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일 뒤에 먹히는 프로듀서-77화 (77/165)

한규리의 도움으로 꿈속에서 본 의문의 아이템에 관한 정보를 찾아낸 뒤.

나는 아이템을 얻어내는 건 나중으로 미뤄둔 채, 우선 백일 길드에 관한 업무부터 진행하기로 했다.

유력한 행선지인 지리산 992 게이트는 F급에 해당하는 하급 게이트.

랭크가 낮은 심마니들이 다닐 정도로 굉장히 안전한 편에 속하긴 하나, 엄밀히 따지면 나는 아직 게이트에 들어갈 만한 상태가 아니다.

아마 조만간 백일 그룹으로부터 치료를 받고 난 뒤에 들어가면 적당하지 않을까 싶다.

“으음….”

그렇게 사무실에 앉아, 백일 그룹으로 넘길 자료를 준비하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우웅─ 우웅─

책상에 올려둔 휴대폰에 짧은 알림이 울렸다.

[ ㄱ아린이♥ ]

다름 아닌 여자친구의 메시지였다.

“…….”

조용히 파티션 너머로 슬쩍 고개를 뺀 나는, 김준형과 한규리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타닥…타다닥…

잔잔히 울려 퍼지는 키보드 소음.

아무래도 한창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대로 다시 고개를 숙인 나는, 휴대폰을 집어 메시지를 확인해보았다.

[ ㄱ아린이♥ : 나 잠깐 밖에 나왔는데, 오늘 점심 같이 먹을래? ]

무슨 일인가 했더니, 함께 점심을 먹자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저녁에 볼까 했는데….’

사실 내일부턴 다시 바빠질 예정이었기에, 안 그래도 저녁 시간에 맞춰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려던 참.

‘또 보면 좋지 뭐.’

[ 나 : 그럴까? ]

[ 나 : 어디서 먹을래? ]

나는 별생각 없이 식사 제안을 받아들이곤, 그녀가 좋아했던 식당들을 떠올려보았다.

‘오늘은 한식으로 갈까?’

그런데.

[ ㄱ아린이♥ : 여기로 가자! ]

그녀는 이미 장소를 점찍어놓은 듯 곧장 링크를 보내왔고,

“……?”

바로 링크를 열어 장소를 확인한 나는, 순간 두 눈을 의심하고 말았다.

[ PIA STAY HOTEL ]

임아린이 보내온 장소는 식당이 아니라, 고급 비즈니스 호텔.

‘잘못 보낸 건가?’

나는 당연히 그녀가 착각하여 잘못 보냈으리라 생각하며 답장을 보내보았다.

[ 나 : 여기 맞아? 호텔인데? ]

그러자.

[ ㄱ아린이♥ : 맞아! ]

뜻밖에도 그녀가 귀여운 이모티콘을 덧붙이며 긍정을 표해왔다.

‘뭐지…? 여기 식당이라도 가려는 건가?’

내로라하는 식당들을 놔두고, 굳이 호텔로 가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 나 : 여기 뭐 있는데? ]

의문을 품은 나는 뒤이어 메시지를 보내보았고,

[ ㄱ아린이♥ : 침대! ]

당연하다는 듯 날아온 답장에, 순간 넋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녀는 대낮부터 자고 싶은 모양이었다.

*

다음날.

다시 시작된 팀 서울시청의 토벌 준비.

“다들 잘 쉬었어?”

““네!””

“좋아. 오늘도 열심히 해보자!”

휴가를 마치고 돌아온 세 사람이 합을 맞추며 워밍업을 하는 사이, 한규리가 다가와 업무에 관한 소식을 공유해왔다.

“프로듀서님! 방금 백일 그룹 쪽에서 내용 확인했다고, 그대로 진행해 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요? 그쪽도 꽤 일 처리가 빠르네요.”

“그리고…. 그….”

묘하게 조심스러운 태도로 말을 꺼내오는 한규리.

“세진 쪽에서도, 연락이 왔는데….”

드디어 세진 길드도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줬네.’

블랙로즈를 1위로 만들어낸 이후, 세진 길드와의 관계는 최고조에 다다랐다.

그래서 그런지 백일과 일하는 것에 별다른 개입을 해오지 않았는데,

막 일을 시작할 즈음이 돼서야 연락이 온 걸 보면, 슬슬 눈치를 주려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요?”

