 자신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는 사실에 흥분하여 재빨리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것 봐요! 임아린님이죠?”
모니터에 떠오른 흐릿한 CCTV의 한 장면.
마치 휴대폰으로 찍은 듯한 CCTV의 화면은 박정석의 사무실로 들어가는 복도를 비추고 있었고,
화면의 한구석엔 신비로운 은발의 머리카락을 지닌 한 여성이 잡혀있었다.
“박정석 휴대폰으로 찍힌 사진인데, 클라우드에 저장이 돼있던 걸 가져온 거예요!”
누가 봐도 임아린이었다.
*
같은 시간.
백유진은 서서히 눈을 뜨는 도지혁을 바라보며 슬쩍 말을 건넸다.
“정신이 좀 들어요?”
“으….”
도지혁은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전등을 가리곤, 눈가를 찌푸리며 대답했다.
“벌써 끝났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거 보니까, 마취가 잘 들었던 거 같네요.”
끝났다는 말에 슬쩍 고개를 들곤 다리를 살피는 도지혁.
조용히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의 귀여운 모습에 피식- 웃음을 흘린 백유진은, 시술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소식과 함께 질문을 건네보았다.
“어때요? 다시 태어난 기분이?”
그러자.
도지혁이 슬쩍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쓱 끌어올리며 대답했다.
“최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