“음…. 오늘은 훈련 때문에 비우기가 힘들 거 같은데. 점심 즈음에 담당자 좀 보내달라고 해주시겠어요?”

“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한규리는 아직 세진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듯 조심스레 되물어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호하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우리는 지금 ‘백일 길드’가 아니라, ‘백일 그룹’하고 일하는 거니까요.”

전혀 문제 될 게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아시겠죠?”

“…네.”

그렇게 한규리에게 일을 맡긴 후.

계속해서 이어진 오전 훈련.

오후엔 이론 강의가 예정돼 있기에, 평소보다 가벼운 훈련 위주로 진행됐다.

“서원아. 조금만 더 강하게 공격해볼래?”

“…응.”

‘다들 기량이 많이 올라왔네.’

이제 겨우 세 번째 토벌을 앞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팀원들은 내 예상보다 훨씬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주었다.

서포터인 김나래의 경우, 현재 C랭크 상위권 수준.

고작 C랭크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때 D랭크 중간 수준에 머물러있던 걸 생각해보면, 상당히 가파르게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성장이 빠른 건 방한나도 마찬가지.

그녀는 겨우 D랭크에 턱걸이로 걸치고 있던 것에 비해, 어느덧 B랭크가 보이는 수준까지 올라온 것도 모자라, 매번 지닌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만약 그녀가 모든 잠재력을 이끌어낼 수 있다면, 아마 홍유라에 버금가는 1선발 탱커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약간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우리 팀의 에이스인 진서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진서원의 현재 수준은 여전히 하위권에 머물러있다.

그러나 그녀가 여태껏 보여온 활약은 분명 그 이상.

이론을 뛰어넘는 그녀의 활약을 돌이켜보면, 아무래도 내가 인지하지 못한 의문의 화학적 작용이 존재하는 것 같다.

‘빨리 성장했으면 좋겠는데….’

딱히 드러내고 있진 않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진서원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다.

그녀는 원작 소설 속 설주희를 궁지로 내몰았을 정도로 강력했던 숙적.

맨손으로 사람을 터트려버리던 ‘천마’의 힘을 빌릴 수 있다면, 앞으로 벌어질 두 번의 침공도 손쉽게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얘들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앗, 정말요!?”

“한나,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그, 그건 아닌데….”

“…난 좋은데.”

“나도 좋아.”

“어, 어라…?”

그렇게 오전 훈련을 마친 후.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짧은 휴식 끝에 이어진 점심시간.

“우움…! 프로듀서님! 이거 엄청 맛있어요…!”

“그래? 나도 그거로 먹어볼 걸 그랬나?”

“그, 그럼…! 제 것 좀 드셔보…?”

“…이거 먹어요.”

“앗…!”

“아. 고마워. 서원이가 줬으니까, 이걸로 먹어볼게.”

“네에….”

멤버들과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먼저 식사를 마친 한규리로부터 연락이 왔다.

[ 세진 쪽에서 오신 담당자분이 기다리고 계세요! ]

세진에서 온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얘들아. 나 먼저 일어날 테니까, 천천히 먹고 와.”

“아, 네!”

이미 식사를 거진 끝냈던 나는 그대로 식당을 나섰고,

가볍게 가글만 한 뒤에, 곧장 담당자가 기다린다는 위층 사무실로 발길을 옮겼는데….

“꽤 빨리 왔네?”

“…담당자가 너야?”

세진에서 담당자가 왔다고 하더니, 무려 단장께서 직접 행차하셨다.

“내가 아니면 누가 담당하겠어?”

이혜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맞은편 소파를 가리키며 묘한 눈짓을 보내왔고,

나는 잠자코 자리를 잡으며, 아무것도 모르는 척 용건을 물어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직접 여기까지 왔어?”

“네가 누구 남자인지 제대로 알려주려고 찾아왔지.”

“…뭐?”

그녀는 스타킹으로 감싼 다리를 슥─ 꼬곤, 못마땅하다는 듯 시선을 보내오며 사뭇 공격적인 발언을 내던져왔다.

“백유진이 대체 뭘 제시했길래 쪼르르 계약했어? 걔가 옷 벗고 머리라도 조아렸니?”

드물게 말투가 거친 게, 왠지 백유진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은 느낌이었다.

‘재벌집 따님들도 영 만만치 않네.’

나는 그녀의 의중을 떠볼 속셈으로 슬쩍 말을 꺼내보았다.

“다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내가 진짜 몰라서 너한테 묻는 거 같아?”

나긋나긋한 말투로 꽤 의미심장한 대답을 건네왔다.

‘그렇단 말이지….’

간 보기를 끝내고 잠시 입을 다물었던 나는, 이혜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치며 사실을 밝혔다.

“그쪽에서 내 다리를 고쳐 주기로 했어. 웬만하면 거절했겠지만, 이건 거절할 수가 없더라고.”

“다른 제안은?”

마치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라는 것처럼, 담담히 물어오는 그녀.

나는 외려 그런 반응에 한결 마음을 놓곤 얼굴에 철판을 두르며 뻔뻔히 대답했다.

“세진에 들어가지 말고, 나보고 중립을 지켜 달라고 하더라.”

“흐응….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니?”

“이건 조금 더 생각해 보기로 했어. 너랑 약속한 것도 있고…, 함부로 단정 짓긴 좀 그렇잖아?”

요컨대, 상황을 봐서 움직이겠다는 말이었다.

“그래…. 원래 좋아하는 사람이 더 아쉬운 법이지. 내가 이해할게.”

이혜리는 그밖에 다른 말을 덧붙여오지 않았다.

그저, 나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을 뿐이었다.

“왜 이래. 내가 잘못한 거 같잖아.”

“네가 잘못한 거 맞아. 이 악물고 계약 추진한 내 입장은 조금도 생각 안 했니?”

“다른 그룹이랑 계약하지 말라는 항목은 없었잖아?”

“넣었으면 계약 안 했을 거잖아.”

나는 슬쩍 미소를 지을 뿐, 그녀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갑질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네.”

이혜리는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면서도, 딱히 별다른 말을 꺼내오진 않았다.

다만, 백유진에겐 절대 마음 한구석도 내주지 말라며 신신당부를 할 뿐이었다.

“잊지 마. 두 번째는 나야.”

나는 백유진과 이미 선을 그었다는 사실을 숨기며 그녀에게 슬쩍 미소를 지어 보였고,

그렇게 세진과 백일 사이에 양다리를 걸친 건 생각보다 쉽게 넘어갈 수 있었다.

*

시간은 모래와 같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꽉 움켜쥐어도, 손 틈으로 빠져나가는 걸 막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그 비유가 참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시간은 정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흘러갔기에.

“프로듀서님! 도장…! 도장 찍어주세요…!”

“음…. 이번엔 특히 고생했으니까…. 두 개 찍어 줄게.”

“저, 정말요!?”

“그럼! 혼자 골렘 다섯 마리나 상대했는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않겠어?”

“가, 감사합니닷…! 이제 조금만 더하면…!”

“…저는요?”

“그래. 서원이도 고생했어.”

팀 서울시청의 세 번째 게이트 토벌도 그리 어렵지 않게 끝낼 수 있었는데,

[ 팀 서울시청, 파죽지세로 연달아 게이트 돌파…… ]

[ 무서운 신인, 서울시청. 랭크 측정은 언제? ]

[ 오버 랭크 게이트 연속 토벌. 팀 서울시청의 비밀은…. ]

그 덕분인지 연일 쏟아지는 기사들 속엔 항상 팀 서울시청의 이름이 섞여 있었다.

“지혁아. 어떤 사람들이 우리 팬클럽 만들었다고, 관리 좀 해달라는데. 이거 어떡할까.”

“아니, 팬클럽? 벌써?”

그새 팬클럽까지 생겨나서, 김준형의 업무가 늘어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 페이스대로만 가면 충분하겠어.’

그렇게 성공적인 나날을 보내며, 팀 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어느 날.

백유진으로부터 한통의 연락이 도착했다.

[ 백일그룹 백유진 : 이번 토벌도 고생했어요. 길드 내부에서도 엄청 기대가 커요. ]

[ 백일그룹 백유진 : 이쪽 준비는 모두 끝났으니, 언제든지 바로 연락 주세요. ]

드디어 약이 준비됐다는 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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